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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언덕에 서 있다. '폭풍의 언덕'이리라.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랑과 배신과 질투가 난무하던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과 같지 않다. 이 시대의 역경은 인간의 감정보다는 독재정치가 난무하던 70년대와 80년대의 복잡 미묘한 정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논픽션 소설에 가까운 서명숙의 신작 <영초언니>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던 가까운 선배들의 이야기이기에 결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이제 60갑자를 채운 이들의 곡진한 옛 이야기가 여전히 우리에게 쓰라린 것은 지금의 사람들 역시 또 다른 무력 앞에 나약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제주올레'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소설로서는 첫작인 영초언니
▲ 서명숙 국장의 신작 영초언니 '제주올레'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지만 소설로서는 첫작인 영초언니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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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안내자는 '제주 올레'를 만든 언론인 서명숙이다. 서문에 밝히듯 23년 몸담았던 언론계를 때려치웠으니 언론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무원도 20년이면 연금을 받는데(요즘은 10년으로 단축), 그 긴 기간 동안 기자 생활을 했으면 천생 언론인으로 부를 수밖에 없다.

작가가 거쳐 간 매체는 '기사연', '월간 경향', '시사저널', '오마이뉴스', '시사인' 등이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배알 꼴리는 기사를 쓰지 않아도 되는 매체라는 것도 그녀가 살았던 삶의 여정을 상징한다.

그 여정은 그녀가 태어났던 남녘 제주도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릴적 작가의 생각에 4·3 같은 엄중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결에서 박정희가 이기자 안도했고, 누구보다 먼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충성스런 유신의 아이였다.

그런데 작가가 꼬인 것은 1976년 3월 고려대 교육학과에 입학하고 나서다. 사투리 쓴 것을 부끄러워하던 작가는 2학기 때 고대신문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관점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평생을 따라다니는 한 남자와 소설의 주인공 영초언니도 만나게 된다.

학보사 모임에서 만난 영초언니와 작가는 뜻이 맞아 한 집에 살게 된다. 아울러 담배와 다양한 불온서적(?)으로 작가를 이끈다. 그리고 그녀들의 삶을 조율하는 것은 김상진 열사의 할복자살 사건 이후 발동한 긴급조치 9호였다. 하지만 늦게 배운 운동질에 겁을 상실한 작가는 다양한 현장에 발을 담근다.

작가 스스로도 그렇지만 평생을 좌우하던 남자 엄주웅이나 유구영 등 현장의 삶은 복잡다난했다. 이런 사건 속에서 작가는 1979년 4월 모교인 신성여고에 교생으로 내려온다. 하지만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어야 했던 경찰들에게 천영초와 서명숙 등이 같이하던 활동은 충분히 좋은 먹잇감이었다. 결국 작가는 수업 중에 체포되어 밑을 알 수 없는 구금과 심문에 시달려야 한다.

그때까지는 작가와 영초언니, 혜자언니 같은 이들이 한둥지에서 살아야 했다면 이제는 차례대로 하나하나씩 둥지 밖으로 떨어지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 작가 역시 '4141'이라는 수인번호를 달고 감옥이라는 사회를 만난다.

앞날을 예측하기 쉽지 않은 이들에게도 박정희가 시해되는 상황은 똑같이 찾아온다. 갑작스럽게 석방이 찾아왔지만 다시 만난 80년의 봄도 혼돈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시간과 관계는 흘러간다. 엄주웅과 결혼하는 등 풍파가 지난다.

작가가 그러는 사이 영초언니 역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정문화 선배와 결혼한다. 하지만 영초언니의 결혼생활도 순탄치는 않았다. 결국 영초언니는 아이와 캐나다로 떠나고, 정문화 선배는 결국 병마로 사망한다. 그리고 다가온 소식이 영초언니의 교통사고다. 캐나다에 찾아가서 만난 영초언니는 큰 사고로 인해 지능까지 잃어 그녀의 단편만을 기억한다.

소설로도 논픽션으로도 애매하지만 문학으로 분류되는 이 책은 사실상 하나의 소설이자 다큐멘터리다. 사실 두 영역의 차이는 별반 다르지 않다. 레미제라블 등 수많은 명작은 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또 언론인이 소설가로 재탄생하는 일도 특이한 일이 아니다. 이병주나 김훈은 물론이고 비슷한 매체를 거쳐갔던 정운현도 비슷한 삶의 괘적을 보이고 있다. 이제 서명숙 작가 역시 소설의 세계로 들어왔으니 좀더 흥미로운 작품으로 다시 찾아와주었으면 한다.


영초언니

서명숙 지음, 문학동네(2017)


태그:#서명숙, #영초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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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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