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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사명대사 생가 (기념관과 사당은 생가의 뒤와 옆에 있다.)
 밀양 사명대사 생가 (기념관과 사당은 생가의 뒤와 옆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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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생가,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
직지사,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
월정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건봉사, 강원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경내 사명대사 기념관
대전사, 경북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442-1
동화사, 대구 동구 도학동 35
해인사,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표충비,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3
표충사, 사명대사 유물관,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
사명대사 기념관,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06

사명대사 관련 주요 유적지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면 대략 위와 같다. 언급이 생략된 곳 중에는 금강산 유점사와 묘향산 보현사가 대표적 답사 대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두 사찰은 통일이 된 뒤라야 찾아볼 수 있는 곳들이니 이 글에 언급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16세 소년 임응규가 머리를 깎고 처음 승려가 된 사찰, 김천 직지사
 16세 소년 임응규가 머리를 깎고 처음 승려가 된 사찰, 김천 직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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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는 16세 소년 임응규가 처음으로 승려가 된 절이고, 월정사는 대사가 오랜 기간 수도 생활을 한 곳이다. 건봉사는 임진왜란을 맞아 대사가 승병을 일으켜 창의한 곳이고, 대전사와 동화사는 승병을 훈련시킨 곳이다. 해인사는 대사가 이승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곳이며, 표충사는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를 모시는 사당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사명대사에 대해 소상하게 소개해주는 최고의 답사지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06에 있는 '사명대사 기념관'이다. 사명대사 기념관이 고라리에 건립된 이유는 마을 안에 대사의 생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건봉사 경내에도 또 다른 '사명대사 기념관'이 있다.

사명대사 기념관은 건봉사와 밀양에 두 곳

생가와 7km가량 떨어진 무안면 면사무소 뒤쪽의 표충비도 서산대사의 행적,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승병 활동을 한 사실, 가등청정과 회담 내용, 일본에 가서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귀환시킨 사실 등이 새겨져 있어 훌륭한 읽을거리로 추천할 만하다. 다만 한문이고, 비바람에 시달린 빗돌의 글이라 읽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

 '땀 흘리는 비'로 유명한 표충비
 '땀 흘리는 비'로 유명한 표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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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비는 1738년(영조 14) 남붕선사가 세웠다. 선사는 이때 표충비 앞에 향나무도 함께 심었다. 그 향나무는 세월이 흘러 경상남도 기념물 119호로 지정되었다.

'땀 흘리는 비석'으로 유명한 표충비

물론 표충비도 지정 문화재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호인 표충비는 좌대를 포함한 총 높이가 380cm나 되고, 비신 자체의 높이가 275cm, 너비가 98cm, 두께가 56cm인 거대 비석이다. 이 비석은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치거나 전쟁이 일어날 징조가 보일 때면 빗돌 앞면에 땀을 흘려 '땀 흘리는 표충비'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비석은 정면에 '有明(유명)朝鮮國(조선국)密陽(밀양)表忠祠(표충사)松雲大師(송운대사)靈堂(영당)비명(碑銘)병서(幷序)', 뒷면과 옆면에 '서산대사 비명'과 '표충사 사적기'가 새겨져 있다.

 표충사(表忠寺, 절 이름) 경내의 표충사(表忠祠, 사당)와 사명대사 유물관(사진에서 오른쪽 큰 건물)
 표충사(表忠寺, 절 이름) 경내의 표충사(表忠祠, 사당)와 사명대사 유물관(사진에서 오른쪽 큰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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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생가와 기념관에 이어 표충비를 둘러보았으니 이제 표충사 두 곳을 방문해야 한다. 한 곳은 사찰 표충사(表忠寺)이고, 다른 한 곳은 사당 표충사(表忠祠)이다. 표충사(表忠祠)는 표충사(表忠寺) 경내에 있다. 절에 표충사라는 사찰명이 붙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애국 충절을 기려 1839년(헌종 5) 국가에서 절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절 안에 유교식 제향 시설인 사당을 두었다

표충사는 원효대사가 654년(무열왕 1)에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죽림사였다. 1286년(고려 충렬왕 12)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이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이곳에서 불법을 일으킨다. 하지만 일연 스님의 노력도 보람 없이 1926년 들어 큰 화재가 일어나 응진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불에 타서 사라진다. 지금 보는 절집들은 모두 그 후에 재건한 것들이다.

표충사에는 국보 75호인 청동함은향완과 보물 467호인 삼층 석탑이 있고, 표충서원 · 대광전 등의 지방 문화재와 25동의 건물, 사명대사의 유물 300여 점도 있다. 유물관이 별도로 건립되어 있어 답사자를 기쁘게 해주기도 한다.

 사명대사 생가 뒤의 사당
 사명대사 생가 뒤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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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泗溟大師, 1544~1610)의 속명은 임응규(任應奎)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아버지 임수성과 어머니 달성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이환(離幻)이고, 호에는 널리 알려진 사명당(四溟堂) 외에 송운(松雲)도 있다. 경남 밀양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생가 가까이에는 기념관도 건립되어 있다.

대사는 나이 15세인 1558년에 어머니가, 16세인 1559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경북 김천 직지사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 직지사 누리집은 '사명대사가 본사(직지사)에 출가(스님이 됨)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된 것은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불교를 배척함)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사찰의 기운)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된 사명대사는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구국제민(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려냄)의 선봉에서 큰 공을 세웠다. 사명대사의 구국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 8대 가람(절)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300여 소속 사암(절과 암자)을 거느리게 되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반역죄로 추궁하는 선조

그 후 사명대사는 묘향산 보현사로 휴정(休靜, 서산대사)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된다. 대사의 이력 중 특이한 것은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강릉부의 옥에 갇힌 일이다. 이때 강릉 지역 선비들이 대사의 무죄를 강력히 주장하여 풀려난다.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금강산 건봉사.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금강산 건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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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을 맞이하는 것은 금강산 건봉사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중이다. 대사는 당시 유점사에 머물러 있었는데,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스승에게 달려간다.

건봉사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곳

대사는 1593년 1월의 평양성 탈환 전투 때 승병 2000명을 이끌고 직접 참전한다. 그해 3월에는 서울 근교 삼각산 노원평 전투와 우관동 전투에서도 공을 세운다.

 청송 주왕산 대전사, 사명대사가 승병을 조련했던 곳이다.
 청송 주왕산 대전사, 사명대사가 승병을 조련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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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동화사 봉서루 뒷면 벽에 '영남치영아문' 현판이 걸려 있다. 영남치영아문은 영남 지역 승병 본부 출입문이라는 뜻이다. 유리에 비친 건물은 동화사 대웅전이다.
 대구 동화사 봉서루 뒷면 벽에 '영남치영아문' 현판이 걸려 있다. 영남치영아문은 영남 지역 승병 본부 출입문이라는 뜻이다. 유리에 비친 건물은 동화사 대웅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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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는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과 회담을 가진다. 1차 회담은 1594년 4월 13일~16일 (울산)서생포 일본 본진에서 열린다.

일본은 명나라 공주를 일본 왕의 후궁으로 보낼 것, 조선 4도(경상, 전라, 충청, 경기)를 일본에 양도할 것, 조선의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서 살게 할 것, 조선의 대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요구한다. 대사는 일본의 요구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파하여 가등청정의 말문을 막는다.

사명대사와 가등청정의 회담 장소, 서생포 왜성

2차 회담은 1594년 7월 12일~16일, 3차 회담은 1594년 12월 23일, 4차 회담은 1597년 3월 18일에 열린다. 이때도 대사는 조선 측 회담 대표로 참석하여 적들의 주장을 꺾는다.

 가등청정은 서생포 왜성(사진)과 도산성(울산왜성, 현 울산 중구 학성공원)에 번갈아가며 머물렀다. 가등청정과 사명대사가 회담을 벌인 곳은 서생포왜성이다. 서생포왜성은 성벽이 비스듬하고 성내의 길이 날카로운 각도로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일본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가등청정은 서생포 왜성(사진)과 도산성(울산왜성, 현 울산 중구 학성공원)에 번갈아가며 머물렀다. 가등청정과 사명대사가 회담을 벌인 곳은 서생포왜성이다. 서생포왜성은 성벽이 비스듬하고 성내의 길이 날카로운 각도로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일본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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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는 2차 회담 이후 선조에게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린다. 토적보민사소는 적을 토벌하고 백성을 보살필 방안이라는 뜻이다. 대사는 모든 국민을 총동원하여 빈틈없는 작전을 펼쳐야 적을 격퇴할 수 있으며, 잘 타일러 적을 돌려보내고 나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농업을 장려해야 하며, 백성들도 전투력을 키우고 나아가 전쟁에 필요한 무기들을 준비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다.

선조에게 나라를 구할 방안을 제시하는 사명대사

대사는 이듬해인 1595년(선조 28)에도 상소를 올린다. 「을미상소(乙未上疏)」라는 이름의 건의문에서 대사는 백성들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목민관(훌륭한 행정을 펼치는 지방 수령)을 배치할 것, 일시적으로 강화가 되었다고 해서 나라가 영원히 유지된다는 망각에 빠지면 안 되며 국가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만반의 대책을 강구할 것,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말고 인물 본위로 인재를 등용하되 본인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적임 직책을 부여할 것, 국가 기강을 쇄신하고 문란한 기풍을 뿌리 뽑을 것, 승려도 일반 백성과 동일한 처우를 하여 국가 수비의 일익을 담당하게 할 것, 산성을 수축하고 산성마다 군량 · 마초 · 방어 무기를 준비할 것 등을 제시한다.

 동해를 굽어보고 있는 서생포 왜성
 동해를 굽어보고 있는 서생포 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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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는 「을미상소」에서 본인이 주장한 바 그대로 산성 수축에 깊은 관심을 보여 직접 성 쌓기 공사에 참여한다. 대사가 승병들과 함께 수축한 산성은 대구 팔공산성, 경북 구미 금오산성, 가야산 용기산성, 경남 합천 악견산성, 경북 고령 미숭산성, 경주 부산성 및 남한산성 등이 있다.

주장한 바를 실천하는 사명대사

대사는 무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근처 야로에서 활촉 등을 만들기도 한다. 경남 의령에 주둔하던 1594년(선조 27)에는 각 사찰의 논밭에 봄보리 심기와 산성 주변 개간하기를 장려하여 군량미 4000석을 비축한다.

 사명대사가 월정사를 중수할 때 머물렀던 오대산 사고 뒤 영감사
 사명대사가 월정사를 중수할 때 머물렀던 오대산 사고 뒤 영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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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선조 37) 2월 스승 서산대사가 입적한다. 슬픈 소식을 듣고 묘향산으로 달려가던 중에 대사는 선조의 부름을 받는다.

선조는 대사에게 일본 사신으로 가 달라고 부탁한다. 대사는 여덟 달 동안 노력한 끝에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한다. 대사는 10월이 되어서야 스승의 영전에 나아가 절을 올린다.

사명대사가 세상을 떠난 곳, 해인사

대사는 그 후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에 들어간다. 1610년 8월 26일, 마침내 영면한다.

 사명대사가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해인사
 사명대사가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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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