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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살이 벌써 5년 차, 뜨내기 전세살이 언제까지 우리 마을에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은 우리 마을.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두려 한다. 내 아이들의 유년의 뜰이기에.  - 기자 말

우리가 사는 동네 서울 강동구엔 재건축이 도미노로 진행 중이다. 4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올 때 철거를 앞둔 시영아파트가 유령의 집처럼 서 있었다. 저 많은 아파트를 언제 허물고 다시 짓나 했는데, 지난해 12월부터 입주가 시작돼 전에 없던 새 길이 나고 새 동네가 생겼다.

직접 살진 않았지만 2년 동안 아파트 단지 안의 병설 유치원을 오가며, 도서관과 동네 뒷산에 놀러다니며 늘 함께했던 우리 동네, 고덕주공아파트. 발이 푹푹 빠지던 넓은 논이 있던 곳에 1980년대 중반 5층짜리 단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 후 30년의 세월이 흘러 서로 다른 소망과 욕망을 담아 재건축이 진행 중이다.

강동구 고적주공아파트 재건축을 앞두고
▲ <안녕? 안녕! 안녕...> 앞뒤표지 강동구 고적주공아파트 재건축을 앞두고
ⓒ 문화예술공작소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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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안녕! 안녕...

낡은 집을 새 집으로 다시 짓는다는 재건축.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 쌓은 추억의 풍경들이 사라져버릴까 걱정도 된다. 나무보다 더 높이 올라갈 새 아파트에 가려 창밖으로 벚꽃이 흐드러지던 신혼집,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한 동네 친구들과 깔깔대던 놀이터, 감기로 앓아누운 날 문 앞에 놓고 간 동네 친구의 죽 한 그릇, 유모차를 밀고 수도 없이 걸었던 가로수길…. 그 모든 것이 사라질까, 잊힐까 자꾸 마음이 쓰였다.

이런 마음을 모아 우리가 살았던, 우리만 알았던, 우리 동네 '나의 살던 아파트'를 그림책으로 남기는 작업을 작년 봄부터 가을까지 진행했다. 강동구에 살면서 고덕주공의 기억을 간직한 작가들 중 출판·편집과 사진 찍는 일을 함께 하는 조기옥 작가, 어린이들과 미술작업을 오래 해온 김경원 작가, 그리고 극작가인 내가 공동작업한 그림책 <안녕? 안녕! 안녕…>(정가람 글, 조기옥 사진과 편집, 김경원과 아이들 그림, 문화예술공작소 아이야 펴냄).

그림책을 만든 경험이 없는 세 작가였지만 오래된 동네가 사라지기 전에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 모두의 추억으로 선물하자는 마음을 모으고 서울시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의 도움도 받아 지난해 11월 소박한 그림책이 완성됐다.

아이들과 함께 그렸어요
▲ 고덕주공의 기억을 간직한 아이들과 함께 그렸어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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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도 함께 한 편집회의.
▲ 끊임없는 편집회의 아이들도 함께 한 편집회의.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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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떠난 곳, 남겨진 것들의 쓸쓸한 기록

지난해 여름, 이주가 끝난 고덕주공 2·3단지를 조기옥 작가가 부지런히 사진으로 담았다. 이삿짐 속에 담기지 못하고 버려진 낡은 물건들이 재건축을 기다리는 풍경 속에 담겨졌다. 부서진 우산, 팔 하나 떨어진 곰인형, 손잡이가 없는 세 발 자전거, 낡은 의자, 짝을 잃은 구두 등등.

사진 속 버려진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물건들의 주인이었던, 떠나간 고덕주공의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엔 잡초만 무성한 빈집이 됐지만 이곳엔 사람들이 살았고, 그 사람들은 이 곳에서 소박한 일상과 설레는 꿈을 꿨을 것이다.

작업 도중 우연히 만난 책 <빈집>(이상교 글, 한병호 그림)처럼 철거를 앞둔 고덕주공은 "빈집이어도 비어 있지 않은 집"으로 곳곳에 소소한 기억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 낡아 허물어질 집이지만 이 곳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해야 하는 의무감이 들었다.

"너 아직 거기 있지?"

이야기는 모두가 떠난 텅 빈 고덕주공아파트에 어느 날 날아온 편지 한 통에서부터 시작된다. 여덟 살 아이가 '아직 남아있는 내 친구에게' 보낸 편지.

김경원 작가의 그림에 여덟살 이채연의 손글씨로 완성한 편지
▲ 어느날 문득 날아온 편지 한통 김경원 작가의 그림에 여덟살 이채연의 손글씨로 완성한 편지
ⓒ 문화예술공작소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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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생명을 얻는다
▲ 버려진 물건들은 편지를 받고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생명을 얻는다
ⓒ 문화예술공작소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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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수도 없이 "안녕?" 하고 날아든 편지 한통에 쓰레기로 버려졌던 친구들은 모처럼 신이 난다. 낡은 구두는 편지를 읽고 그 옛날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 하트가 마구 새겨진 분홍빛 구두가 되고 부서진 세 발 자전거는 "안녕!" 하며 멋지게 하늘을 날아오른다. 서로 자신에게 온 편지라고 우기며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기억을 꺼내본다. 그러다 이곳에 남아 있는 모두에게 온 편지인 것 같다면서 아파트 곳곳으로 편지 배달을 시작한다.

버려진 물건들은 토요일 오후 3단지 미리내 공원에서 만나자는 단짝친구를 손꼽아 기다리지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철거가 시작된다. 구겨진 종이처럼 스러져가는 아파트의 모습은 멀리서 봐도 가슴이 아프다. 철거가 시작돼 친구를 만나지 못할까 걱정이 되지만 때마침 비가 와 쉬어가는 공사. 비 개인 오후 무지개를 타고 떠났던 친구들이 하나둘 돌아와 잡초만 쓸쓸하던 미리내 공원 운동장을 가득 채워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아파트 곳곳에 편지를 배달하러 간다.
▲ 남겨진 모두에게 온 편지일지 몰라 아파트 곳곳에 편지를 배달하러 간다.
ⓒ 문화예술공작소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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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 고덕주공 아파트

조기옥 작가의 사진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큰 틀을 잡고, 사진 속 버려진 물건들을 김경원작가가 고덕주공의 추억을 간직한 어린이들 여섯 명과 함께 새로 그려 사진 위에 콜라주 작업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사진 속 물건들이 편지를 받고 어떤 기분이었을지 아이들의 상상으로 되살아난 물건들은 사랑스럽고 건강하다. 아이들 그림의 선이 투박해 모든 장면에서 콜라주로 사용하진 못하고, 김경원 작가가 아이들 그림을 바탕으로 다시 그려 전체 톤을 조율했다.

고덕주공에서 아이 셋을 낳아 키우다 재건축 후 입주를 기다리며 옆동네로 이사 간 한 엄마는 책을 보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아이들과 함께 산책하던 아파트 숲길, 늘 주차하던 아파트 앞마당 한 귀퉁이, 오가다 잠시 앉아 쉬던 벤치…. 20년 넘게 살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자신의 젊은 날과 가족들의 추억이 곳곳에 박혀 있는 아파트. 고향의 추억을 제대로 남기지 못해 아쉽던 차 이 책을 보고 가족들 모두 아이처럼 울었다고 한다.

마을까페 '또봄' 그림책 읽기모임에서도 이 책을 함께 본 많은 분들이 아쉬움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고 선물과 소장용으로 책 구입 의뢰를 해오셨다. 정식 출판이 아닌, 마을공동체 사업 비매품으로 제작한 책이지만 신청자들을 모아 1월 말에 한 번 더 인쇄할 계획이다.

과연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
▲ 철거가 시작된 고덕주공아파트 과연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
ⓒ 문화예술공작소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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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못다 한 '안녕'을 쓰세요   

그림책 속 버려진 물건들은 친구들과 다시 만나 해지는 저녁 늦은 "안녕…"을 나눈다. 그리고 구두와 우산, 곰, 낡은 의자들도 지는 해와 함께 비로소 하늘로 올라가며 그림책은 끝이 난다. 마지막 면지에 분홍빛 편지지가 든 작은 봉투를 붙이고 이렇게 덧붙였다. 

"안녕을 고하지 못한 이에게 편지를 쓰세요 / 안녕 나는 잘 있다고, 안녕 보고싶다고"

재건축 이주 기한에 맞춰 바삐 이사 간 이웃들에게 고향과 같았던 아파트와 미처 못 한 안녕의 기회를 선물처럼 드리고 싶었던 작업자들의 마음을 담았다. 꼭 고덕주공 아파트가 아니어도, 살면서 제대로 하지 못한 안녕들에게 더 늦기 전에 보내는 안녕이라는 선물.

<안녕? 안녕! 안녕…> 그림책 작업을 씨앗 삼아 재건축을 비롯한 마을의 이야기를 소재로 지역 예술가들과 이웃들이 함께 하는 그림책, 낭독극, 전시 등 다양한 작업을 이어나가려 한다. 함께 작업한 조기옥, 김경원 두 작가도 마을의 따뜻한 반응에 보람과 책임감을 느껴 이번에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을 계속 엮어가기로 했다.

조금은 투박하지만 우리가 사는 곳의 풍경과 우리의 이야기를 여럿이 함께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은 마을과 사람들 사이를 잇는 마을지도 같다. 추억이 그리우면 들춰보는 졸업앨범처럼,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 손가락으로 짚어보는 여행지도처럼 우리의 일상을 기록해본다. 익숙하고도 특별한 우리의 작은 시도가 '기억'보다 '상실'과 '외면'이 더 쉬운 이 시대에 작은 위로와 다짐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빈집>과 <나의 작은 집>
▲ 함께 읽으면 좋아요 <빈집>과 <나의 작은 집>
ⓒ 미세기, 상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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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그림책 소개]

<빈집>, 이상교 글, 한병호 그림, 신동일 음악, 미세기, 2007 (시공주니어, 2014)

이상교 시인이 강원도 여행 중 만난 폐가를 보고 지은 시에 도깨비 화가로 유명한 한병호 작가가 은은한 그림으로 완성한 책이다. 사람들이 떠난 빈집에 길고양이와 들풀들이 주인이 되어 버려진 상처를 회복하는 그림책으로 2007년 미세기 출판본에선 <노란우산>의 신동일이 그림책에 맞춰 작곡한 음악도 수록 CD로 함께 들을 수 있다.

<나의 작은 집>, 김선진 글·그림, 상수리, 2016

여러 그림책의 그림 작업을 하던 김선진 작가가 글, 그림을 함께한 첫 그림책으로 작가의 실제 작업실을 모델로 했다. 작가가 작업실로 들어오기 그 작은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과 꿈을 상상하며 투박한 세밀화처럼, 낡은 백과사전처럼, 소박한 일기처럼 엮었다.

덧붙이는 글 | <안녕? 안녕! 안녕…> 책 구입을 희망하는 분은 오마이뉴스 쪽지로 문의해주세요.



태그:#문화예술공작소 아이야, #안녕? 안녕! 안녕..., #조기옥, #김경원, #고덕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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