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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역 택시기사들은 대개 '인천관동갤러리'를 모른다. 설치된 네비게이션이 다소 오래된 것이면 주소를 입력해도 검색조차 안 된다. 2015년 1월에 개관했지만, 돈벌이와 상관없이 담담하게 운영하는 탓이다. 지금 전시 중인 빛바랜 사진전시도 똑 그렇다.

<80년 전 수학여행, 경성에서 하얼빈까지>는 1937년부터 1940년 무렵의 풍경과 풍속을 보여준다. 옛 사진들과 사진엽서 120여 장으로써 당시 수학여행코스를 살려낸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흙바람이 도로를 내달리는 지난 14일(일요일) 이른 오후, 전시장에 들어서니 기획자인 사진작가 류은규 씨가 직접 맞이한다.

사진작가 류은규 씨, 사진전이 열리는 인천관동갤러리에서
 사진작가 류은규 씨, 사진전이 열리는 인천관동갤러리에서
ⓒ 김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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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 시공 속으로

- 호기심에 끌려 무턱대고 왔다. 둘러보기 전에 팁을 준다면?
"지금도 수학여행이 있지만, 80년 전에도 한국과 중국에 수학여행이 있었다. 그러나 이건 중국 용정(조선자치구)의 대성중학교나 동흥중학교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라는 점에서 다르다. 지금은 북한과 중국 등으로 갈라졌지만, 그 때는 타의에 의해서 땅이 넓어졌다. 수학여행이 있을 때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로 보면 된다.

만주사변이 1931년에 있었고, 일본이 점령해 만주국을 만들면서 도시계획을 많이 했고, 남만주철도를 부설하고, 자기네들의 정책적 목적으로 알리는 부분도 있고, 이 넓은 땅에 대한 홍보를 하기 위해서라도 수행여행 코스를 만든 거다. 그 당시 용정이 중심지였고, 많은 학교가 있었지만, 그 학교들이 다 수학여행을 가는 건 아니고 대성이나 동흥 같은 명문중학교만 갔다."

- 이 수학여행 코스는 얼마나 걸리는가?
"용정에서 출발을 해서 기차를 타고 회령, 라남, 함흥을 거쳐 철원, 금강산을 구경하고 경성으로 왔다가 평양으로 해서 단동, 대련, 심양, 장춘, 하얼빈으로 돌아오는 수학여행 코스인데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고등학생은 성인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 18살이면 결혼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나이는 어리지만 지능연령이 지금 대학생 이상으로 봐야 하므로 대학교 졸업여행과 같다. 어느 정도는 정책적인 부분도 있지만, 학생들한테는 정책적인 건 관심 없으니까 자기네들을 두근두근하게 하는 마음으로 돌 수 있는 수학여행 코스로 보면 된다. 출발하기 전에 찍은 사진을 확대해 놓은 여기서부터 둘러보면 된다."

- 옛 엽서들을 보니 당시 풍경이 어땠는지 알겠다. 참 귀한 자료들이다.
"어제도 모 대학교 아무개 교수가 와서 하는 말이 여기 전시된 엽서가 80~90%는 처음 본단다. 여기 나와 있는 게 아니니까.(옛 엽서들은 류은규 씨가 20여 년 전에 수학여행 코스인 철길을 따라 다니며 모은 것이다.)

(사진을 보며) 두만강은 짧다. 두만강을 건너 회령을 넘으면 현재 김책시인 성진과 청진이다. 성진이나 청진은 한국에 공개가 안 되어 있다. 북한이었기 때문에. 다 중국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정도 배가 다니니까 그때도 발전이 되어 있다는 거다.

금강산을 거쳐 경성. 당시는 게임기나 스마트폰도 없으니까 학생들은 대화하면서 4~50km로 가는 완행열차로 왔을 거다. 서울 경성. 서울 와서 도시만 본 게 아니라 그 시기 풍속도 봤을 거라 여겨 풍속사진들을 곁들였다.

그리고 압록강. 압록강은 두만강과 달리 깊어서 큰 배가 다닐 수 있다. 그래서 큰 배가 다닐 때는 다리가 이렇게 움직이며 돌게 되어 있다."

1938년 동흥중학교 졸업 앨범의 수학여행 코스
 1938년 동흥중학교 졸업 앨범의 수학여행 코스
ⓒ 김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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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여행 인원 수는 어느 정도인가?
"(학생들이 찍힌 기념사진의 지명을 보며) 금강산, 장춘이다. (사진 속 인물들을 가리키며) 이 인원수가 갔으니까 꽤 많이 간 거다. 여기 하얼빈을 거쳐 수학여행은 끝난다. 여기에 풀어놓지 못한 자료들이 참 많다.

이건 대성중학교 재학생들의 출신지역 분포도다. 남북 만주, 연해주, 한반도 전역 등에서 고루 온 것은, 용정이 윤동주가 다닌 학교가 있어서가 아니라, 1930년대에 일본어가 아닌 우리 국어를 사용하며 역사교육을 시켰으니까 생각 있는 부모들은 다 용정으로 보낸 것이다."

- 이 사진전의 기획 의도라면?
"고등학생이라면 옛 수학여행이 이랬구나 하는 호기심으로 볼 수 있는 것이고, 나이든 분들은 그 때는 이랬지 하는 추억으로 볼 수도 있다. 옛날엔 어른들이 이렇게 살았구나 생각하며 볼 수도 있고, 옛날엔 우리 땅이 이렇게 넓었구나 하면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 온 역사학자들은 옛날에 안중근 의사가 바로 이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쐈구나 하고 역사적 추리를 했다. 직업군에 따라서도 관점이 다 다르다. 누가 보든 상관없다. 상관없다는 자체가 의도니까 의도는 없다. '30년대 그림엽서전'보다는 '80년 전 수학여행'이라고 했을 때 생각할 것이 많을 거다. 알아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한 거다.

사진은 보는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있다. 누구든 알아서 보고, 즐기고 가고, 느끼고 가면 된다. 결국 기획 의도란, 어떤 식으로 했을 때 사람들의 관심도를 높일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미술이나 사진이나 똑같은 게 본인이 살아 있으면 작품이지만, 죽으면 자료다."

나는 이 집 주인이 아니라 거쳐 가는 사람이다

- 인천관동갤러리를 와 본 사람들은 자기들도 이런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고 말한다.
"마련하기 쉽지 않다. 또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한두 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땅값 오르면 모른 척하고 간다. 투자라면 안 하는 게 낫다. 우리 부부의 생각이 틀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우리가 집 두 채를 샀으니까 부수고 다시 지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집을 재생시킨 도미이 마사노리 교수가 집에 대해 한 얘기가 있다. 벽돌콘크리트 집은 예쁘게 지을 수는 있지만 60년이 지나면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한다고. 이런 목조주택은 썩은 부분과 탄 부분은 잘라내고 나무를 이어 복원시키면 150년은 간다고. 그러나 새로 짓거나 보수하거나 가격은 똑같다고.

재생하자고 마음 먹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라고. 90년 된 집이라는 건, 집이 150년 간다는 얘기는, 나는 여기서 살다가 거쳐 가는 사람이지, 이 집 주인은 아니라는 거다. 내가 주인으로서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값 오르면 팔겠다는 것은 집이 아니고 거주공간으로서의 얘기다. 거쳐 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집을 보수하면 여기 1층처럼 살던 흔적을 남겨둘 수 있고, 보수할 때도 정성을 다할 수 있다."

- 이 집에 온 이유라면?
"우리 부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고 왔다. 자료관을 만들려고 왔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자료가 50,000장 정도인데 아파트 살면서 자료관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린 공간을 찾아서 이 동네로 왔다.

이 사진들도 20여 년 전 것인데 이제야 풀었다. 그 전에는 풀 공간이 없었다. 빌릴 수는 있지만, 잘해야 일주일이다. 그런데 여긴 내 집이니까 오래할 수 있고, 사람들과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고, 시간 없어 못 오는 사람들이 언제든 와서 볼 수 있게끔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진은 작품에서 자료로, 그리고 사료로 가치가 넘어간다. 자료에 역사성이 가미된 사료적 가치는 교과서에 들어갈 수 있고, 더 가치가 올라가면 문화재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전시를 해야 정리가 된다. 정리해서 보여주면 어제처럼 사학자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니 도와 달라 하면 사료적 가치로 남는 거다.

그래서 이 집은 첫째는 우리 자료관으로서의 관동갤러리, 둘째는 우리 지역과 어울릴 수 있는 관동갤러리다. 지역과 공유할 수 있는 거는 주민들이 이 집의 구조를 참고하는 것으로도 가능하고, 이 집을 보고 관심 갖는 외지인들로 인한 지역 활성화로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지갑을 여는 관동갤러리다. 선생으로서 오래 재직하다보면 제자들이 많이 생긴다. 선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전시할 장소를 무료로 빌려주는 건, 지갑을 자주 열어 존경받는 일과 같다."

실현 가능한 꿈을 꾸려면 자기가 변화해야 한다

- 처음부터 사진작가가 꿈이었나?
"올해로 사진 찍은 지 40년이다. 사진작가가 될 줄은 몰랐다. 어려서는 미래적인 일이라서. 사진을 찍어 돈벌이할 거는 생각했다. 학생들에게는 꿈을 가지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꿈이어야 한다. 너무 미래를 보지 말고.

사진반 활동을 하던 고등학교 때는 월간사진이나 영상잡지에 내 사진이 실리는 게 꿈이었다. 실현 가능하니까 됐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국전에 걸리는 거였고, 하니까 됐다. 사진과를 졸업하면서는 세종문화회관 전시가 해볼 만한 꿈이었다.

졸업 후 우먼센스 사진 기자가 되고, 대학원에 입학하고, 교수가 되었다. 세종문화회관 전시도 했고, 해외 전시도 여러 번 했다. 어려서부터 실현가능한 꿈을 하나하나 이루다보면 그 단계가 높아진다.

중국 가기 전에 돈을 무지 잘 벌었다. 그걸 다 버리고 중국을 간 거다. 실현 가능한 꿈을 꾸려면 자기 자신이 변화해야 한다. 실현가능하게 자기가 움직여야 한다. 가능성 있는 것부터 움직여라. 난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봤다."

- 다 해봤으니까 이제 꿈이 없다?
"이곳도 꿈을 찾아서 온 거다. 특히 한중일이 함께하는 공간이니까 인천에 온 거다. 나는 중국 연변대학교 미술학원 사진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아내는 근현대사를 공부한 일본인이다. 인천은 일본 가기도 쉽고, 차이나타운도 있고. 내 작업이 되는 공간이다.

이제는 정리해서 풀어놔야 한다. 정리 안 하면 쓰레기다. 이렇게 공간을 마련해서 정리하여 하나씩 보여주니까 찾아오는 거다. 정리 잘 해서 후손들에게 사료관이 되게끔 해서 넘겨주는 게 꿈이다." 

진짜 운수 좋은 날이다. 무뚝뚝해 보이는 류은규 씨가 유쾌하게 입담을 늘어놓을 줄이야. 덕분에 80년 전 수학여행 코스에 깃든 역사적 배경을 이해했고, 집과 꿈에 대한 그의 사이다 발언을 들으며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번 사진전과 같은 정리 작업들이 장차 순조롭게 진행되어 인천관동갤러리가 자료관에서 사료관으로, 더 나아가 문화재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인천 시민으로서 유력한 명소 후보 한군데를 확보한 기쁨이 크다.



태그:#류은규, #인천관동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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