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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노짱도 노빠도 아니면서 웬 눈물바람?"

시릿한 눈물을 훔치며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아내는 내 손을 잡으며 가늘게 물음을 던진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눈물을 주체 못하더니 되레 나더러 청승맞다는 듯이 다그치는 모습이 머쓱해 보였지만, 영화를 보며 그렇게 눈물을 흘려보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지난 주말 다큐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나서다. 오랜 시간 밀착 취재한 것처럼 내러티브하게 편집된 휴먼다큐여서 진한 어젠다(agenda)가 함의돼 있었다. 무엇보다 이 다큐의 주인공인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인간적인 생전 모습에 많은 관객들이 가슴 아프고 울컥해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사람과 연신 눈물과 콧물을 닦는 사람,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소리 내어 엉엉 울기도 했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에 감동했거나 오래되지 않은 슬픈 역사적 사건에 감정과 슬픔이 동시에 복받친 때문일 것이다.

'인간 노무현' 그린 다큐, 눈물샘 처음부터 끝까지 자극

영화 <노무현입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
ⓒ 영화사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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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일번지인 서울 종로구에서 야당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다시 공천을 받지만 지역구인 부산으로 내려가 '동서화합'과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선거운동을 펼치는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낙선의 패배. 아쉽게도 낙선한 그를 향해 세상 사람들은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을 달아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반전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는 정치적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오로지 승리를 위해 이기적이며 온갖 추잡한 모습을 보여주던 여느 정치인들과는 달리 인간적인데다 오로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고뇌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돼 가는 모습을 영화는 잘 담아냈다.

더욱이 그를 사랑하는 거대한 조직,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든든한 선거운동의 구원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반전은 매력과 감동을 더하게 한다. 시종일관 선거유세에서 "제게 맡겨주십시오. 제게 힘을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인간 노무현.

그러면서도 "동서화합, 지역주의 타파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만들겠습니다"를 소리쳐 주장하는 일관된 모습에서 그는 타고난, 준비된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더해준다. 더욱 진정성이 엿보인 대목은 주류 보수언론사들의 고질적 선거 프레임에 일갈한 유세 대목이다. 당내 경선 분위기가 고조되고 경쟁이 날로 치열해 갈 무렵, 보수언론들의 색깔 프레임에 맞서 "저는 언론은 권력으로써 어떻게 흔들 생각도 없지만 그러나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습니다"라고 유세장에서 잘라 말한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 박수와 감동

영화 <노무현입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
ⓒ 영화사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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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전에서 노무현 당시 대선후보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라고 용기 있는 선언을 하자 많은 박수를 받는다. 물론 이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이 감동한다. 이로부터 대통령 당선 이후 임기 내내 주류 보수언론들과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지만 그의 용기와 솔직함 때문에 선거판에서 그의 지지기반은 더욱 확고하고 두터워졌다.

선거전에서 때로는 우회전술보다 인간적인 내면을 숨김없이 진솔하게 드러낸 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 더 약효가 클 수 있음을 이 영화는 잘 전달해 주었다.

"제 장인은 좌익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제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이런 아내는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단 것입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서 심판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유세는 두고두고 명장면이자 명연설로 남는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어록 중 많은 사람들을 울리게 한 대목일 것이다. 특히 여성들, 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을 둔 여성들이라면 이 연설 앞에서 어찌 눈물을 참을 수 있겠는가? 영화의 중간 대목에서 흘러나온 이 외마디 연설이 더욱 더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허구나 팩션(faction : 사실을 의미하는 fact와 픽션을 뜻하는 fiction이 합해진 말로,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의 일대기에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 아닌 사실을 다룬 다큐영화가 이렇게 감동을 전달해 줄 줄이야. 새삼 지난 '2017 전주국제영화제 프로젝트 선정작'으로 선을 보인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다시 만나니 감동이 더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도 한 달 전 보았던 영화 '특별시민'이 자꾸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치적 상황을 그린 두 영화가 던지는 어젠다의 공통점과 상이한 점들이 문득 서로 한 공간에서 이미지를 형성하듯 대비됐기 때문이다. 선거판에서 벌어지는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을 너무도 잘 꿰뚫어 준 영화들이었기에 '공공의 선'과 '공공의 악'으로 대별되는 두 영화의 메시지가 더욱 비교의 본능을 자극했다.

'특별시민'과 '노무현입니다' 미장센, 어젠다의 차이점?

물론 한 달여의 시간차를 두고 두 영화를 관람했기 때문에 느낌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영화를 차분히 비교하면 과거 이명박 정권 출범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그리고 박근혜 정권의 출범과 탄핵에 이르기까지 우리사회에 누적된 적폐현상들, 그런 과정에서 시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고 부르짖었던 구호와 바람들, 이러한 바람에 부응하기라도 한 듯 문재인 정권 출범과 함께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정치현상의 정상적 복귀까지 마치 한 판의 바둑판을 복기하듯 모든 실제 상황과 사건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두 영화의 공통점이 '민주주의 꽃'이라고 부르는 선거상황을 주된 배경으로 다뤘다는 점이다. 승리를 향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는 선거판에서 각 후보들 간의 불꽃 튀는 경쟁레이스를 두 영화 모두 냉혹하리만큼 실감나게 녹여 담았다.

또한 두 영화의 미장센(무대에 오른 등장인물의 배치나 동작, 무대 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설계)이 주로 선거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나는 실제 인물을, 다른 하나는 허구의 인물을 소재로 다루고 있음에도 강한 권력의지(권력욕)를 바탕으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치열한 선거과정을 잘 담아냈다.

필승의 신념에 가득 찬 후보, 그리고 오로지 후보의 승리를 향해 불철주야 온갖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매진하는 선거캠프의 활동모습을 클로즈업한 형태도 흥미를 더하게 하는 공통점이다.

그럼에도 두 영화의 다른 점이 더 많다. 가장 큰 차이점은 허구와 실제를 주제로 했다는 점이다. '특별시민'은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처럼 꾸며서 만든 허구의 영화이고 '노무현입니다'는 실제를 다룬 다큐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실제를 주제로 한 다큐라는 점에서 때론 딱딱하고 지루하거나 별다른 반전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오래된 편견과는 달리 다큐 '노무현입니다'는 이 같은 편견과 관념을 뛰어 넘었다. 솔직한 인간미와 정치에 대한 진정성이 거듭되는 반전효과를 더했다. 더욱이 우여곡절 끝에 16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취임식을 마치고 청와대로 향하는 길이 장례식 장면으로 바뀌면서 가장 극적인 반전효과를 거두었다. 이 때 많은 관객들이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꼈다.

'의사사건' 암묵적 메시지로 전달하는 '특별시민'

비록 선거판을 주된 미장센으로 다룬 두 영화이지만 이를 구별하지 않고 현실에 그대로 두 소재 모두를 반영한다고 가정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먼저 허구를 소재로 한 영화 '특별시민'을 다시 들여다보자. 끔찍하리만치 현실을 흉내 냈지만, 상상하기 힘든 공포와 재앙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란 어젠다를 던져주었다.

이 영화는 현실의 정치상황에서 자주 등장하는 의사사건(pseudo-event)의 암묵적 메시지를 초반부터 강하게 전해준다. 의사사건이란 정치인 또는 공인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더 좋은 쪽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자신에 관한 새로운 뉴스나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 내는 인위적 사건 또는 그릇된 정보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의사사건은 진짜사건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어지고 진짜사건보다 더 잘 전달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최근 선거과정에서 자주 유포되는 가짜뉴스와 맥락을 같이 한다.

영화 '특별시민'은 수많은 대사들에서 의사사건의 위력을 부각시킨다. "선거는 전쟁, 정치는 쇼", "선거는 진흙탕에서 진주를 캐내는 거야",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어라", "과정이 어떻든 프로는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등 3선의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후보와 선거캠프에서 그 후보를 돕는 핵심참모들 간의 대사가 무엇을 전하려는지 잘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서울시장 변종구(최민식씨 연기)라는 인물은 최고 권력을 지향하며 이미지 관리, 의사사건에 능숙한 철저한 정치 9단이다. 그가 승승가도를 구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의사사건에 근거한 이미지 정치가 먹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현실정치의 나쁜 점들만을 끔찍하게 들춰냈는지 영화를 보는 내내 소름끼치게 할 정도다.

게다가 그의 선거운동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돕는 선거대책본부장 심혁수(곽도원씨 연기)는 정치공작의 일인자로 손색이 없다. 끊임없이 가짜사건을 만들어 유권자들을 속이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변수들이 등장하면서 위기와 반전이 거듭된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마침내 '선거는 전쟁, 정치는 쇼'라는 어젠다를 진하게 남긴 채 끝난다. 찜찜한 구석이 많지만 현실정치와 많이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 영화다. 너무 정치적이고 비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한 영화라는 점에서 현실에 그대로 투영될 경우 부작용이 훨씬 많을 것이란 우려도 만만치 않았던 영화다.

'바보 노무현' 휴먼다큐, 감동과 슬픔 동시에 전달해 주는 이유?

그 후 한 달 만에 등장한 영화 '노무현입니다'는 이러한 비인간적이며 의사사건에 능한 정치현실을 정면으로 거부한 휴먼다큐라는 점에서 더욱 대별시켜 준다. '동서화합'과 '지역주의 타파'를 선거기간 내내 진정성 있게 외치면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 언론에 비굴하지 않겠다"던 인간 노무현.

그러나 인간 노무현, 아니 바보 노무현은 끝내 언론과 권력의 칼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의 유언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퉁퉁 부은 눈가에 눈물이 마르지 않던 문재인 현 대통령의 목소리가 관객들의 눈물샘을 더욱 자극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지지율 2%의 꼴찌 대선후보에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해 대선후보 1위로 오르더니 급기야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기까지 2002년 대선정국을 뒤흔들었던 정치인 노무현. 모처럼 정치에 대한 진한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며 죽음의 길을 재촉한 바보 노무현의 인간적인 드라마를 그대로 재현한 다큐가 '특별시민'과 다른 감동을 주는 특별한 이유다.


태그:#노무현입니다, #특별시민, #어젠다, #선거, #의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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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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