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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극성스러운 아이를 본 적이 없다. 좋게 말해 그 애는 명랑했고, 당시 감정을 섞어 이야기하자면 아주 산만하고 까불까불했다. 그런데 용케 수업시간에는 태도가 의젓해서 선생님의 지적을 받지는 않았다.

그 애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반 반장이었다. 당시 나는 아직 친구를 사귀는 데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조용한 아이였다.

학교 앞엔 세 갈래 길이 나 있었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집에 가는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반장이 있었다.

학교에서 그 애와 나는 말을 거의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곤 나는 내 자리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신기하게도, 항상 그 애를 마주쳤다. 친구와 함께 있거나 혼자 있거나 상관없이 그 애는 어디선가 나타나 양쪽으로 묶은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도망갔다. 마치 귀 주변을 앵앵거리는 모기처럼, 도망갔다가 다가오기를 반복하며 나를 괴롭혔다. 신발주머니를 휘두르며 그 애를 물리치려 했지만 그 애 발과 손이 훨씬 빨랐다. 나는 날마다 울면서 집에 갔다. 어느 날, 왜 그렇게 울고 다니느냐며 엄마에게 혼이 난 뒤로, 눈물 자국이 없어질 때까지 집 앞에 서 있기도 했다.

잔치국수와 깍두기
 잔치국수와 깍두기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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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마철,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오후가 되니 그쳤다. 대문 밖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애였다. 그 애의 등장은 뜻밖이었다. 얼떨떨한 나를 대신해 엄마가 그 친구를 맞았다. 마침 오전 교대근무를 마치고 집에 온 아빠와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엄마는 편하게 먹으라며 작은 방에다 특별히 상을 따로 차려줬다. 상에는 잔치국수 두 그릇과 깍두기가 올라가 있었다.

우리 집에 온 그 애는 그렇게 얌전할 수가 없었다. 잔치국수를 먹으며 그 애도 나도 말이 없었다. 한참 국수를 먹던 그 애가 깍두기를 씹었다. 깍두기에서 국물이 가늘게 쭉 뻗어 나와 내 얼굴로 튀었다. 그 애 눈이 동그래졌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며 소리 내 웃었다. 그러곤 다시 조용히 국수를 먹었다.

이날 이후로도 우린 그리 친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적도 없다. 길에서의 실랑이만큼은 학년이 바뀔 때까지 이어졌다. 나중엔 나도 울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은 이게 전부다. 별것도 아닌 이 일이 장마철만 되면 떠오른다. 누군가를 좋아할 줄도, 그런 감정이 있는 줄도 몰랐던 그때. 기대나 설렘 없이, 사랑도 미움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으로 친구를 대할 수 있었던 건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나는 점점 수줍어하지도 얌전하지도 않은, 친구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승리욕 강한 왈가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고 지칠 때면 아무 것도 몰랐던 그 시절의 기억에 기대어 잠시 쉬곤 한다. 되돌아가는 길이 있다면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다. 한참 기억에 파묻혀 있다 보면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굳이 애쓰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아무런 기대와 욕심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비 온 뒤 무지개처럼 불쑥 집 앞에 나타나 준 그 애에게 고맙다. 그 시절을 기억하고, 지금의 나를 비춰볼 수 있게 해줘서. 기억을 징검다리 삼아 나는 다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단짠단짠 그림요리, #요리에세이, #잔치국수, #깍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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