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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번 선거, 국민 여러분이 만들어주신 기회입니다. (탄핵이 인용되면) 이번 선거에선 여러분이 투표하고 싶은 후보에게 마음껏 표를 주셔도 됩니다. 아셨죠?"

지난 2월 10일, 대구 수성구청에서 있었던 정의당 대선후보 토론회의 한 장면이다. 정의당 대선 후보로 경선 중이던 심상정 대표의 발언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왜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궁금하다고?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좋은 노동'에 대한 얘기를 하려니, 심상정 캠프의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이 자연스럽게 연상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단어조차 금기어로 취급되는) '우리의 노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궁금했다.

이런 의문으로 오늘은 서로 다른 주제를 가진 책 두 권을 이어보려고 한다. 하나는 우리 시대 '선의를 가진' 일터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다루고 있는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이고, 다른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수도 있는) <노동 없는 미래>이다. 이 둘은 너무 멀다고? 우리가 한 번도 '제대로 겪어본 적 없는 노동'에 대한 얘기라는 공통점을 가졌다고 우겨보련다.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 명수민, 이영롱 지음.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 명수민, 이영롱 지음.
ⓒ 교육공동체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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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노동은 가능한가>에서 만난 청년들은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시민단체를 일터로 선택했다.

그들이, 사회의 다수가 강요하다시피 밀어 넣고 있는 트랙이 아닌 그들만의 작고 평화로운 운동장을 선택한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이미 '현명한' 그들은, 넓은 운동장의 치열한 경쟁을 강요하는 트랙에선 '좋은' 노동을 찾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작은 운동장 안에 들어와 막상 부딪혀본 세상은 꽃밭이 아니라 또 다른 고난이었다. 선의에 기댄 채 생활의 어려움은 애써 외면해 보려 했으나, 반복되는 삶에 지속적으로 덧대어지는 더께는 결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큰 조직이 '부품'으로 취급하는 노동의 주체인 '인간'이 제대로 존중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작은 조직은 작은 조직대로의 강고한 위계로 소통보다는 단절이 익숙하다.

"그 사람들이 살아온 궤적들? 선배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듣다 보니까, 이해의 폭이 좀 넓어졌어요. 이 사람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몰라서 그런 게 크겠다 싶은 생각이 든 거죠. 우리가 계속해서 비판만 하는 건 답이 아니겠다 싶었고. (중략) 시니어 그룹도 괴롭긴 마찬가지일 거예요. 청년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니 풀어내야 할 숙제이기도 하죠. 저희도 고민을 되게 많이 하고 있어요. 청년들이 취약한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소통이 약해요, 확실히. 그리고 시니어 그룹들이 가진 장점도 분명히 있거든요. 어쨌든 청년 세대들이 시니어 그룹과 적절히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새로운 진보 세력이라든가 구심점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가 초점인데, 그걸 잘 소통하지 못하는 거죠." - pp.96~97 (정지현, 시민사회단체<ㄴ>)

그들은 결국, 그들의 선택을 후회한다. 자,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좋은 노동'은 영영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우리가 '산업화'를 시작한 60년대 이후, 우리가 만들어낸 '노동'에 대해 '임금'이상의 의미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것인가? 차라리 '노동 없는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노동 없는 미래>
 <노동 없는 미래>
ⓒ 비즈니스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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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책 <노동 없는 미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온다'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작년 초부터 우리를 흔들던 주제인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이 가져올 혁신적인 미래에는, '일을 하지 않아도'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단다. 믿어도 될까?

놀랍게도, 작년부터 정부에서 발표하는 '거의' 모든 과제에는 '4차 산업혁명'이라던가 '인공지능', 또는, '지능형'이라는 키워드가 달라붙어 있었다. 세상의 관심은 금방이라도 알파고를 뛰어넘는 인공지능 엔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고, 당장이라도 인간의 노동을 '기계'가 대체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미래를 두려워했다.

21세기 식 '러다이트 운동'을 제안해야 하는지 궁금해하며, 한편으로는 '기본소득'에 대한 장밋빛 기대를 품기도 했다. 하지만, 클라우스 슈밥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키워드를 던진 지 1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세상은 크게 변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과연 세상은 '혁명'에 저항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위계질서가 단단한' 세계가 '노동'의 미래를 받아들이는 것에 무지한 것일까? 한 번 생각해보자.

마침 지난 주, 지역 아동센터의 아이들과 진행하는 미국 교과서 읽기 주제가 '산업혁명과 제국주의'였다. (미국 영어 교과서였기에) 미국인들의 시각으로 쓰인 이 글에선, '산업 혁명'을 유럽의 '식민 제국주의'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18세기 말,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기계화'와 '대량생산'의 시대를, 우리는 '1차 산업혁명'이라 부른다.

이 교과서에 따르면, 대량생산은 부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물건'들의 원가를 낮춰줌으로써 '대중의 삶'으로 내려보내며 풍요를 누리게 했으나, 급격하게 규모가 커진 산업은 물건을 팔아야 할 '새로운 시장'과 물건을 만들기 위한 '풍부한 자원'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필요'는 유럽의 국가들(그리고, 일본)에게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항해를 촉발했으며, '경쟁적' 제국주의는 아직도 수많은 대륙에 남아있는 치유되지 못한 상처의 원인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거의 300년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산업 혁명'은 단순히 '시장'이나 '산업 구조'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웅변하는 논리가 아닌가? 그런 면에서 소극적인 '산업'의 변화에만 그쳤던 2, 3차 산업혁명과는 달리 4차 산업 혁명은 '인간의 노동' 전반에 대한 고민을 안겨 주고 있다.

비약일 수 있겠지만, 기계공학(1차 산업혁명)이 주도했던 직업 시장은 전자공학(2차 산업혁명, 20세기 초), 전산/컴퓨터공학(3차 산업혁명)으로 자연스럽게 변모되어 왔으나, 4차 산업혁명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예상되는 '인간 노동의 절감'은 결국 어떠한 전공에도 유리하지 않다는 얘기다(물론, 혁명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는 통섭에 기반한 전공의 협업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다른 글에서 좀 더 얘기하고 싶다).

결국, 우리는 조만간,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인간 노동'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맞이하게 될 수 있다. 어쩌면, 300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서 다시 '인간 자체'에 집중해야 하는 시대로 회귀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노동 없는 미래>가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인간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세상' 이것이다. 저자가 이 책 전체를 관통하여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다시 강조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의문은 '로봇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인 것이다." - p.198

이런 질문에 대해 저자가 제시한 세 가지 갈림길을 요약한다. 과연,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원하는 방식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첫 번째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business-as-usual)' 방식이며 4차 산업혁명이 제시하는 기술은 많은 일자리를 없애지만 동시에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낼 테니, 걱정 말고 '지금처럼' 살면 된다는 것이다. 세상은 크게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며 '안심'시키는 기득권의 목소리는, 최근 '4차 산업 혁명은 사기'라며 불거지기도 했다.

두 번째는 '미래로 돌아가는 (back-to-the-future)' 방식이라 명명된 갈래로써 버니 샌더스나 제레미 코빈이 지지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이 원하는 일자리를 갖는 완전 고용과 풀타임 고용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사회는 '평등하고 공정하며, 번영 및 안정성을 가지는' 급여 노동의 창출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의 부'가 인간 노동에 따라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정치 이념과도 연계되어 있다.

세 번째는 '탈 노동 (postwork)' 방식이며, 이는 최근 제시되고 있는 기본소득이 전제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 방식은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물고기도 아니고, 더 많은 어부도 아니며, 전 세계적인 생산을 통해 거둬들이는 풍성한 수확물을 자기 몫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히 나눠줄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기본소득이라는 제도적인 뒷받침과 노동이 전제되지 않음에도 부가 분배될 수 있음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어쩌면, 심상정 후보가 제시하는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는 저자가 구분한 '미래로 돌아가는' 방식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대한민국은 70년대 산업화의 격랑을 단기간에 거쳐오며, 더 나은 노동을 찾아내는 것에 지속적으로 실패해 왔다. 첫 번째 책인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가 그 증거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혼돈의 상태로 '노동이 없는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미래는 '오지 않았기'에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제대로 '선택'해야 한다. 노동의 노예가 될 것인가, '제대로 된' 노동의 주인이 될 것인지를 말이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지금'의 선택에 달려있다.

"만일 소수가 원하는 것들보다는 다수가 필요로하는 것들에 응하는 정부를 재창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든 걸 포기한 채 새로운 로봇 지배자들을 환영하고,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의 삶을 살 기회가 싹 사라져버린 세상, 그리고 그들과 우리로 갈라져 대립해야 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 p.262 <노동없는 미래>

덧붙이는 글 |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_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 이영롱/명수민 씀, 교육공동체벗
<노동 없는 미래_인류 역사상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이 온다> 팀 던럽 지음/임성수 옮김, 비즈니스 맵



좋은 노동은 가능한가 - 청년 세대의 사회적 노동

이영롱.명수민 지음, 교육공동체벗(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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