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기사 한눈에

  • new

    권김현영에 따르면 이들이 등장한 20~30년대, 90년대 중반, 2015년대는 기존의 체제들이 붕괴를 앞둔 시점이었다. 때문에 기성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고
다큐멘터리 <파도 위의 여성들>에는 임신 중절이 불법인 나라의 여성들을 돕는 동명의 단체가 등장한다. 이들은 도움을 청하는 여성들을 배에 태우고, 그 나라의 법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국제 연안으로 가 임신 중절을 돕는다.

나는 이것이 놀라운 발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씁쓸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자율적인 결정을 내리며, 이를 돕고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은 겨우 자그마한 선박 속 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영화는 파도 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파도 위의 여성들'은 '웹 위의 여성들'이라는 웹페이지를 만들고, 그 공간을 통해 약물을 통한 임신 중절 방법을 공유하며 전세계의 여성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인터넷을 통해 결집의 공간을 확장한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보고 지금의 한국 사회를 떠올렸을 것이다. 재작년을 기점으로 우리 역시도 인터넷을 통해 페미니스트들이 결집하고 유의미한 움직임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자 선언에서부터 사회 각 분야의 성폭행을 폭로하는 운동, 그리고 다양한 모금 활동이 이어졌다.

나는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며 사람들과 유대를 쌓고 활동을 이어갔지만, 항상 왠지 모를 고립감을 느끼기도 했다. 사무실에서 아무리 치열하게 논의하고 외부로 목소리를 내도 응답은 적었고 세상은 마치 따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거대한 연대의 연결망이 형성된 이후 그 느낌은 사라졌다. 나와 같은 누군가가 어디에 있고,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감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불안한 이들에게 필요했던 '넷페미'의 역사

대한민국 넷페미史. 인터넷 공간을 배경으로 한 페미니스트들의 활동 역사를 다뤘다.
 대한민국 넷페미史. 인터넷 공간을 배경으로 한 페미니스트들의 활동 역사를 다뤘다.
ⓒ 나무연필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모든 '새로운' 사회적 움직임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마주하게 되는 것은 희망만이 아니었다. 상황이 앞으로도 지금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세상의 불이 모두 꺼진 것만 같은 순간이 다시 올 수 있다는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운동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들 하곤 한다. 구체적인 방향을 갈구하고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역사라고 생각한다.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고 흥망성쇠의 요인을 되짚어보는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존재는 현재의 불안을 덜기도 한다. 예전에도 운동은 있었고 지금의 실패가 끝이 아님을 안다면, 더 자신감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때마침 반가운 책이 등장했다. 바로 얼마 전 출간 된 <대한민국 넷페미史>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인터넷 공간을 배경으로 한 페미니스트들의 활동 역사를 다룬다.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자면 1강은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새롭게 형성된 사이버 공간에서 영 페미니스트들의 활약상을 다루며, 2강은 사라진 넷페미들이 다시 등장하고 결집한 2000년대 후반을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3강은 이렇게 부흥한 넷페미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물론 사례가 중심이지만, 이 책은 그렇다고 '넷페미들이 이런 일을 했고 겪었다'는 식으로 사건을 나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대신 넷페미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광범위한 사회적 맥락 위에 포개어 놓는 데까지 나아간다.

<대한민국 넷페미史>가 말하는 나아가야 할 길

넷페미들의 오프라인 집단 행동의 사례 중 하나였던 '검은 시위' 현장
 넷페미들의 오프라인 집단 행동의 사례 중 하나였던 '검은 시위' 현장
ⓒ 조정훈

관련사진보기


말하자면 책은 페미니스트들이 사이버 공간에 등장했다 사라지고, 다시 연대할 수 있었던 배경과 조건들을 동시에 짚어낸다. 가령 1강에서 권김현영은 젠더 프리했던 인터넷 공간이 남초화된 원인으로 IMF 이후 등장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성성'이 최소한의 정화 활동조차 멈춰버린 일을 지목한다.

또한 손희정은 페미니즘 리부트와 넷페미 재결집이 가능했던 조건으로 여성들이 팬덤과 촛불 시위를 통해 집단적으로 조직화된 목소리를 내본 경험과 트위터라는 뉴미디어의 등장을 이야기한다.

즉 저자들은 곧잘 현실과 유리되어 사회적 영향력의 무풍지대라 여겨진 온라인 공간을 오프라인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조응하고 영향을 받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이런 각도에서 온라인 공간을 볼 때, 현재의 움직임이 나아가야 할 지점은 보다 명확해진다. 넷페미의 재결집을 가능케한 기반이 오프라인에 있다면, 연대를 지속시키는 방법은 그것이 디딘 현실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저자들 역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예로 손희정은 온라인 넷페미 결집이 만들어 낸 집단 행동에 주목하며 이제는 이런 흐름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민경은 지속적인 활동의 조건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 있을 것'을 꼽으며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조직화가 지닌 필요성을 말한다. 즉 온라인이 단순한 수용과 반영을 넘어 현실 변화를 위한 가능성의 공간이 될 때, 지금의 결집도 더욱 견고해질 수 있는 것이다.

폐허 위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쓴다

흥미롭게도 이 책에는 역사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전면에 등장했던 시대들의 특징이 언급된다. 권김현영에 따르면 이들이 등장한 20~30년대, 90년대 중반, 2015년대는 기존의 체제들이 붕괴를 앞둔 시점이었다. 때문에 기성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고, 그래서 그러기를 거부한 여성들이 나타난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등장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또 다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붕괴는 새로운 체계 수립의 조건 중 하나다. 결과적으로 넷페미가 해야 하는 일이 세력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면, 기성 사회의 몰락은 그 일의 가능성과 동시에 필요성을 의미한다.

어느 순간 넷페미의 역사는 넷페미만의 역사가 아니게 될 것이다. 폐허 위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주변에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넷페미가 있다면, 당장 <대한민국 넷페미史>를 펼쳐보길 권유한다. 이 책에는 넷페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현재의 위치, 그리고 전망과 연대의 유지를 위해 목표해야 할 것들이 모두 담겨 있다.

역사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조망하는 렌즈이자 미래의 방향을 찾는 나침판이라면 이 책은 그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그것도 너무나 시의 적절한 순간에 말이다.


대한민국 넷페미史 - 우리에게도 빛과 그늘의 역사가 있다

권김현영 외 지음, 나무연필(2017)


태그:#대한민국 넷페미史, #넷페미, #여성주의, #페미니스트, #기성사회의몰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