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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로 망명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한인 기지촌, 군관학교를 설립한 사람은? 상해임시정부를 떠올렸다면 답을 맞출 수 없다.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삼일절 기미독립운동 이후인 4월13일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됐다. 대한민국최초 망명 임시정부는 이보다 5년 앞선 1914년 설립됐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로 무상교육을 도입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니 우리나라 최초의 무상교육은 언제 이루어졌을까? 지금보다 111년 앞선 1906년에 무상교육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당신은 믿겠는가?

마지막 질문하나. 우리나라 최초로 수식을 가로로 쓴 산수교과서를 만든 사람은? 역시 이런 사실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의 주인공은 모두 동일인이다. 바로 독립운동가이자 위대한 교육자인 보재 이상설(1870.12.7.~1917.3.2·충북진천) 선생이 그 주인공이다.

3월 2일은 그가 낯선 이국 땅에서 순국한지 꼭 100주년 되는 해. 하지만 보재 이상설 선생은 그의 업적만큼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이상설 선생은 충북 진천 태생으로 27세에 성균관장에 임명된 유학자이자 최초로 망명임시정부를 세운 독립운동가다. 또 우리나라 최초로 가로쓰기 산수 교과서를 편찬했고 근대식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세워 최초로 무상교육을 실천했다.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부당성과 침략성을 들어 반대 상소문을 올리고 '대한 협동회'를 조직 전국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이상설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이 체결되자 을사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올렸다. 1905년 11월 30일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들은 이상설 선생은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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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보재 이상설 선생은 이동녕 등과 조국을 떠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고, 간도 용정촌으로 간다.

이상설 선생은 이곳에서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이상설 선생은 사재를 털어 학생들에게 필요한 책과 학용품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1907년 보재 이상설 선생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정사로 파견된다. 1907년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1909년 보재 이상설 선생은 이승희·김학만·정순만 등을 규합해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싱카이 호 남쪽 봉밀산 부근에 한인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 기지를 건설했다.

1910년에는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유인석·이범윤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했다.

1914년 보재 이상설 선생은 한일합병후 최초의 망명정부를 세운다. 그는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에 선임됐다. 상해 임시정부보다 5년 전의 일이다.

이상설 선생은 삼일만세운동과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지기 2년 전인 1917년 3월 2일 지병이 악화 돼 이국땅에서 순국했다.

이상설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魂)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결국 이상설 선생의 유언에 따라 기록은 대부분 불태워졌다. 이로 인해 선생의 활동사항에 대해서는 자료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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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선생은 유학자이면서 누구보다 신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성균관장 재직시 최초로 서양식 수학과 과학교과를 도입했다. 그는 직접 '산술신보' 라는 수학교과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로쓰기 수식을 사용한 교과서로 기록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한국어를 포함 5개국어에 능통했다.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겠는가. 내 몸과 유품, 글을 불태워 버리고 강물에 흘러보내라"더 보재 이상설 선생.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유학자이면서 과학과 산수, 법학에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학자로서 그의 삶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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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보재, #이상설, #진천군, #서전서숙, #충북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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