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소파에 누워 눈을 반쯤 감은 채, 멀건히 TV를 보고 있었다. "최순실이 어쩌구 저쩌구…" 도대체 이 소리는 언제까지 더 들어야 하는지 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는데 남편이 산에 가잔다.

"어딜?"
"관악산."

추워서 며칠 운동(걷기)을 못했다며 남편은 언제나처럼 또 나를 반 강제로 일으켜 세운다.

"안 돼. 오늘 영하 5도래. 산에 얼음이 온통 깔렸을 텐데. 위험해. 그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난 어느새 두꺼운 바지를 입고, 배낭에다 물병 하나를 넣고, 등산화를 신고, 스틱을 들고…, 남편을 따라 마을버스를 타고…, 서울대 정문을 지나 관악선 중턱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역시나 사방 천지에는 아직 눈이 깔려 있었고, 보도에는 얼음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으며, 계단 곳곳에도 얼음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다리가 좀처럼 활기를 찾지 못해 엉거주춤 걸었다. 마치 비둘기가 모이 먹고 다니듯 요상한 모양새를 하고는 발꼬락에 힘을 주면서 조심조심 비탈길을 내려갔다. 일찍부터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거 아차 하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온통 발에다만 신경을 쓰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이러려고 산을 왔나 자괴감'이 들고, 남편을 보는 눈이 곱지가 않다.

'내가 미쳤지, 걷잖다고 여길 따라오다니…'

그래도 비탈길을 무사히 내려왔다. 그런데 남편은 글쎄 더 위로 올라가 보잔다.

"안 돼. 여기도 온통 얼음인데. 저 위는 더 미끄러워…"

난 어느새 남편의 뒤를 따라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저 위에서 머리가 하얗게 샌 아저씨가 성큼성큼 우리 곁으로 오면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주신다. 나도 따라 "안녕하세요." 하면서 아저씨 발을 보니 '아이젠'을 하고 계셨다.

"아저씨! 저 위에 미끄러운가요? 얼음이 많나요?" 

하얀 머리 아저씨가 힘을 주어 답해 주신다.

"네! 위험해요."

그리고는 우리 신발을 번갈아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두 분. 안 돼요. 올라가지 마세요."

그때, 남편이 하얀 머리 아저씨에게 하는 말이란…

"집사람 넘어지는 거 배워주려고요." 

그러자 아저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편에게 말한다.

"예? 그러다 크게 다칠려고….안 돼요. 올라가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곤 아저씨는 남편과 나를 지나쳐 아이젠을 찬 발로 또다시 성큼성큼 씩씩하게 내려가셨다. 남편은 내려가는 아저씨를 보며 아쉬운 듯 언제나처럼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내게 또 설명을 시작한다.

"넘어질 때도 요령이 있는 거야. 무작정 넘어지면 다치겠지. 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몸을 움직이다가 이렇게 저렇게 넘어지면 덜 아퍼. 요렇게 해도 덜 아프지…. 주절주절…" 

나는 남편의 주절주절을 끝까지 다 듣고 내 마음대로 관악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위험할 것 같아 내려오긴 했지만 왠지 끝까지 오르지 못해 아쉽기도 했다. 아이젠 없는 내 허술한 등산화를 보자 속이 상했다. 그래도 어쩌랴. 넘어지면 정말 큰일인 것을.

얼음을 뒤집어쓴 돌들을 한돌, 두돌 조심스레 즈려밟으며 겨우 산을 다 내려왔다. 평평한 등산로에 진입한 후 뒤돌아 보니 그래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추운 날 그래도 운동했네. 소파에 누워 있는 것보단 낫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틈에 남편은 40년 내내 그랬듯 저 멀리 내 앞으로 걸어간다. 그러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가 볼일 보고 만족한 얼굴로 나오더니 휙 하고 또 내 앞을 지나 저 앞으로 걸어간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으이구...저 버릇…' 

어찌 됐건 고달프고, 위험스럽고, 험난한 길을 지나 지금은 널찍하고 안전한 대로를 만족스럽게 걷고 있다. 오늘도 난 익숙한 남편의 뒷모습을 눈에서 놓칠세라 조용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저 뒷모습을 평생 따라다니고 있네... 하고 생각하며.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TV를 켜니 TV는 여전한 소리를 해댄다. "최순실이 어쩌구 저쩌구…"

덧붙이는 글 | .



태그:#관악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