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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성룡은 이순신을 두고 말이 적다고 했지만, 이순신은 말 대신 글을 많이 써서 사람들을 사랑했다. 이순신은 공을 세운 장졸들과 의병들에게 상을 내려달라는 장계를 계속 써서
이순신의 일기가 일부 수록되어 있는 <충무공유사>의 일기초
 이순신의 일기가 일부 수록되어 있는 <충무공유사>의 일기초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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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어떤 체제를 가지고 있었을까? 아산 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의 게시물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종2품)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총지휘, 종사관 (문관) 통제사를 보좌하는 참모, 수군절도사 (정3품) 각 수군절도영의 지휘관, 수군 우후 (정4품) 수군절도사를 보좌하는 참모, 수군첨절제사 (종3품) 큰 진의 지휘관, 수군만호 (종4품) 작은 진의 지휘관'으로 설명되어 있다.

수사(수군절도사의 약칭)는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에서 보듯 왜구들의 침입이 많은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각각 2명, 충청도에는 1명을 두었다. 수사는 수군절도사영(약칭 수영)에서 근무했는데, 수사가 다섯 명이었으므로 수영도 경상좌수영(동래), 경상우수영(거제), 전라좌수영(여수), 전라우수영(해남), 충청수영(보령) 이렇게 다섯 곳을 두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어떤 체제였을까

게시물에는 문맥상 경기도 수군절도사(약칭 경기수사)가 빠져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1556년(명종 11) 3월 17일자부터 1883년(고종 20) 1월 24일자까지 경기수사와 관련되는 기사가 계속 등장한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선조 25) 5월 23일자에도 최흥원이 선조에게 "경기수사가 1500명을 데리고 도망갔다고 하는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직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라고 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게시물의 수군 체제에 경기수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또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수군을 이끄는 삼도수군통제사였던 관계로 경기도와는 무관하다고 여긴 작성자가 생략한 결과로 여겨진다.

정조 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 중 난중일기 부분
 정조 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 중 난중일기 부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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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사의 경우도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경기수사와 달리, 본래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자리는 없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일원의 수군 전체를 지휘할 총대장이 필요해졌다. 1593년(선조 26) 처음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가 만들어졌고, 초대 통제사로 이순신이 취임했다. 이순신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발탁된 데에는 조선 관군들이 전쟁 초기 전국적으로 연전연패를 거듭하는 와중에서 충무공의 전라좌수영 수군들만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였기 때문이다.

일본군에 연전연승 한 조선 수군의 전술

이순신은 어떻게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의 게시물 중 '조선 수군의 전술'이 대답을 들려준다.

'조선 수군은 돌격선인 거북선을 앞세워 일본군 함대 속으로 돌격하여 적진을 교란시키고, 이어 판옥선에서 총통과 활로 적선을 공격하였다. 조선 수군의 원거리 포격 전술로 인하여 상대의 배 위로 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일본 수군의 전법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특히 한산대첩에서 아용한 학익진 전법은 넓은 바다로 적을 유인하여 학이 날개를 펴듯이 진을 펼쳐서 일본군을 섬멸한 대표적 전술이다. 이것은 평소 조선 수군이 다양한 진법을 연구하고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요약하면 ①조선 수군은 돌격선인 거북선부터 출동시켜 적진을 흔들었다. ②멀리서 판옥선이 대포를 쏘고 활을 퍼부었다. (게시물에는 없지만 덧붙이면) ③판옥선을 끌고 가 적선을 박아 부수었다.

조선 수군은 갑판 위에서 칼싸움을 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배의 갑판 위에서 일본군들과 칼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일본군은 지난 100년 동안 국내에서 통일 전쟁을 해온 싸움꾼들로, 칼을 휘두르며 전투를 하는 데에는 아주 숙달된 군사들이었다. 그에 비해, 조선 관군은 1392년 개국 이래 200년 동안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다. 즉, 백병전으로 만나면 조선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런 점에서, 시종일관 백병전 끝에 아군이 대승을 거두는 <명량>은 역사에 대한 무지가 낳은, 혹은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상업 영화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대장선인 안택선. 겉모습은 조선의 판옥선과 비슷하다. (이순신기념관 게시 그림)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대장선인 안택선. 겉모습은 조선의 판옥선과 비슷하다. (이순신기념관 게시 그림)
ⓒ 현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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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조선 수군은 일본군보다 월등히 우수한 화포를 멀리서부터 쏘아 적선들을 공격한 다음, 적들이 우왕좌왕하면 그때 견고하고 무거운 판옥선을 몰고 쳐들어가 가볍고 허약한 세키부네(關船)와 대장선 아다카부네(安宅船)를 세차게 박아버렸다. 그렇게, 아군 및 적군의 전함과 화포의 장·단점을 꿰뚫어 전술에 적용해낸 이순신의 지휘력 덕분에 조선 수군은 연전연승의 휘파람을 불 수 있었던 것이다.

조총보다 월등히 우수했던 조선 수군의 화포

이제 조선의 화포(火砲)에 대해 알아본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전함에는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을 발사하는 천·지·현·황자총통을 장착하였는데 이들 화포는 날아가는 거리와 파괴력에서 일본군의 조총보다 훨씬 뛰어났다. 바닥이 뾰족하고 배가 가벼워 무거운 화포를 싣지 못한 일본 전함들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먼 거리에서 화포를 무자비하게 퍼부은 다음 무겁게 달려와 와장창 박아버리는 조선 판옥선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격목


목마(木馬)라고 부르기도 했다. 폭발할 때 발생한 연소가스가 새어나가 버리면 폭발 압력이 약해져 탄환이 얼마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연소가스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발사체와 화약 사이의 빈틈을 나무덩어리로 막는다. 이 나무가 바로 격목이다. 격목이 틈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면 폭발 압력이 약해지고 너무 꽉 틀어막으면 불발탄 또는 총통 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화포를 발사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총통 내부를 청소하고 약통에 화약 심지를 넣는다. ②포구로 화약을 넣고 종이를 덮는다. ③격목(激木)을 집어넣는다. ④포구로 화살이나 철환을 넣는다. ⑤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한다.

가장 큰 화포는 '하늘 천' 쓴 천자총통

임진왜란 때 사용한 화포 중 가장 큰 것은 천자총통이었다. <천자문>이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되는 데 착안하여 가장 큰 총통에 천자총통, 그 다음 순서대로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천자총통은 약통 부위에 '己酉造上天字重七百斤藥入三十兩(기유조상천자중칠백근약입삼십량)'이라고 새겨져 있다. 천자총통은 무게가 7백근(약 420kg)이며, 화약을 30냥 넣는다는 뜻이다.

현자총통은 천·지자총통보다 작아서 만들기가 쉬웠고, 화약은 적게 들면서도 탄알이 날아가는 거리 등 성능에서는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전투에 나가는 조선 장졸들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사용된 화포는 현자총통

황자총통은 총통 중 네 번째로 컸다. 약통 뒤에 나무 막대기를 꽂을 수 있는 손잡이와 포귀가 있어 총구의 방향을 쉽게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황자총통에는 약통 부위에 '嘉慶十七年(가경십칠년)', '訓鍊都監(훈련도감) 苧洞(저동)'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만든 시기(1812년)와 장소(서울 저동)를 알 수 있다.

총통 중 임진왜란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된 현자총통(위)과 개인용 화기인 승자총통(아래)
 총통 중 임진왜란 당시 가장 많이 사용된 현자총통(위)과 개인용 화기인 승자총통(아래)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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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총통은 조선 시대에 사용되었던 개인 화기이다. 경상병사 김지(金遲)가 개발한 승자총통은 여진족 니탕개의 난(1583년)을 토벌할 때 큰 역할을 했고, 임진왜란 때에도 조선군의 주요 무기로 사용되었다. 심지에 직접 불을 붙여서 쏘는 방식이었는데, 사격 속도가 느리고 정확성이 떨어져 광해군 때까지 사용되고 사라진 듯하다.

시한폭탄 비격진천뢰, 경주성 탈환 때 큰 역할

비격진천뢰는 둥근 공 모양의 완구에 담아 발사하여 땅에 떨어진 후 폭발하게 하는 일종의 지연신관탄(시한폭탄)이다. 임진왜란 때 화포장(火砲匠, 화포 제작 기술자) 이장손(李長孫)이 만들어 1592년 9월 경주성 탈환 전투 때 위력을 발휘하였다. 내부에 있는 대나무통과 도화선을 감은 목곡(木谷, 나선형의 홈이 파인 나무토막)의 심지 길이를 조절하여 폭발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다.

비격진천뢰는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비격진천뢰는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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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준포(虎噂砲)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전래된 것으로 마치 호랑이(虎)가 앉아 있는(噂) 모습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크기가 작아 옮기기 쉽고, 포구에 두 다리 받침이 있어 어느 곳에서나 바로 바닥에 설치하여 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화약무기 제조기술 유출 방지 위해 병서 배포에 소극적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화포는 그렇게 일본 조총을 압도했다. 조선 초기 이래 화약 제조 기술이 일본이나 여진족에게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화약무기를 다루는 병서(兵書)를 널리 보급하지 않은 정책이 빛을 본 셈이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 이전에 편찬된 화약무기 제조 관련 자료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병서 <신기비별>, <융원필비> 등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발간된 것들이다. 그때부터는 화약 제조 기술이 더 이상 국가 기밀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에서 들어온,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습의 호준포
 임진왜란 중 명나라에서 들어온,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습의 호준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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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비결>은 우리나라의 전통 총통과 임진왜란 이후 전래된 서양 화기 등 화약무기 18종의 제작 방법과 쏘는 방법 등을 담은 책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감사를 지낸 한효순(韓孝純, 1543~162 1)이 1603년(선조 36)에 편찬했다. <융원필비>는 조선 후기 화포를 비롯한 50여 가지 각종 무기와 갑옷, 방패 등을 그림과 함께 상세하게 정리한 책으로, 임진왜란부터 조선 후기까지 무기 발달 과정을 잘 보여준다. 훈련대장을 지낸 박종경(朴宗慶, 1765∼1817)이 1812년(순조 12)에 편찬하였다.

다시 한번 살펴보는 조선 수군 승리 이유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제압한 데에는 이순신의 지휘 능력 외에 전선과 화력의 차이가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본다.

'일본 수군이 옥포의 서전에서부터 연전연패할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전선과 화력의 열세였다. 일본 선박은 선체가 좁고 낮았을 뿐 아니라 매우 취약하여 풍랑을 만나면 곧장 해체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돛대 또한 순풍이 아니면 사용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또한 조선측의 판옥선과 비교할 경우 마치 완구와 실물의 차이 정도로 비유될 만큼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양측 화력의 우열도 현저하였다. 일본 수군이 전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경쾌한 유람선이라고 해도 좋을 선박에 조총을 주무기로 한 데 대하여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선체가 높으며 크고 육중한데다가 선상에 대구경(大口徑)의 각종 화포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수군은 원격전에서는 화포를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고 근접전에서는 전선으로 적의 전선을 부딪쳐 깨뜨리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화면에 '전선'이라 적혀 있다. 이때 전선은 판옥선을 가리킨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이 판옥선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순신기념관 게시 그림)
 화면에 '전선'이라 적혀 있다. 이때 전선은 판옥선을 가리킨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이 판옥선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순신기념관 게시 그림)
ⓒ 현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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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과 거북선이 일본 전함보다 훨씬 뛰어났고, 화포도 우리 것이 일본 것보다 월등히 우수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순신의 지휘력 덕분에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고 굳게 믿는다. 정조가 이순신 신도비(神道碑)의 글을 직접 지으면서 "선조대왕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는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에 의한 것(維忠武一人之力)"이라고 찬탄한 것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부하와 백성들을 사랑한 이순신의 마음

하지만 이순신 본인은 자신의 능력을 자화자찬하는 법 없이 수하 장졸들과 의병들의 의로운 기상과 용맹한 전투력만 칭찬했다. <이충무공전서> 중 '청상의병제장상(請賞義兵諸將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도 그런 사례의 한 가지이다. 이순신은 '순천향교 교생 성응지(成應祉)와 의승장 수인(守仁)·의능(義能) 등이 (중략) 바다에 진을 친 뒤 군량도 스스로 준비하여 (관군에게까지) 두루 공급했는데 (중략) 힘든 노고는 관군보다 배나 더했다'면서 '지난 (3월 5일 당항포 해전) 전투에서 적을 칠 때에도 뚜렷한 전공을 남겼고, 여전히 나라를 위한 충의심에 변함이 없으니 극히 가상할 일'이라고 진심어린 칭찬을 표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순신은 그들에게 상이 내려져야 마땅하다는 의견을 장계에 적어 조정의 관심과 조치를 촉구한다.

난중일기 초고본의 표지(이순신기념관 게시 복제물)
 난중일기 초고본의 표지(이순신기념관 게시 복제물)
ⓒ 현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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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1592년 5월 1일자에도 이순신의 그같은 마음은 잘 나타나 있다. 육군의 지리멸렬로 서울이 함락 직전에 놓이고,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수군이 싸움도 없이 저절로 궤멸되어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던 그 날, 전라도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 바다로 진격해야 하는가를 놓고 수하 장수들과 전라좌수영 진해루(鎭海樓)에 모여 의논하던 이순신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생각하지 않으니 실로 의사(義士)들이다.'

말과 웃음이 적었던 이순신

류성룡은 <징비록>에 '이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단아하며 마치 수양하며 근신하는 선비 같았다'라고 기록했다. 이순신이 선비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지만, 말과 웃음이 적었다는 것은 그만큼 고지식한 인물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무과 시험을 실시할 때 보름가량 함께 생활했던 삼가(경남 합천)현감 고상안(高尙顔, 1553∼1623)의 증언도 <징비록>과 일맥상통한다. 고상안은 "통제사는 그 말의 논리와 지혜로움은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했다'라는 증언을 남겼다. 대단한 위인임에 틀림없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딱딱하고 메마르게 느껴졌다는 표현이다.

이순신의 유품 옥로. 옥로는 갓머리에 다는 장신구이다.(이순신기념관 전시)
 이순신의 유품 옥로. 옥로는 갓머리에 다는 장신구이다.(이순신기념관 전시)
ⓒ 현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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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본인의 <난중일기>로 미루어 보아도 확실히 냉정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병선 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답(진도 돌산)의 군관과 색리(色吏, 지시받은 대로 여러 일을 하는 낮은 관원)들에게 곤장을 친 1592년 1월 27일 이래 이순신은 특히 탈영자들에게는 철저하게 엄격하여 어김없이 목을 베었다. 

'1592년 4월 29일, 두 명의 도망간 수졸을 체포, 당장 효수했다.
5월 3일, 집에 숨어 있는 수군 황옥천을 목 베어 매달았다.
1593년 1월 3일, 도망자를 잡지 않은 김호걸 등을 처형했다.
1594년 1월 6일, 남평의 도망병을 처형했다.
1월 8일, 남원의 도망병을 처형했다.
7월 4일, 도망병 한 명을 처형했다.
7월 26일, 도망병 여럿을 잡아 그 중 주모자 세 명을 처형했다.
8월 26일, 군사 서른 명을 제 배에 싣고 도망친 막동을 효수했다.
1595년 11월 16일 도망가려던 투항 왜병의 주모자 둘을 죽였다.'
 
그런 이순신이었지만, 앞에 인용한 '청상의병제장상'과 1592년 5월 1일자 <난중일기>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열심히 싸우는 장졸들과 의병들에게는 한없는 경의를 보냈다. 류성룡은 이순신을 두고 말이 적다고 했지만, 이순신은 말 대신 글을 많이 써서 사람들을 사랑했다. 이순신은 공을 세운 장졸들과 의병들에게 상을 내려달라는 장계를 계속 써서 조정에 보냈다. 이순신은, 나라와 향토, 그리고 가족을 지키느라 목숨과 피와 땀을 흘리며 싸우는 장졸들과 의병들의 노고를 사회 공동체가 알아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연 부하와 의병들을 아끼고,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고, 변화무쌍한 진법을 구사하고, 우리가 가진 장점으로 적의 단점을 날카롭게 추궁할 줄 안 이순신의 지휘력은 판옥선, 거북선, 화포의 우수성과 더불어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결정적 근거였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의 많은 게시문들, 사진들, 그림들을 보며 답사자들은 그런 깨달음을 얻는다. 이 글의 필자도 그런 뜻에서,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게시물들을 지금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태그:#한효순, #현충사, #이순신, #고상안,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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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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