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베트남 사파다. 하노이에서 무기력한 열하루를 보내고 마침내 택한 두 번째 여행지.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판시판산(3243m)을 필두로 장엄한 산들과 한국의 남해처럼 계단식 논이 만든 비경으로 유명하다. 약 7시간 야간 버스를 타고 이른 새벽 도착했다. 

버스에서 만난 한국인 시언을 따라 그녀가 예약한 숙소에 나도 들었다. 숙소는 버스가 선 곳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길가에 매달린 듯 있었다. 숙소에 딸린 카페에 짐을 놓고 앉았는데, 시언이 창 쪽을 보며 '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따라 돌아보곤 "와아아아아아!" 소리를 질렀다.

좀 전까지 사방을 가렸던 하얀 산안개가 순식간에 그치고 본래의 비경이 드러난 것. 환호성 외에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기하고 감탄스러울 따름. 얼마지 않아 안 사실인데 이렇듯 안개가 그쳐 사파의 본모습을 보는 일은 행운! 사파에 머문 닷새간 딱 세 번의 행운이 찾아왔다.

짙은 사파의 산안개
 짙은 사파의 산안개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순식간에 산안개가 그치고
 순식간에 산안개가 그치고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입이 떡 벌어지는 비경이 눈 앞에
 입이 떡 벌어지는 비경이 눈 앞에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두 번째 행운은 셋째 날 찾아왔다. 역시나 커튼이 걷히는 것처럼 혹은 마술처럼. 같은 방을 쓰던 베트남 사람 옌과 근처 '깟깟 마을'로 향했다. 깟깟 마을은 사파의 전통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문화 마을. 계속 비가 내려 땅이 질펀했지만 또 언제 기회가 올 지 모를 일.

첫날에 이미 한 번 걸었지만, 마을로 가는 길의 풍경은 정말 대단했다. 여행을 하면서 대자연과 마주하면 '경이롭다', '아름답다', '신비롭다'와 같은 말이 왜 생겼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파에도 이런 자연을 파괴하고 전통을 단절시키는 개발 광풍이 불고 있다.

마을 입구. 좁고 길게 난 계단길 양옆에 나무로 지은 사파 전통 가옥과 알록달록한 색실로 짠 가방과 양탄자 같은 수공예품이 보인다. 그보다 눈에 띄는 건 몇 발 자국 앞에 있는 아이와 개와 돼지. 모두 살아 있는. 그리고 좀 더 앞에 전통 의상을 입은 소녀 둘.

깟깟 마을 가는 길 어느 찻집에서
 깟깟 마을 가는 길 어느 찻집에서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깟깟 마을 가는 길
 깟깟 마을 가는 길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깟깟 마을 입구
 깟깟 마을 입구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숙소가 밀집한 곳에서 이곳 사파 주민들이 꾀죄죄한 몰골로 아름답지만 꼬질꼬질한 전통 의상을 입고 동정이 아닌 이상 살 것 같지 않은 때묻은 팔찌 등 액세서리를 파는 모습이 안돼 보였다. 하지만 마을 안에선 달랐다. 모든 것이 조화롭고 아름답고 당당했다.

'맞다. 우리의 삶은 이러했고, 계속 이러해야 했는데' 하는 자각. 자연 재료로 지은 집, 자연의 힘을 빌린 기구들, 그런 집에 살며 그 기구들을 이용해 자연과 삶을 가꾸는 사람들. 그제야 검고 흙 묻은 그들의 얼굴과 옷이 더러움이 아닌 자연스러움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잡아 먹힐지언정 사는 동안 삶다운 삶을 사는 동물들. 공장이 아닌 집에서, 물건이 아닌 생명으로 돌봄 받으며. 닭이 제 새끼인 병아리와 순한 개 앞을 지나가고, 동화에서만 봤던 돼지 삼형제가 옹기종기 붙어 볕을 쬐고, 오리는 도랑에서 물을 먹고, 사람 아이들과 더불어 노는.

더딘 걸음으로 약 3시간 만에 깟깟 마을 구경이 끝났다. 베트남 사람인 옌 덕분에 좀 더 알차고 편안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정말 마술처럼, 마치 안개가 우리의 마을 구경을 허락해주고 또 그것이 끝났음을 알아차린 듯 산안개가 다시금 몰려와 모든 걸 하얗게 가렸다.

자연의 재료를 빌어 만든 아름다운 사파의 전통 가옥
 자연의 재료를 빌어 만든 아름다운 사파의 전통 가옥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순한 개와 닭 가족. '살아있는 닭을 본 적 있으세요?'
 순한 개와 닭 가족. '살아있는 닭을 본 적 있으세요?'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돼지 삼형제. '살아있는 돼지를 본 적 있으세요?'
 돼지 삼형제. '살아있는 돼지를 본 적 있으세요?'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마지막 행운은 사파를 떠나는 날 아침. 아무도 없는 카페에 홀로 앉았는데 또 산안개가 굼실굼실 흩어지기 시작했다. 전혀 서두르는 것 같지 않은데 수 초 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한, 그러나 여전히 벅차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자각. 바로 눈 앞에, 내가 그토록 감동하며 바라보는 저 자연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수많은 존재들과 지금의 나 있는 여기, 자연을 죽여야만 가능한 너무 깨끗하고 편리하고 따뜻한 숙소, 그것을 선호하는 내 마음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있음을.

사파에 온 뒤로 내내 마음이 갑갑했던 이유가 말이 되어 나를 이해시켰다. '그렇구나……, 그거였구나…….' 하고 있는데 안개가 다시 몰려왔다. 그칠 때와 같이 순식간에. '깨달았음 이제 알아서 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안개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공기는 더없이 깨끗하고 달콤하다. 이 또한 안개 너머 아니 안개까지도 하나인 자연과 그 안에 수없이 많은 순한 생명들의 숨의 향임을 안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내 삶이 절대 무관치 않음도 안다.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위해 나는 무엇을......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위해 나는 무엇을......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보이지 않아도 이제는 아는 것들
 보이지 않아도 이제는 아는 것들
ⓒ 이명주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여행은 결국 나의 일상에서 누군가의 일상을 오가는 여정.
고로 내 일상에선 멀고 낯선 곳을 여행하듯 천진하고 호기심어리게,
어딘가 멀고 낯선 곳을 여행할 땐 나와 내 삶을 아끼듯 그렇게.

지난 2016년 11월 9일부터 세 달간의 대만-중국-베트남 여행 이야기입니다.
facebook /travelforall.Myoungj



태그:#깟깟마을, #문화마을, #CAT CAT VILLAGE, #베트남여행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