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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28일 오후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2차) 발굴 현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28일 오후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2차) 발굴 현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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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2차) 유해.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2차)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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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고개에서 한국전쟁 전후 집단학살 되었던 민간인들은 확인사살까지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현장에서 나온 '45구경' 탄두 2점을 근거로 이같이 추정했다. 공동조사단은 지난 23일부터 이곳에서 발굴작업을 벌이고, 28일 현장을 공개했다.

공동조사단은 2014년 2월 1차 발굴 때 유해 39구와 유품 90점을 발굴했다. 이번 2차 발굴조사는 1차 현장에서 100m 아래 쪽에서 진행됐다.

허벅지뼈와 정강뼈, 위팔뼈, 머리뼈 등이 나왔고, 주인공은 남아 어른으로 추정된다. 유품은 버클 5개와 탄두 6개, 안경 1개, 고무줄, 단추 등이 나왔다. 탄두는 카빈 3점, 45구경 2점, M1 1점이다.

유해와 유품은 가로 8m, 세로 2m 넓이에 깊이 30~50cm 정도의 범위 안에서 나왔다. 박선주 발굴단장(충북대 명예교수)은 유품으로 나온 '45구경' 탄두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45구경이 나왔다는 것은 확인사살로 추정되는 증거"라며 "45구경은 권총으로 유효 거리가 가깝다. 확인 사살할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유해와 탄두 숫자가 일치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박 교수는 "세월이 지나면서 빗물에 씻겨 내려갔거나 이전에 이 장소에 대해 파낸 흔적이 있어서 상당수가 없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안경은 도수가 없다. 박 교수는 "1950년대 발굴지에서 나온 안경은 대부분 도수가 없는데, 멋으로 썼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단추는 둥근 모형 4개, 4열 흰색 11개, 2열 녹색 2개, 4열 검정색 1개가 나왔다. 박 교수는 "형무소 재소자는 죄수복을 입고 있어 단추가 거의 일치하는데, 이곳에서는 다양한 단추가 나왔다"며 "이는 재소자가 아니라 국민보도연맹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단추의 색깔이 흰색이 많아 여름 옷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학살 시기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인 1950년 6~8월 사이로 추정된다"고 했다.

버클 2개 앞면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자 '고(高)'자를 새겨 놓은 버클은 고등학교 마크로 추정되고, 다른 하나는 한자 '체(體)'자와 함께 '조선체육회'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28일 오후,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2차)에서 나온 유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28일 오후,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2차)에서 나온 유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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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도 관심거리였다. 금, 은, 동으로 보철했던 것이다. 박 교수는 "1950년대만 해도 먹고 살기가 힘들었고, 그 때 금보철을 했을 정도였다면 형편이 다소 나았던 사람으로 보인다"며 "어느 정도 사회적 신분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주민 증언 등에 의하면, 진주 명석면 용산리 골짜기에는 당시 718명이 집단학살되었다고 한다. 1차와 2차 발굴 결과, 수습된 유해는 66구뿐이다.

박 교수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곳 이외에 더 집단학살지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정도 구덩이라면 27명이 들어가기에 충분하다"며 "다른 지역 학살지의 증언을 보면, 당시 재소자를 30~35명 정도 트럭에 태워 싣고 갔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박 교수는 "뼈가 나온 위치 등을 볼 때, 사람이 구덩이 안에서 서 있는 상태에서 총을 쏜 것 같다"며 "총을 쏘니까 사람들이 우왕좌왕했던 것 같고, 뼈는 가운데는 적고 양 옆으로 많이 몰려 있다"고 말했다.

진주유족회 몇몇 회원들 눈물 훔치기도

이날 현장설명회에는 진주유족회 회원들도 지켜봤다. 박선주 교수가 설명하는 동안 몇몇 유족들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강병현 진주유족회 회장은 "목이 메인다. 유해를 보고 이게 우리 아버지인가 하는 생각을 하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게 나라냐, 우리가 국민이냐"며 "지방자치단체도 중앙정부도 다 정부인데,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것도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왜 국가가 나서지 않느냐. 비참하다"고 말했다.

강병현 진주유족회 화장이 28일 오후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2차) 유해 발굴 현장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강병현 진주유족회 화장이 28일 오후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2차) 유해 발굴 현장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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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현 대전유족회 회장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시민사회가 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가 고맙다. 고마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며 "아직 정부는 나몰라 하며 손을 놓고 있다. 옛날에는 연좌제로 인해 우리 아버지가 여기서 죽었다는 말도 못했다.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안경호 총괄조사원은 "유품으로 안경이 한 점 나왔다. 그 안경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하늘은 맑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증언과 기록에 의하면 진주지역에서만 7곳에서 2200여명의 민간인이 1950년 6~8월 사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추가 발굴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선주 교수는 "저는 1997년부터 민간인 학살지 유해 발굴을 시작했다. 어떤 분은 왜 유해 발굴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저는 '국가 정체성 확립'과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권 신장'을 위한 것이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곳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있다.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 이곳을 학생 교육 현장으로 활용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진주시가 이 땅을 매입해서 보존 방안을 찾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현장에는 진주유족회 회원들과 류재수·서은해 진주시의원 등이 함께 했다. 공동조사단은 3월 2일까지 유해 발굴을 마무리한다.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28일 오후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2차)에서 현장설명하고 있다.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가 28일 오후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2차)에서 현장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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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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