메뉴 건너뛰기

close

대학 시절 만난 스승들 이야기

1954년 청전이 그린 추경산수: 아침
 1954년 청전이 그린 추경산수: 아침
ⓒ 청전

관련사진보기


문은희가 1955년 입학했을 때 홍익대 미대에는 서양화에 김환기, 한묵, 이종무 교수, 동양화에 이상범(李象範: 1897-1972), 김기창(金基昶: 1913-2001), 천경자(千鏡子: 1924-2015) 교수가 있었다. 학창시절 문은희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선생은 청전(靑田) 이상범 교수다. 그에게서 산수와 수묵을 배웠기 때문이다. 청전은 스승인 심전(心田) 안중식으로부터 배운 정형산수를 뛰어넘어 우리의 산수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실경산수(實景山水)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더욱이 서양 풍경화의 기법을 도입해 우리 주변의 산수와 자연을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청전의 산수화는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경치와 서정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는 또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수묵화법을 사용해 청전양식이라 불리는 그만의 화법을 만들어냈다. 청전이 수묵으로 그린 산수를 수묵 실경산수화라 부른다. 그러나 여기서 실경은 실제의 경치가 아닌, 화가의 손을 통해 그려진 경치(寫景)다. 그러므로 청전의 산수에는 기암괴석과 경승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1956년의 산수화: 청전의 화법을 따르고 있다.
 1956년의 산수화: 청전의 화법을 따르고 있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그 영향을 받았는지, 1956년 문은희가 처음 발표한 동양화도 서울 교외 산골 시냇가에서 아낙이 빨래하는 모습이다. 산, 나무, 바위, 물, 여인이 중요한 오브제다. 시선은 노란 지붕의 초가집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바위를 지나 파란 치마의 여인에게로 옮겨진다. 그리고 여인의 자리에서 다시 산수를 돌아보게 된다.

색감이 상당히 은은하면서도 좋다. 문은희는 그림 위에 '1956 청전선생님 화실에서 첫 번작'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 그림은 문은희가 누하동 청전 화실에서 그린 그림으로, 대외적으로 발표한 최초의 동양화다. 스승의 기법을 따라 우리에게 친숙한 산하, 마음의 고향, 서정적 풍경을 그리고 있다.

국전 입선작 포플러
 국전 입선작 포플러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문은희의 화풍은 남관 선생에게 배운 서양화 기법도 무시할 수 없다. 스케치를 토대로 하는 채색 기법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58년 국전에 출품해 입선한 '포플러'다. 이 그림의 다른 이름은 '교외(郊外)'다. 서울 동부 교외의 신작로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문화백은 성동구 뚝섬 근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쭉쭉 뻗은 포플러의 상승감이 두드러지고, 흑백의 대비가 뚜렷하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고상한 품격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그 해 12월 고려대학교에 기증되었고, 3만환(圜)의 사례금을 받는다. 감사증서에는 일층 정진하여 사계(斯界)에 공헌하길 마음으로 축원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것은 당시 유진오 총장이 문은희 화백에게 보낸 증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운보 김기창, 나중에 후원자가 되다

운보의 대표작: 아악의 리듬
 운보의 대표작: 아악의 리듬
ⓒ 김기창

관련사진보기


문은희는 내면에 에너지와 정열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운보의 화법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업시간 외에 운보 화실을 찾아 인물의 묘사와 표현에 대해 지도를 받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시 파벌이 있어, 청전 제자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지도해주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이 굵고 호쾌하게 표현하는 운필법은 운보 선생에게 배운 화법이다.

운보는 문은희가 여장부 기질이 있고, 의지가 대단하니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문은희의 그림을 대담하면서도 심오하다고 찬양했다. 그러나 문은희가 대학졸업 후 10년 가까이 가정생활에 몰두하느라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을 교수들도 안타까워했다. 문은희 자신도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예술혼을 표출하지 못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1970년대 함께 미술활동을 한 홍익대 미대 동문들
 1970년대 함께 미술활동을 한 홍익대 미대 동문들
ⓒ 문은희

관련사진보기


본격적으로 그림 작업을 다시 시작한 것은 1970년이다. 그 때 김기창 화숙(畵塾)에 다니면서 홍대 미대 동문들의 모임인 신수회(新樹會)에 가입, 회원전에 작품을 내게 되었다. 운보 김기창 선생과 소원 문은희의 사제관계는 운보가 세상을 떠나는 2001년까지 계속된다. 운보는 1985년 대구 중앙미술관 전람회 팜플렛에 실린 글에서 문은희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남녀 학생 가운데 몸이 좀 부대하고 눈이 가늘게 생긴 인상적인 여학생이 한 사람 있었다. 아주 여장부 같아서 많은 학생 가운데 언제나 주인노릇 하듯 했다. 졸업 후에도 나는 그 학생을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신수회가 탄생되고, 그 회원이 된 탓에 만날 수 있었으며, 그의 화실에도 종종 놀러간 일이 있다.

지금까지는 나는 소원의 작업을 눈여겨 보아왔다. 그것은 부단히 노력하는 그의 자세와 작품들이 내 눈을 끌었기 때문이며, 앞날에 기대를 걸게 했다. 그의 작품은 여성다운 섬세함 보다는 남성적 필치를 보여준다."

운보는 문은희가 신수회에 참여하는 여류화가의 대모로, 후배들을 이끄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예술적인 면에서도 문은희가 새로운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부지런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은희의 예술이 완성도가 높아지고 원숙해지리라고 확신한다. 그러한 기대는 80년대 후반 문은희의 수묵누드에 대한 평가에서 분명해진다.

대학시절을 함께 한 친구들 이야기

홍익대 여류동문들
 홍익대 여류동문들
ⓒ 문은희

관련사진보기


문은희의 미대 시절 함께 한 대표적인 여자 친구가 천병옥(건축), 박영희(조소), 맹명옥(서양화), 송경(서양화), 김윤신(조각)이다. 천병옥은 이화여대, 고려대 건축과 강사를 역임하고 한국건축가협회 여성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녀는 여류건축가로 성공했다. 박영희는 결혼으로 작품 활동을 많이 못했지만, 1977년 박영희 조각전을 열었다. 2015년에는 회고전을 열어 자신의 조각인생을 정리했다.

맹명옥은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후학을 가르치는데 몰두했다. 송경은 천주교에 귀의해 종교화를 그렸다. 1997년 가톨릭미술상을 수상하는 등 가톨릭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조소를 전공한 김윤신은 목공예 분야에서 두드러진 실력을 발휘했다. 상명대 조소과 교수를 거쳐 1983년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나무조각에 생명과 영혼을 부여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1959년 미대 동양화를 함께 졸업한 사람으로는 박원서(朴元緖)와 유지원(柳智元)이 있다. 박원서는 운보 김기창의 제자로 문은희와 함께 신수회에 참여했다. 1983년 4월 운보 김기창 고희기념전에 문하생으로 작품을 내기도 했다. 유지원은 천경자 선생의 애제자다. 그는 채색화조도(彩色花鳥圖)에 독자적 경지를 개척한 작가로 유명해졌다. 세필(細筆)을 이용해 구도를 잡고 거기에 채색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

당인리 발전소 굴뚝 연기를 열 번은 고쳐 그렸다

졸업작품 당인리발전소
 졸업작품 당인리발전소
ⓒ 문은희

관련사진보기


1958년 여름 문은희는 졸업 작품을 그리게 된다. 홍대에서 한강변으로 보이는 당인리발전소가 그녀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었다. 화제를 보면 '唐仁里發電所 前景 西紀 一九五八年-夏日 文銀姬 寫'로 되어 있다. 1958년 여름날 당인리발전소 전경을 문은희가 그렸다는 뜻이다. 당인리발전소는 1930년에 건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다.

1956년부터 3호기가 가동되었고, 수도권에 전기를 공급했다. 그러므로 70년대까지 산업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950년대 중후반 대학을 다닌 문은희는 늘상 발전소를 관찰해 왔다. 그리고 산업적인 주제를 동양화 기법으로 그려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전통적인 산수화풍을 벗어난 새로운 시도였다. 당인리발전소를 전경, 한강을 중경, 영등포를 후경으로 넣은 수묵 산업화(産業畵)다.

발전소 굴뚝 클로즈업
 발전소 굴뚝 클로즈업
ⓒ 문은희

관련사진보기


당시 당인리발전소는 3개의 굴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3호기까지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두 개의 굴뚝에서만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정적인 그림에서 움직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것이 굴뚝의 연기다. 그래서 연기의 움직임을 열 번은 고쳐 그렸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우리의 시선은 굴뚝의 연기로 향한다.

미세하지만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림의 오른쪽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다. 강 건너 영등포 쪽에는 두 개의 산줄기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이 양천의 우장산과 봉제산, 왼쪽이 관악산으로 보인다. 좀 더 가까운 우장산과 봉제산 앞으로는 나무를 그려 넣었다. 상대적으로 더 먼 관악산은 실루엣으로 표현했다. 문은희는 당인리발전소를 중심으로 50년대 후반 마포와 영등포 그리고 한강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전시회를 찾아 축해해 준 문무홍의 필적
 전시회를 찾아 축해해 준 문무홍의 필적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문은희는 이 그림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1992년 프랑스 파리 전시를 하는데 도움을 준 당시 대통령 공보비서관 문무홍(文武烘)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불어불문학을 전공해서 파리의 한국문화원 전시를 성사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을 역임하고,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개성공단 관리위원장을 지냈다.


태그:#홍대 미대 동양화과,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 #천경자, #당인리발전소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