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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적인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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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2017년 3월 6일은 레알 마드리드가 창설 된지 115년이 되는 날이었다. 115년이라는 시간 동안 레알 마드리드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필자는 115년이라는 시간 동안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적인 순간들을 뽑았다.

1)클럽 창설
   
1902년 3월 6일. 클루브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는, 클럽의 이름을 레알 마드리드의 전신인 '마드리드 F.C'로 클럽 이름을 변경했다. 마드리드 F.C의 공식적인 첫 번째 회장으로 후안 파드로스 루비오(공교롭게도 그는 바르셀로나 출신이었다)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902년 4월 22일. '마드리드 F.C'라는 이름의 법인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호세 산체스 게라는 마드리드 지방 행정 수장의 자격으로 마드리드 F.C의 법인화를 위한 법규를 승인했고, 이 법은 총 3장 22조로 구성되었다. 제17조에 속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7조. 축구 진흥을 위하여 당해 법인은 경기를 조직하여 일정 기간 대회를 개최하고 이와 유사한 성격의 행사에 직간접으로 참가한다.

2)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회장 취임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와 감독직을 모두 역임한 적이 있었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예스테는, 1943년 9월 11일에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베르나베우 회장이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했던 일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당시 레알 마드리드가 사용하고 있었던 구장인 차마르틴 구장을 벗어나서 신축 구장을 짓는 일이었고, 두 번째는 카스티야 지방의 청소년 클럽인 플루스 데 울트라(오늘날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와 제휴 관계를 맺어서 에스파냐 내전 이후 약해진 레알 마드리드의 전력을 빠르게 보강하는 것이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1978년 6월 2일에 사망할 때까지 총35년 동안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직을 역임했고, 그가 35년 동안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부임하는 동안 레알 마드리드는 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클럽이 되었다.

3)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영입
   
레알 마드리드는 라이벌 클럽인 바르셀로나와의 공방 끝에 7만 달러라는, 당시에는 엄청난 금액의 이적료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1953년 9워 23일 오전 10시 30분. 디 스테파노는 아토아 기차역에 도착하여 곧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구장으로 향했다. 그는 곧바로 메티컬 테스트를 받고 점심을 먹은 후, 아내와 자녀들을 엠페라트리스 호텔까지 배웅했다. 다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구장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 축구팀 낭시와의 친선 경기를 위해서 그라운드로 나섰다. 이 경기에서 디 스테파노는 자신의 레알 마드리드 첫 골을 기록했지만, 팀은 2-4로 패배했다.
   
당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6개월에 달하는 긴 휴식과 이적설로 인해서 운동을 쉰 상태였기 때문에 178cm, 79kg의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72kg의 몸무게를 선호했었던 디 스테파노는 곧바로 체중을 감량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이제 레알 마드리드와 디 스테파노의 앞에는 찬란한 역사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1980년대 라 퀸타 델 부이트레 군단의 일원이었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4)첫 번째 유로피언 컵 우승
   
1956년 6월 13일,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의 '파크 데 프랑스'에서 오늘날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유로피언 컵 결승전이 열렸다. 스타드 랭스는 경기가 시작 된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2-0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헥토르 리알의 득점에 의해서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다. 스타드 랭스가 승부를 앞서가는 역전골을 기록했지만, 마르퀴토스의 동점골과 리알의 역전골이 터지면서 대회는 레알 마드리드의 4-3 승리로 끝났다. 레알 마드리드는 최초의 유로피언 컵 우승 팀이 되었고, 이것은 대회 5연패의 첫 걸음이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던 레몽 코파의 능력에 반했던 레알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은,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든지 간에 그를 영입하고 싶었다. 그렇게 코파는 3만 8000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5)미겔 무뇨스 감독의 레알 마드리드 부임
   
선수 시절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었던 미겔 무뇨스는, 1958년에 레알 마드리드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레알 마드리드의 코치진에 합류했다. 무뇨스는 1959년에 루이스 카르니글리아 감독을 대신하여 잠시 감독 대행직을 맡았다.

미겔 무뇨스는 1959/1960시즌 때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었던 마누엘 플에이타스 솔리치 감독을 대신하여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직을 맡았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의 유로피언 컵 5연패를 이끌며 선수와 감독으로 유로피언 컵 우승을 경험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무뇨스 감독은 1974년에 레알 마드리드 감독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14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레알 마드리드 감독들 중에서 최장 집권한 감독으로 기록되어 있다.

6)예예(Yé-yé) 정책
   
레알 마드리드에서 지금처럼 에스파냐 선수들 중심 철학이 굳혀지기 시작했었던 것은 1960년대 시행되었던 예예 정책의 영향이 컸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레알 마드리드는, 알프레도 디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 등과 같은 클럽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노쇠화 과정을 거치면서 전력이 약해지기 시작했었다. 이에 베르나베우 회장은 아마로 아만시오와 같이 젊고 재능이 뛰어난 에스파냐 국적을 갖춘 선수들로만 선수단을 구성하여 팀의 리빌딩을 꾀하여 스쿼드를 젊고 강하게 만드는 아이디어를 냈다. 베르나베우 회장은 당시 전 세계를 휩쓸었던 영국의 록 밴드 비틀스의 노래 중 하나인 'She Loves You'의 후렴구인 'Yeah, Yeah, Yeah'에서 영감을 얻으며 이 정책을 '예예(Yé-yé) 정책'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대성공이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의 주도 하에 오직 에스파냐 선수들로만 구성된 레알 마드리드는, 1965/1966시즌 유로피언 컵 우승에 성공했다. 이것은 베르나베우 회장의 마지막 유로피언 컵 우승이었다. 그 후 레알 마드리드는 32년 동안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 했다.

7)'라 퀸타 델 부이트레(La Quinta Del Buitre)' 창설과 우고 산체스 영입
   
1985년에 루이스 데 카를로스 회장을 꺾고 새로이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부임했던 라몬 멘도사 회장은, 곧바로 팀을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멘도사 회장은 레알 마드리드 카스티야 출신인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뿐만 아니라 마놀로 산치스, 미첼 곤잘레스, 마르틴 바스케스, 미겔 파르데사 등과 같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클럽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이를 놓고 에스파냐의 저널리스트였던 훌리오 세자르 이글레시아스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소년 선수들로 선수단을 구성한 레알 마드리드를 놓고 '라 퀸타 델 부이트레(La Quinta del Buitre)'라고 적었는데, 이 뜻은 바로 '독수리 군단'이라는 뜻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에 당선되었던 라몬 멘도사 회장은, 클럽의 전력을 대폭 강화하기 위해서 레알 마드리드의 라이벌 클럽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소속의 공격수인 우고 산체스를 영입했다.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한 산체스는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1989/1990시즌에 라 리가에서 무려 38득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1득점이라는 경이로운 활약을 펼쳤다.

8)라울 곤잘레스 데뷔
   
1994년 10월 29일은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가 다시 쓰여지는 날이었다. 만17살하고 124일 밖에 안 된 어린 나이의 선수가 레알 마드리드 1군에 데뷔했다. 그 선수의 이름은 바로 '라울 곤잘레스'였다. 이날 라울은 득점하지 못했지만 이반 사모라노의 골에 관여했다.
   
원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유소년 선수 출신이었던 라울 곤잘레스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재정적인 문제로 유소년 시스템을 폐쇄하게 되면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라이벌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라울의 데뷔 골은 다름아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터졌다. 라울은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로 뛰면서 클럽에게 세 번의 챔피언스 리그와 여섯 번의 라 리가 우승을 안겨주었다.

9)32년 만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
   
1997/1998시즌은 레알 마드리드의 위기였다. 파비오 카펠로 감독을 대신하여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던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레알 마드리드는, 라 리가에서 명장 루이스 반 할 감독이 이끌었던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고전했다. 라 리가에서 그들의 순위는 4위였다.
   
하지만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레알 마드리드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강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1965/1966시즌 유로피언 컵 이후 30년 넘게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 했기 때문에,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최우선이었다. 특히, 당시 레알 마드리드가 전임 회장이었던 라몬 멘도사 회장의 무리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리모델링 때문에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는 재정적인 위기를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필요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만났던 상대는 최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이탈리아의 세리에A의 강팀인 유벤투스였다. 당시 유벤투스의 선수들로는 알렉산드로 델 피에로와 지네딘 지단, 필리포 인자기, 에드가 다비즈, 그리고 디디에 데샹 등이 있었고, 이들을 지휘하는 감독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었다. 그렇다 보니 많은 이들이 유벤투스의 낙승을 점쳤다.
   
하지만 경기는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를 중심으로 한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진은 유벤투스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유벤투스의 수비진을 끊임없이 괴로혔던 미야토비치는, 선제골을 기록하는데 성공했고, 이 득점이 그대로 결승골로 기록되면서 레알 마드리드는 32년 만에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공교롭게도 레알 마드리드를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던 유프 하인케스 감독은 라 리가 성적 부진을 책임으로 로렌소 산스 회장에게 경질되었다. 참고로 산스 회장은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으로 부임하며 총 여덟 명의 감독들을 교체했다. (호르헤 발다노, 아르센시오 이글레시아스, 비센테 델 보스케, 파비오 카펠로, 하인케스,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22일 만에 경질, 거스 히딩크, 존 토샥)

10)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의 당선과 갈락티코 정책의 시작

1996년에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선거에서 698표 차이로 낙선했던 플로렌티노 페레즈는, 2000년에 있었던 레알 마드리드 회장 선거에 또 다시 도전했다. 당시 페레즈의 강력한 대항마는,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이었던 로렌소 산스 회장이었다. 산스 회장이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직을 역임하는 동안 레알 마드리드가 두 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산스 회장이 레알 마드리드 회장직을 계속 역임해야 한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이 레알 마드리드의 재정 회복과 함께 루이스 피구의 영입까지 공약으로 내걸게 되면서, 페레즈를 지지하는 소시오 주주들과 마드리디스타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결국, 로렌소 산스 회장을 꺾고 레알 마드리드 회장직에 당선된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은, 자신이 쌓았던 인맥과 사회적인 지위, 그리고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스타 플레이어들을 대거 영입하기 시작했다. 페레즈 회장은 그가 회장 선거 때 공약으로 내세웠던 바르셀로나의 루이스 피구 영입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고, 피구를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시키기 위해서 그와 그의 에이전트를 설득했다. 결국, 피구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고, 이것은 갈락티코 정책의 시작이었다.

11)지네딘 지단 영입
   
플로렌티노 페레즈 회장은 2001년에 당시 유벤투스 소속이었던 지네딘 지단을 영입하기 위해서 그를 2000년 FIFA 올해의 선수 시상식이 있었던 모나코에서 지단을 만났다. 당시 주변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페레즈 회장은 지단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것이 어려웠다. 이에 페레즈 회장은 냅킨에 '자네, 레알 마드리드에서 뛸 생각 있나?'라고 적어서 지단에게 건네줬고, 지단은 냅킨에 영어로 'Yes'라고 적어서 페레즈 회장에게 건네줬다.
   
당시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유로 2000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자신의 커리어에 있어서 다른 어느 대회보다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필요했던 지네딘 지단은, 어느덧 축구 선수로써 최전성기와 하락세 사이에 놓인 만29살이 되자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지단은 2001년에 7500만 유로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지단은, 2001/2002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을 기록하며, 선수로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

12)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영입
   
레알 마드리드는 2009년에 9400만 유로의 이적료를 지불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영입했다. 가족이 레알 마드리드의 열혈한 팬이자 본인도 레알 마드리드의 열혈한 팬이었던 그는, 2007/2008시즌 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나고 싶다는 뜻을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게 전달했다. 당시 퍼거슨 감독이 이를 강하게 반대하면서 레알 마드리드는 1년 후인 2009년이 되어서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영입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기존에 지네딘 지단이 기록하고 있었던 7500만 유로의 이적료를 갱신하며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선수가 되었다. 훗날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로이 킨은 "그를 너무 싸게 팔았다."고 평가했다.

13)라 데 시마(La De Cima)를 달성하다

2001/2002시즌 이후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레알 마드리드는, 12년 만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진출에 성공했다.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의 라이벌 클럽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였다.
   
2014년 5월 24일. 포르투갈 리스본의 에스타디오 라 루즈.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위한 마드리드 두 팀 간의 혈투가 시작되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디에고 고딘의 선제골로 승부를 앞서가기 시작했다. 실점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동점 골을 기록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쥐어짜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압박했다.

그렇게 정규 시간이 다 지나가고 경기 종료까지 3분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92분, 코너킥 상황에서 세르히오 라모스의 헤딩슛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골망을 흔들며 승부는 1-1 극적으로 동점이 되었고, 승부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연장전에 앙헬 디 마리아가 엄청난 스피드의 드리블을 선보이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수비진을 제치고, 곧바로 슛을 했다. 이 슛은 티보 쿠르트와 골키퍼에 막혔지만, 슛이 굴절되며 바로 뒤에 따라 들어온 가레스 베일의 헤딩슛을 막지 못 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2-1로 역전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마르셀로는 체력이 떨어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수비진의 빈틈을 슛으로 연결하며 3-1로 벌리는 쐐기 골을 기록했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페널티킥을 얻어내는데 성공하며 승부를 4-1로 만들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2001/2002시즌 이후 12년 만에 그들의 오랜 숙원인 열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인 '라 데 시마'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은 감독으로써 세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수석 코치였던 지네딘 지단은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덧붙이는 글 | http://ryuilhan1993.blog.me/220952611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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