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커피 한 잔과 분위기에 취해 직장 때려치우고 서점이나 할까?라는 말이 꼭 나왔다. 읽고 싶은 책이나 실컷 읽고, 음악 들으면서 사는  책방지기 인생을 꿈꾸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디까지나 가끔 품어보는 로망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련은 남아 있어 가상의 책방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서점인으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누군가의 로망처럼 달콤하고 행복할까?

여기 책방지기 인생을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이 쓴 책이 있다. <당신에게 말을 건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서점을 대이어 운영하게 된 김영건씨의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속초의 동아서점이다. 책을 펼치면 저자의 아버지인 김일수 대표가 아들에게 쓴 편지가 프롤로그로 펼쳐진다.

'아들아. 그동안 여러 가지 부족했거나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 늦은 이제부터라도 잘해보고 싶고, 무엇보다도 네게 도움이 되고 싶구나. 나는 사랑하는 내 아내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손주들, 또 곧 태어날 네 아이와 함께 살아갈 날을 기다리며 지방의 작은 서점에서 백 년 서점을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 우리 앞으로도 잘 견디자꾸나.' - 프롤로그 중에서

다정한 편지의 주인공인 저자 영건씨가 처음부터 서점 일을 한 건 아니었다. 2014년,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계약직 공연기획자로 일하던 그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전화를 걸었다.

"서점 해볼 생각 있느냐?"

아버지 일수씨는 아들에게 한 번도 서점을 해보자고 제안한 적이 없던 터였다. 서점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자랐고, 쇠락해가는 지방 오프라인 서점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영건씨였지만 어쩐지 승낙해버리고 만다. 9년 간의 서울생활. 성인이 되어 만든 인간관계와 경력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인구 팔만의 속초에서 서점을 운영하기로 마음먹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고향에 내려온다.

서울에서의 먼 미래를 그려보니 아찔하고 아득하기만 하던 처지에, 아버지로부터 서점 제안을 받고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승낙해 버린 것이었다. 언젠가 도무지 회사에 다닐 수 없을 것 같아 아는 선배에게 대학원 진학에 대해 조언을 구하자, 그는 <베르세르크>라는 만화에 나온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 - p.23

동아서점은 1956년 생이다.
 동아서점은 1956년 생이다.
ⓒ 알마

관련사진보기

서점 직원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영건 씨와 아버지 김일수씨는 서점을 확장 이전하며 1만 권 이상의 책을 반품하고, 2만 권의 책을 서가에 진열했다.

개점 후에는 주 65시간을 일하며 주말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신간을 주문하고, 책을 반품하고, 흐트러진 책을 정비하였다. 가만히 앉아 넋 놓을 시간 없이 지내는 곳이 서점이었다.

저자는 초보 서점 직원이 겪는 어려움을 세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에세이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서가 분류법, 납품, 출판사 직거래와 도매상 거래 등 현실적인 팁들도 풍부해 자기만의 책방을 꾸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알찬 내용이 많았다.

혹시 도서관 책에 부착된 청구기호 라벨을 누가 붙이고 기관 도장을 누가 찍는지 아는가? 놀랍게도 서점에서 그 일을 한다. 도서관에 비치될 책들의 바코드와 청구기호를 생성하고 그것들을 라벨 용지에 출력해서 붙이는 과업이 왜 서점 직원들에게 맡겨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공공 도서관 납품의 관례라고 한다.

저자는 납품 과정에 불만을 품다가도 단단한 정신력과 튼튼한 체력이 때로는 금전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걸 부인하지 않으며 라벨 붙이기를 계속한다. 도서 납품은 규모가 클 때는 한 달 매출액과 맞먹기도 하고, 규모가 작을 때조차도 하루 매상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서점인의 고생은 육체노동으로 그치지 않는다. 분야를 나누기 곤란한 책을 어떤 서가에 꽂아야 할지 고민하고, 손님들의 성향에 맞춰 신간의 주문부수를 가늠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구입하고픈 책으로 보일지 배치를 고려하고, 특집 서가를 구상하는 것도 서점 직원의 주요 업무다.

서비스직이 모두 그렇겠지만 가장 난이도 높은 정신노동은 진상 손님 상대하기이다. 저자는 아예 '꼰대와의 투쟁'이라고 따로 꼭지를 떼어 놓았다. 하루는 중년 남성 한 명이 책 몇 권을 골라서 계산대에 오더니 다짜고짜 "내가 교수인데..." 하고 대단한 척 하며 말을 꺼내더란다.

얘길 더 들어보니 자기는 교수라서 도시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에 가면 늘 본인을 알아보고 할인을 해주므로 여기서도 넉넉하게 할인을 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안 해줬다고 한다. 도서정가제에 따라 도서 최대 할인폭은 10%이다.

또 박원순 서울 시장의 절판된 책을 문의한 손님이 있었는데, 구하기 힘들 것 같다고 하니 무작정 출판사로 전화를 걸라고 명령을 하더란다. 출판사로부터 직접 책을 받고 있지 않고 이렇다 할 관계도 없어 불가하다고 양해를 구하니, 돌아오는 건 끔찍하게 화난 표정과 씩씩거림. 그걸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련만 전화번호를 받아 든 손님은 출판사와 통화 후 사자후를 내질렀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출판사에 책이 한 권 있어서 나한테 보내준다는데, 나 같은 손님을 놓치니까 서점이 안 되는 거 아니야!"

작가는 이 출판사 사건 이후 거울을 보며 "꼰대가 되는 순간 나는 생을 마감하겠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하니 당시의 참담한 심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점에서 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단골손님과의 인연을 떠올리고, 멀리서 책을 사러 오는 관광객들에게 감탄과 존경을 표하며 서점 일에 의미와 행복을 부여했다. 진심으로 책을 좋아하고, 서점을 아끼지 않았다면 표현할 수 없는 문장들이 가득했다.

새롭게 단장한 동아서점이 문을 연 지 만 이년이 조금 넘었다. 이제 저자는 손님이 책을 찾으면 수많은 책들로 빼곡한 서가 속에서도 위치를 알아낼 수 있는 수준이므로 더 이상 초보 서점인이 아니다. 책을 많이 보면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도 생기는 것일까? 능숙한 서점 직원이 된 그는 손님으로 만난 여자분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졌다.

아이가 자라면 아버지 뒤를 이어 동아서점을 물려받게 될까? 과연 한국 최초로 4대째 100년 가업 서점이 탄생할 수 있을까? 책을 덮고 나니 동아서점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서라도 영건씨가 서점을 오래오래 지켜주기를 바랐다.



당신에게 말을 건다 - 속초 동아서점 이야기

김영건 지음, 정희우 그림, 알마(2017)


태그:#당신에게말을건다, #김영건, #알마, #동아서점, #책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