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올해로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았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오마이뉴스>가 공동기획으로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 1987 우리들의 이야기' 특별 온라인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전시회 내용 가운데, 가상 시민 인터뷰와 시대적 풍경이 기록된 사진 등을 갈무리해 독자 여러분께 전해드립니다. - 편집자 말

지하철을 운행하는 40대 초반의 기관사

1987년 8월 파업을 결의하고 거리 행진에 나선 노동자들과 이 모습을 옥상에서 바라보는 시민들
 1987년 8월 파업을 결의하고 거리 행진에 나선 노동자들과 이 모습을 옥상에서 바라보는 시민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1987년 8월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버스 운행 중단"을 선언하고 집회를 개최한 삼선 버스기사들
 1987년 8월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버스 운행 중단"을 선언하고 집회를 개최한 삼선 버스기사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1987년 8월 12일 "임금 인상"과 "사원 복지" 개선 요구 사항을 벽에 적어 놓고 파업을 진행 중인 한진교통노동조합
 1987년 8월 12일 "임금 인상"과 "사원 복지" 개선 요구 사항을 벽에 적어 놓고 파업을 진행 중인 한진교통노동조합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나는 기관사예요. 지하철의 맨 앞칸이 내가 일하는 일터죠. 벌써 13년 차 베테랑이네요.

나는 이곳 지하에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을 통해 바깥의 세상을 봐요. 6월 내내 이곳도 긴박한 나날의 연속이었어요. 최루탄을 피해 계단으로 내려오는 시민들을 보면 거리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졌어요. 지하철 두 번째 칸에 올라탄 대학생들의 얼굴은 초여름 강한 햇빛에 까맣게 그을려 있었을 거에요.

우리도 근무가 없는 날이면 거리로 나갔어요. 거리에 서면 오랫동안 쌓여있던 노동의 피곤함이 금방 사라지곤 했지요. 최루탄 냄새는 우리에게 피곤함을 허락하지 않거든요. 오로지 눈물과 콧물, 기침만 선사할 뿐이죠. 학생들과 함께 거리에 서면 여기가 내 나라고 우리가 진짜 국민이 된 것 같았어요. 우리나라니깐 우리가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거리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일터로 가져오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일 먼저 민주노조를 만들었지요. 우리가 바랬던 건 시민의 안전과 직장의 민주화였어요. 적절한 인원 증원과 안전을 위한 시간 배분, 그리고 노동에 합당한 임금인상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위협과 탄압이었죠. 아직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미완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공장 매점에서 일하는 20대 종업원

1987년 8월 "임금 인상"과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조합원들의 철야 총회 10일째 모습
 1987년 8월 "임금 인상"과 "노동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조합원들의 철야 총회 10일째 모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1987년 8월 1일 파업을 결의하며 집회를 진행 중인 울산지역 노동자들
 1987년 8월 1일 파업을 결의하며 집회를 진행 중인 울산지역 노동자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노동자 월급과 처우는 정말 형편없어요. 그러니 공장 안에 있는 우리 매점 매출도 낮고, 여기서 일하는 내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은 편이죠.

공장 구석에 위치한 우리 매점엔 팔릴만한 물건이 별로 없어요. 공장 사람들은 군것질을 하러 여기까지 올 시간도 없고, 월급이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공장 안에서는 기계가 쉬지 않고 열심히 돌아가는데, 가게 안에선 맨날 파리만 날아다니고 있었던 거죠.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파업을 시작한 지 이제 일주일쯤 됐어요. 저 사람들의 첫 번째 목소리는 "우리도 머리를 기를 수 있게 해달라"라는 거래요. "안전화를 신고 쪼인트를 까지 말라"라는 것도 있대요. 노동자들의 현실이 여기에 다 적혀 있는 것 같아요. 내 친구들한테 이런 말을 해주면 믿지도 않더라고요. 하긴 직접 보고 있던 나도 어처구니없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노동자들이 기계를 끄고 공장을 세웠어요. 사장님은 좌불안석이라는 소문이에요. 툭하면 노동자들 쪼인트나 까던 관리과장은 어딜 갔는지 얼굴도 보기 힘들어요. 소리 없는 변화가 시원한 바람을 타고 도시 전체로 퍼져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게 공장 사람들의 힘인가 봐요. 그들의 삶이 나아지면 우리 매점 매상도 좀 올라갈 수 있겠죠.

조선소에서 일하는 30대 용접 노동자

1987년 8월 24일 영정과 만장을 앞세우고 장승포 대우조선소의 영결식장으로 향하는 '고 이석규 노동자 장례' 행렬
 1987년 8월 24일 영정과 만장을 앞세우고 장승포 대우조선소의 영결식장으로 향하는 '고 이석규 노동자 장례' 행렬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1987년 8월 24일 '고 이석규 열사 민주국민장 영결식'에 모인 동료 노동자들
 1987년 8월 24일 '고 이석규 열사 민주국민장 영결식'에 모인 동료 노동자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나는 거대한 배를 만드는 조선소 노동자예요. 배를 만드는 노동은 보람찬 일이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죠.

작은 철판 하나가 머리 위로 떨어져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우리 공장은 유난히 엄해요. 모든 게 군대식이죠. 출근길 정문에선 복장과 두발 검사를 받아야만 해요. 모든 게 명령식이고, 말보다는 쪼인트가 앞서곤 하죠. 회사가 주는 점심밥에는 쥐똥이 까만 콩처럼 섞여 있을 때도 있었어요. 우리는 인간이 아닌가 봐요. 기계보다 못한 공돌이니까요.

우리가 노조를 만들기로 한 첫 번째 이유는 인간 대접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노조 설립신고서 접수조차 쉽지 않더라고요. 회사와 협상은 더 어려웠어요. 경찰은 언제나 회사 편만 들어줬고요. 툭하면 노동자만 구속됐어요. 큰 죄를 진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6월항쟁으로 민주주의가 다 된 줄 알았는데,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왕회장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최루탄이 날아들었어요. 그 와중에 이제 겨우 스물두 살 된 동생 한 명이 최루탄을 가슴에 정통으로 맞았고요. 억척스레 일만 하던 착하고 여린 녀석이 내 눈앞에서 쓰러졌어요. 두 달 전엔 대학생을 그렇게 죽이더니 이젠 우리 동생을 죽였네요.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부산에서 다녀간 변호사가 구속됐대요. '제3자 개입 금지' 조항 위반이래요. 노동자를 도와주면 불법인 게 우리나라 법이라네요.

* 사진 출처 : 박용수, 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태그:#6월 항쟁 30주년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