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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던 9일 자정 직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민들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정의로운 나라, 통합의 나라,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함께 해주신 국민들의 승리입니다"라고 말한 뒤 "내일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도 섬기는 통합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1968년 미국 대통령선거 직후에도 당선자가 '통합 대통령'이 되겠노라고 선언해야 했다. 당시의 미국 대선도 이번 우리 대선처럼 격전을 방불케 했다. 미국이 극도로 분열된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4년 전인 1964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린든 베인즈 존슨(L.B.J) 후보는 역대 최대인 1595만 표차로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후보를 눌렀다. 존슨 후보는 4313만 표를, 골드워터 후보는 2718만 표를 얻었다. 1595만이란 표차는 1972년 대선에서 공화당 리처드 닉슨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존슨은 확보한 선거인 숫자에서도 골드워터를 압도했다. 선거인 486명을 확보해, 52명의 골드워터를 9배 이상 압도했다. 2012년 우리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최초인 51.6% 득표율을 기록한 것 이상으로, 존슨 후보의 1595만 표차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백악관에 들어간 존슨은 미국을 산산조각내는 실정을 범했다. 그의 집권기에 인종차별 문제는 한층 심각해졌다. 흑인해방운동가이자 196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피살된 시점도, 존슨이 집권할 때인 1968년 4월이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연회에 참석한 린든 존슨 대통령(가운데).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박정희 대통령과의 연회에 참석한 린든 존슨 대통령(가운데).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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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의 실정을 웅변하는 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베트남전쟁이다. 1968년 1월, 북베트남과 베트콩(베트남판 빨치산)의 대반격으로 미국과 남베트남은 이 전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1968년 현재, 50만 이상의 미군이 전쟁터에 갇혀 있었고 매월 1천 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다가 동맹국인 남베트남마저 미국과 제대로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1968년의 존슨 대통령은 한마디로 '죽일 놈'이었다. 미국 전역에서 존슨에 대한 혐오감이 확산되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 시위가 들끓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8년 대선 운동이 시작됐다. 2017년 대한민국이 광화문광장과 덕수궁 앞으로 갈렸듯이, 나라가 이리저리 찢겨진 상황에서 1968년 미국 대선이 시작됐던 것이다.

존슨 대통령과 민주당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는 속에서 치러진 선거운동이었다. 그래서 민주당에 불리한 대선이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LBJ(린든 존슨)가 미국을 공화당에 투표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렇게 운동장이 한쪽으로 크게 기운 상태에서, 허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여당 후보로 나섰다. 야당인 공화당에서는 리처드 닉슨이 출마했다. 만약 민주당의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이 민주당 경선 도중에 암살을 당하지 않았다면, 이 선거는 닉슨 대 케네디의 대결이 됐을 가능성이 컸다.

로버트 케네디는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다. 1960년 케네디에게 패한 경험이 있는 닉슨은, 로버트 케네디가 피살되지 않았다면 1960년에 이어 1968년에도 케네디 가문과 싸워야 하는 심리적 부담을 안았을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보다 만만한 험프리가 나온 덕분에 닉슨은 비교적 편하게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하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하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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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이 확보한 선거인은 301명, 험프리는 191명, 조지 월리스(독립당)는 46명이었다. 선거인 숫자만 보면, 닉슨의 낙승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득표율에서는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닉슨은 3179만 표, 험프리는 3128만 표를 얻었다. 표차가 근소했던 것이다.

여당이 불리한 상황에서 선거운동이 시작됐지만, 선거전이 가열되고 국론분열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반(反)공화당 표가 험프리에게 몰려든 결과였다. 이렇게 선거가 마무리되고 닉슨의 당선이 확정된 날이 1968년 11월 5일이다. 

다음날인 11월 6일, 대통령 당선자 닉슨이 중대 연설을 했다. 문재인 후보가 9일 밤 광화문광장에서 메시지를 밝힌 것과 유사한 일이었다. 향후 국정운영 방향을 밝히는 이 연설에서, 닉슨은 좀 뜻밖의 발언을 했다. 최대 국정과제를 어느 소녀의 피켓 구호에서 따왔다고 밝힌 것이다. 주인공은 13세인 비키 코울이었다. 이 소녀의 피켓에 적혀 있던 문구를 자신의 최대 국정과제로 삼겠다고 닉슨은 밝혔다.

그로부터 보름 전인 10월 22일, 닉슨은 유세를 위해 미국 동북부인 오하이오주 헨리군 데쉴러읍를 방문했다. 학교 수업을 마친 비키 코울도 유세장에 참석했다. 이때 비키 코울이 든 피켓에 "우리 더불어 가요!" 또는 "우리 함께 가요!"로 번역될 수 있는 "Bring Us Together!"이 적혀 있었다.

피켓을 든 코울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비쳐졌고, 닉슨 캠프는 그때부터 'Bring Us Together!'를 후보의 연설문에 넣기 시작했다. 인종차별 및 베트남전쟁 문제로 분열의 늪에 빠진 미국을 건지고자 국가 대통합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선거운동 기간 막판부터 소녀의 구호를 사용한 닉슨이 당선 다음날 "코울의 구호를 최대 국정과제로 삼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반전이 있다. 그날 유세 때 코울이 애초에 들었던 피켓에는 다른 구호가 적혀 있었다. "L.B,J. Convinced US-Vote Republican!" 린든 베인즈 존슨이 미국을 공화당에 투표하도록 만들었다는 구호였다. 린든 존슨과 민주당이 싫어서라도 공화당에 투표하겠다는 구호였다.

그런데 코울은 그 피켓을 떨어뜨렸다. 바닥에서 피켓을 찾는 그의 눈에 새로운 피켓이 들어왔다. 새로운 것에는 "Bring Us Together!"이라고 적혀 있었다. 코울은 그 피켓을 들었다. 그 모습이 유세장에서 눈에 띄게 부각되면서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코울은 대선 막판에 주목을 받게 되고, 닉슨 당선자의 연설에까지 거론되는 유명인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코울은 이듬해 1월 20일 열린 닉슨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대되었다. 취임식 당일의 거리 행사에서 코울은 종전의 피켓에 다시(Again)란 단어를 추가한 "Bring Us Together Again!"이란 피켓을 들었다.

“Bring Us Together Again!”가 적힌 피켓을 든 비키 코울.
 “Bring Us Together Again!”가 적힌 피켓을 든 비키 코울.
ⓒ 위키백과 영문판(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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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울에게는 한층 더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가 쏟아졌다. 그런데 여기서 제2차 반전이 생긴다. 기자들의 이러저런 질문에 답하던 코울이 뜻밖에도, 지난 대선 때 자신이 좋아한 후보는 닉슨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민주당 험프리를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소녀의 관심을 끈 후보는 민주당 경선 도중에 암살된 로버트 케네디였다. 코울은 로버트 케네디가 좋았다고 답했다. 닉슨의 취임식에 초대되어 전국적 인물로 떠오른 소녀의 입에서 뜻밖의 '불친절한' 말이 나왔던 것이다. 

로버트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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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엉뚱한 에피소드들이 있었지만, 코울과 그의 구호가 1968년 대선과 그 후에 주목을 받은 것은 미국 사회가 그만큼 분열과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는 인종 문제로, 외부적으로는 베트남전 실패로 미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분열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우리 더불어 가요!" 혹은 "우리 함께 가요!"라는 구호가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5월 9일 대선을 끝낸 우리 한국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한국도 분열을 넘어 통합으로 달려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코울의 구호는 한국에도 절실하다. "Bring Us Together!"는 우리 한국에도 매우 절실한 외침이다.


태그:#문재인, #대통령선거, #비키 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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