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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바꾸라고요? 또? 어머니가 다 알아서 하세요. 저는 손 떼고 돈만 댈게요. 제가 왜 이래야 하죠?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애초부터 효자는 아니었지만, 불효막심할 정도로 못된 아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어코 어머니에게 폭발하고 말았다. 지난 4월 초순이었다. 새 집을 짓는다고 수 없이 설계도면을 그렸고, 또 수정에 수정을 가하곤 했는데 어머니의 벽을 넘기가 정말 힘들었다.

집을 부지 위에 전체적으로 어떻게 배치할 거며, 방과 거실 주방은 어떤 크기로 할 것인가 등을 두고 최초로 가족회의가 열린 것은 2016년 추석 때였다. 추석을 겸해 모인 자리에서 점심 식사 후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려가며 개괄 브리핑을 했다.
동쪽에서 바라 본 새 집. 축대를 시공에 임박해서 조성하는 바람에 안전할까 신경이 적잖게 쓰였다.
 동쪽에서 바라 본 새 집. 축대를 시공에 임박해서 조성하는 바람에 안전할까 신경이 적잖게 쓰였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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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초 이미 집을 한번 지어본 터여서, 집짓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그때 생전 태어나 가장 큰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은 바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집짓는 걸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80세가 넘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심스레, "솔직히 말하면 아파트에서는 살기 싫다. 더 늙어서 도회로 가더라도 한 10년만이라도 시골에서 살고 싶구나"라고 얘기하는 거였다. 큰 아들 고생시키기 미안하지만, 자신들의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는 거였다.

"음~, 집을 한 번 더 지어야겠군." 내 딴에는 속으로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올해 설 때는 물론, SNS 등을 통해 수없이 설계도면을 춘천의 동생 집에 머무르는 부모님들에게 전달해 보여 드렸다.

"아들, 가능하면 정방형에 가깝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거실을 중심으로 방들과 주방을 배치하면 좋을 듯 한데." "오빠~, 그래도 지금 오빠네 집처럼 방이나 거실 주방 등이 전부 남향이면 좋겠어, 남향이 경험해 보니 확실히 좋더라고." 수정된 설계도면을 공개할 때마다 식구들 의견은 분분했다.
목조로 짓고 있는 새 집의 내부. 벽 두께가 얇아서 시멘트로 지을 때보다 가용면적이 더 나오는 편이다.
 목조로 짓고 있는 새 집의 내부. 벽 두께가 얇아서 시멘트로 지을 때보다 가용면적이 더 나오는 편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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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의 동생과 매제, 그리고 아버지 의견을 최대한 반영했다. 아니 반영하고 조화를 이뤄내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매번 퇴짜를 놓은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큰 아들 기분 상할까봐 누구보다 완곡하게 자신을 의견을 표명했다. "애비! 생각해봐, 세탁기를 주방에 놓는 것까지는 좋지만, 세탁물 투입구는 실외 쪽으로 빼는 게 낫지 않겠어?"

어머니는 보기에 따라서 기상천외하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정말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기하곤 했다. 과거 미국에 10년 넘게 체류한 탓에 나야 그네들의 실내 구조에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지만, 미국생활 다운 미국생활을 하지 않았음에도 어머니의 아이디어 가운데는 미국의 집 구조의 디테일을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의 아이디어는 참신하기도 했지만 우리네 실정에서는 황당한 것들도 적지 않았다. "제일 서쪽 끝 방 있잖아, 거기에서 바로 밖으로 나가는 문을 다는 건 어때?" "아~, 어머니 의견 얘기는 돼요. 하지만 거기다 문 달면 단열은 둘째 치고 그 공간에 작은 서랍장 하나도 놓을 수 없잖아요. 물론 그쪽으론 침대 붙이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쉴 새 없이 어머니는 이런 저런 생각을 털어놓고 설계에 반영할 것을 주문했다. 평소 밤 시간에 자리에 누우면 집 짓는 게 아니라도 오만 가지 생각이 많은 어머니였는데, 집을 짓는다니 어머니한테는 그만한 '생각의 호재'가 없었던 것이다.

제 입으로 자기 어머니 얘기하기가 뭐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세상에서 보기 드물게 쿨한 성격을 가졌다. 시원시원하고 사사로운 구석이 거의 없는 분이다. 하지만 타고난 괴짜여서, 옛날 그 춥던 겨울에도 소녀 시절부터 속치마를 입지 않고 지내는 바람에 외할머니한테 꾸지람을 엄청나게 들었던 그런 유형이다.
2009년 초에 기술자를 고용한 뒤 그와 함께 내손으로 지은 첫집. 마당 사이에 1.5미터 높이의 축대가 쌓아져 있다.
 2009년 초에 기술자를 고용한 뒤 그와 함께 내손으로 지은 첫집. 마당 사이에 1.5미터 높이의 축대가 쌓아져 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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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괴짜 취향을 일일이 열거 하려면 밤을 새워도 부족하다. 환갑 넘어 번지 점프를 하게 해달라고 말씀하셔서 애 먹은 적도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어머니의 '이상' 취향이 가장 두드러진 건 건축과 토목 분야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시골 사실 때 불시에 방문하면 어머니의 손에는 보통 곡괭이와 망치 삽자루 같은 게 들려 있었다. 반대로 아버지는 가위 낫 호미 같은 소연장을 쥐고 있을 때가 많았다. 의심의 여지 없이 작물을 심으려고 쇠스랑으로 밭을 파는 일은 거의 항상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는 50~60년 전 처녀시절 당시 동네 초가집들을 고치는 데도 마을 어르신들에게 조언(사실은 지적)을 해 받아들여지곤 했다고 한다. 춘천의 동생 집은 10여 채 이상이 모인 전원주택 단지인데, 어머니는 동생 집에 체류하는 동안 물 만난 고기처럼 굴삭기가 부지를 정리하고, 빌더들이 전원주택 짓는 걸 즐겨보곤 했다.

2009년 초 첫 집을 지을 때, 기초에도 줄기초, 점기초, 통기초 등이 있다는 걸 어머니를 통해 사실 처음 알았다. 어머니는 건축 토목 용어는 몰랐지만, 어디 바람 쐬러 가서 고찰 등을 살펴볼 때도 기초를 유심히 보곤 했던 모양이다. 요컨대, 처녀 시절부터 건축과 토목은 어머니의 일관된 취미이자 최대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호박과 정원수 사이로 보이는 축대의 돌들. 작은 것은 20~30kg, 큰 것은 100kg이 넘는 것도 있는데 노모가 직접 쌓은 것들이다.
 호박과 정원수 사이로 보이는 축대의 돌들. 작은 것은 20~30kg, 큰 것은 100kg이 넘는 것도 있는데 노모가 직접 쌓은 것들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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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 굴삭기 한 대 사주면, 집 다부수고 새로 지으셨을 거야." 남들은 농담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형제들끼리는 가끔 이런 얘기도 한다. 실제로 어머니는 2009년 지은 나의 첫 집을 집 본체만 빼놓고 거의 다 개조하다시피 했다.

무겁기로는 100kg이 넘는 돌들을 지렛대를 이용해 이동시켜 놓는 등 높이 1.5미터 길이 15미터 정도 되는 축대도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쌓아 놓았다. 어디 그뿐인가? 당시 집짓기 위해 사들인 부지 한 구석에 30평가량 됐던 축사의 기초 바닥터가 있었는데 소형 해머로 달포에 걸쳐 다 깨부숴 흙이 드러나도록 복원시켜 놓기도 했다.

올 들어 새집을 지으면서 착공은커녕 설계 국면에서부터 어머니에게 지쳐버린 건, 그러니 우리 식구들 눈으로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는 뜻이다. 결국 크게 설계도면을 10여 차례이상 뜯어 고쳤음에도, 더구나 "어머니 됐죠, 이게 마지막이에요"하고 어머니로부터 오케이를 받은 설계도면임에도 자고 나면 이튿날 다시 "애비, 이것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봐"하고 뒤틀어버리는데 내가 터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까지 사태 수습에 나서야 했고, 어머니는 매번 그랬듯이 "이 늙은이가 정말 미안하다, 미안해, 애비. 집 짓는 거 아니라도 애비가 해야 하는 집안 일들이 한 짐인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선에서 대략 설계가 마무리 지어졌다.

과거 첫 집을 지을 때는 너무도 시간이 촉박했고, 아이 엄마의 지인이 시공 기술자로 영입된 까닭에 식구들은 설계에 관여하지 않았었다. 대신 시공 기술자 분을 대하기가 너무도 조심스러워서 식구들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기 일쑤였는데, 그 바람에 거의 매번 그 분의 의견에 끌려가고 말았다. 당시에는 나 또한 집짓기가 첫 경험인데다 건축지식도 전무하다시피 해서 내 생각을 관철할 생각도 못했다. 헌데 10년 가까이 살고 보니, 당시 내 생각이 옳았던 게 훨씬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올해 두 번째로 집을 짓기에 앞서 설계 도면을 움켜쥐고 스스로, "이번만은 시공책임자에게 내 생각을 꼭 제대로 분명하게 전달해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던 건 당시 경험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4월에 설계도면을 확정짓고, 그간 전화나 SNS로만 연락해 왔던 시공책임자를 만나게 됐다.

책임자의 첫 인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건축 시공 쪽에서 오랜 기간 종사해 온 사람의 바로 그것이었다. 속으로 "건축 일 하는 사람은 고집이 세다"는데 생각하며, 책임자와 어떻게 조화를 이뤄나갈지, 더구나 공사 단가를 낮게 책정했는데, 일이 계획대로 풀려갈지 한편으로 걱정반 우려반의 심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만, 집짓는데 설계 비중이 반도 넘는다는 점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서 한편으로 안도와 향후 일정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설계 잘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하거나, 시공과정에서 시공팀 등과 얼굴을 붉힐 소지도 크다. 게다가 자칫 돈은 돈대로 예상보다 더 깨지는 일이 생겨, 집짓기가 끔찍한 기억이자 상흔으로 남을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 시골 이야기 코너에도 올렸습니다.



태그:#전원주택, #건축, #설계, #시공, #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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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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