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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송상현의 묘소는 부산에서 청주로 이장된다. 이때 위패와 혼백을 싣고 왔던 요여 실물이 청주 충렬사 천곡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어 답사자들의 눈길을 끈다. 전시되어 있는 송상현 관련 유물과 유품들이 거의 대부분 진품들이라는 점에서 천곡기념관은 아주 특별하다. 위의 사진은 물론 전시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요여 실물을 촬영한 것이다.
 1596년 송상현의 묘소는 부산에서 청주로 이장된다. 이때 위패와 혼백을 싣고 왔던 요여 실물이 청주 충렬사 천곡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어 답사자들의 눈길을 끈다. 전시되어 있는 송상현 관련 유물과 유품들이 거의 대부분 진품들이라는 점에서 천곡기념관은 아주 특별하다. 위의 사진은 물론 전시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요여 실물을 촬영한 것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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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신(新)사당 참배를 마치고 천곡기념관으로 내려간다. 천곡(泉谷)은 송상현 선생의 호이니 천곡기념관은 곧 송상현기념관이다. 따라서 내부 관람을 하지 않고도 천곡기념관의 성격은 대략 가늠할 수 있다. 송상현이 임진왜란 발발 초기 동래성 전투 때 충절을 지켜 끝까지 왜군과 대적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순절한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기념관은 아마도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 송상현 등을 특별히 정성들여 보여줄 터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정면에 동래성 전투 기록화가 걸려 있다. 부산 충렬사에서도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붉은 옷을 입은 송상현 부사가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지만, 이미 사방 천지에는 왜군들이 구름처럼 깔려 있다. 머잖아 공은 아버지에게 보내는 혈서를 부채 위에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

'한 번 죽음으로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다'

송상현은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보내는 혈서 편지를 썼다. 4행시로 된 글의 요지는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가 더 중요하니 아버지의 은혜는 가벼이 여기겠습니다.'이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을 것이니 너무 슬퍼하시지 말라는 의미의, 자식된 도리로서 부모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다. 천국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혈선도>는 조선 후기 작품이다.
 송상현은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보내는 혈서 편지를 썼다. 4행시로 된 글의 요지는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가 더 중요하니 아버지의 은혜는 가벼이 여기겠습니다.'이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을 것이니 너무 슬퍼하시지 말라는 의미의, 자식된 도리로서 부모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다. 천국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혈선도>는 조선 후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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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지킨 충절'이라는 제목을 단 게시물이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온다. 제목 아래에는 '戰士易假道難'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본문을 읽어본다.

'동래성을 포위한 왜적이 "戰則戰矣 不戰則假道(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다오)"라는 글을 나무판에 써서 보이자, 송상현 동래부사는 "戰死易假道難(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이라고 쓴 나무판을 적진에 던진 후 싸움에 임하여 장렬히 순절하였다.

선생은 비록 문관의 신분이었지만 당당히 왜적에 맞섬으로써 한 번 죽음으로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는 개인보다 나라와 민족을 우선하여 생각하고, 목숨을 바쳐 자신의 책임을 다한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충(忠)과 의(義)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 오른쪽에는 '진정한 충과 효'라는 제목의 글이 답사자를 기다린다. 제목 아래에는 '孤城月暈(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고) 列鎭高枕(여러 진들은 단잠에 빠져 있네) 君臣義重(군신의 의가 중하니) 父子恩輕(부모의 은혜는 오히려 가볍다)'라는 시가 쓰여 있다. 본문을 읽어본다.

'이 글은 선생이 중과부적으로 동래성이 함락되자 조복으로 갈아입고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절을 한 후 죽음을 기다리면서, 한성에 계신 부모님께 당시의 상황과 공의 심정을 시로 표현하여 부채에 적어 보낸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해도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큰 불효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忠)을 위해 효(孝)는 가볍다"라고 한 것은 부모에 대한 효의 정신도 중요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의 정신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충(忠)을 기반으로 한 송공의 죽음은 불효(不孝)가 아니라 '참된 효'라는 사실까지 일깨워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충렬공 송상현 선생의 의로운 죽음은 진정한 의미의 충(忠)이자 효(孝)이다.'

게시물은 송상현이라는 인물과 동래성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간명하게 정리해서 보여준다.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왜적과 싸운 끝에 순절한 송상현이, 부모보다 먼저 이승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효를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명쾌한 논설을 읽은 느낌이다.

송상현의 <천곡수필집> 필사본이 천곡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때 수필은 우리가 흔히 쓰는 隨筆(에세이의 뜻)이 아니라 手筆(손으로 썼다는 뜻)이다. 전체 50장 1책으로 이루어진 <천곡수필집>은 그 동안 종가에 계속 보관되어 왔는데, 송상현 본인이 직접 정리를 하고 글씨를 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송상현의 <천곡수필집> 필사본이 천곡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때 수필은 우리가 흔히 쓰는 隨筆(에세이의 뜻)이 아니라 手筆(손으로 썼다는 뜻)이다. 전체 50장 1책으로 이루어진 <천곡수필집>은 그 동안 종가에 계속 보관되어 왔는데, 송상현 본인이 직접 정리를 하고 글씨를 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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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송상현은 평범한 효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의 부모도 자식이 먼저 죽는 아픔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또 송상현은 나라와 임금에게 도움이 되는 충신이자 고급 관리로, 그리고 선비로서 무난한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역시 전쟁은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소외의 가장 극단적인 원인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 뜻에서, 천곡기념관은 당연히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 경과, 영향에 대해 설명해준다. 기념관 내부 '임진왜란의 발발' 게시물은 '당시 일본은 백여 년간 계속되어 온 전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평정되고 통일 국가가 수립되었다. 그는 막강한 제후들의 힘과 불평을 외부로 돌리고,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위해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정벌하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를 내세워 조선을 침략했다'면서 '오랜 전쟁을 통해 다져진 전투력과 서양에서 전해진 조총 등 우수한 무기를 앞세우고 일본의 대륙 진출 야망을 펼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준비 없이 임진왜란을 맞아 전쟁 초기 거듭 패전하는 조선

그러나 당시 조선은 오랜 평화와 성리학의 발전, 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국방 정책에 소홀하였고, 특히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무시하였다. 게다가 그 무렵 조선은 양반 계급간의 당파 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군역과 조세  제도의 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였다. 그 결과 일본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파견한 통신사마저 붕당을 우선해 상반된 의견을 내놓았고, 결국 아무런 대비도 없이 7년간의 전쟁에 임하게 되었다.

왼쪽부터 이양녀의 헛묘, 가운데에 송상현 공 묘소, 오른쪽에 금섬의 묘가 나란히 앉아 있다. 이 묘터는 충렬사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의 산중턱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공의 묘소는 부산에 있었는데 선조가 좋은 명당을 찾아 옮기라 하여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본부인인 성주이씨 정경부인의 묘소는 충렬사에서 남쪽으로 1km가량 떨어진 곳에 혼자 놓여 있는데, 이는 임금이 정해준 묘소에 임의로 산소를 추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산소를 정해줄 때 송상현과 금섬만 죽었으므로 이곳에 묘소를 설치했고, 이양녀는 금섬의 묘비에 이름만 새겨두었다가 뒷날 헛묘를 만들었다.)
 왼쪽부터 이양녀의 헛묘, 가운데에 송상현 공 묘소, 오른쪽에 금섬의 묘가 나란히 앉아 있다. 이 묘터는 충렬사에서 1km가량 떨어진 곳의 산중턱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공의 묘소는 부산에 있었는데 선조가 좋은 명당을 찾아 옮기라 하여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본부인인 성주이씨 정경부인의 묘소는 충렬사에서 남쪽으로 1km가량 떨어진 곳에 혼자 놓여 있는데, 이는 임금이 정해준 묘소에 임의로 산소를 추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산소를 정해줄 때 송상현과 금섬만 죽었으므로 이곳에 묘소를 설치했고, 이양녀는 금섬의 묘비에 이름만 새겨두었다가 뒷날 헛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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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보냈던 사신들마저 자신이 소속된 당파의 입장에 서서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서 아무 대비도 없이 7년 전쟁에 임하게 되었다? 이 의문에 대한 공식 기록은 1591년 3월 1일자 <수정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당일 기사는 일본에 다녀온 황윤길이 전쟁 발발 여부에 대해 보고했다는 내용이다.

부산에 도착한 통신사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부터 황급히 써서 임금에게 보고한다. 그 후 황윤길은 같은 의견을 선조에게 말로 아뢴다. 그러나 부사 김성일은 "(황윤길과 반대로) 전쟁 낌새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을 동요시키니 이는 옳지 못합니다" 하고 반박한다. 함께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의 정사와 부사가 어떻게 이렇듯 정반대 의견을 내놓았을까? 천곡기념관 게시판은 이들이 동인(김성일)과 서인(황윤길)으로 서로 붕당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동인은 임진왜란 책임, 서인은 병자호란 책임

요약하면, 서인 세력의 주장은 실제와 일치했다. 불과 1년 뒤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반면, 전쟁 발발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한 당시 집권 세력 동인은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도 김성일은 그 이후 경상도 초유사, 경상도 관찰사 등으로 일하면서 임진왜란 극복을 위해 열성을 바쳤는데, 2차 진주성 혈투를 앞둔 1593년 4월 29일 병으로 진중에서 사망했다.

묘소 아래의 송상현 신도비는 1659년(효종 10)에 세워졌다. 충청북도 기념물 66호.
 묘소 아래의 송상현 신도비는 1659년(효종 10)에 세워졌다. 충청북도 기념물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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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조선은 전쟁 발발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의 대규모 공격을 맞았다. 1592년 4월 13일 15만 명의 왜적이 부산 앞바다에 상륙하였고, 부산진과 동래성에서 정발, 송상현 등이 조총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한 왜적은 세 길로 북상하였다. 이일과 신립이 각각 상주와 충주에서 반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참패하고 20일 만에 한성이 함락되고 만다. 전쟁 발발 20일 만에 서울을 빼앗긴 것을 보면 부산 상륙 이후 일본군은 하루 평균 23km 가량씩 산책을 하듯이 걸어 남대문까지 갔던 셈이다.

결국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란을 가게 되고, 왜적의 북상은 계속된다. 그러나 명의 구원군이 합세하여 1593년 1월초 평양성을 탈환하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유격전으로 적의 보급로를 교란했으며,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의 수군이 바다를 통한 왜적의 작전을 완벽히 차단하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임진왜란 초기의 일방적 패배를 극복하고 전쟁의 흐름을 뒤집게 된 데에는 전국 곳곳에서 창의한 의병들,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 명나라 군대의 지원, 이 세 가지 힘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전쟁의 흐름을 역전시킨 의병, 수군, 명군의 활약

그 후 겨울이 닥쳐오자 영하의 기온을 접해본 적이 없는 왜군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결국 협상 끝에 일본의 주력군은 철수하고, 남은 일본군이 몇 년 동안 경상도 지방에서 질질 끄는 상황이 펼쳐지다가, 1597년 14만 병력이 다시 쳐들어오는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이번에는 일본 재침략군이 전라도 등 남부 지방을 석권하고,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1597년 7월 16일 칠천량에서 전멸시키면서 북진하게 되지만 점점 강해지는 반격과 이순신의 명량대첩 등으로 밀리다가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1598년에 이르러 7년간의 전쟁은 종료된다.

천곡기념관 내부의, 송상현의 유명한 말 '전사이가도난'과 아버지에게 보낸 절명시에 깃든 정신을 해설한 게시물
 천곡기념관 내부의, 송상현의 유명한 말 '전사이가도난'과 아버지에게 보낸 절명시에 깃든 정신을 해설한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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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진행된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에 큰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오히려 이익을 보았다. 천곡기념관 내부 '임진왜란의 영향' 게시물은 임진란이 3국에 끼친 영향을 나라별로 나누어서 해설해준다.

'조선에 끼친 영향'을 읽어보면 전쟁 이후 조선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싸움터였던 조선은 많은 사상자로 인구가 줄고, 가옥과 농지 등 막대한 재산의 손실을 가져왔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국보급의 문화재가 거의 불 타 없어졌으며, 많은 책과 공예·미술품들이 약탈되었다. 게다가 명과 청 사이에서 적당한 중립 외교 정책을 구사하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오로지 명만 떠받드는 태도를 보이다가 청의 침략을 받아 또 다시 나라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내쫓기 위해 명의 군사 원조를 받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숭명(崇明, 명나라를 떠받드는) 사상이 더욱 강화되어 (청을 배척한 끝에)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초래하는 결과를 자초했다.

'명에 끼친 영향'은 명 역시 전쟁 탓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왜란 전부터 당쟁과 내란으로 혼란했던 명나라는 전쟁이 끝나자 급속히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자성의 난과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조선과 명나라는 임진란 때문에 큰 피해, 일본은 이익

조선과 명이 전쟁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반면, 임진왜란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피해가 아니라 이익이었다.

'임진왜란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의 뛰어난 문화를 약탈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공예품, 인쇄술, 성리학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특히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에 의해 일본 도자기업은 획기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퇴계 이황의 계통을 이은 성리학은 일본의 대표적인 학문이 되었고, 금속활자 인쇄술이 일본으로 전래되어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에도 막부(幕府, 군사 정권)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송상현과 금섬, 이양녀, 그리고 송씨 가문의 두 열녀, 효부를 기려 세워진 정려각이 충렬사로 들어가는 마을길 입구에 세워져 있다. '청주여산송씨정려각'은 충청북도 기념물 151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이다.
 송상현과 금섬, 이양녀, 그리고 송씨 가문의 두 열녀, 효부를 기려 세워진 정려각이 충렬사로 들어가는 마을길 입구에 세워져 있다. '청주여산송씨정려각'은 충청북도 기념물 151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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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녀전


이양녀는 (금섬과 마찬가지로) 공(송상현)의 첩이다. 공을 따라 동래로 왔다가 적이 곧 쳐들어올 상황이었으므로 공이 서울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양녀는 길을 떠난 지 하루만에 부산성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양녀는 "차라리 지아비 곁에서 죽겠다"면서 다시 동래로 돌아왔다.

그러나 송상현은 이미 죽었고, 여종 만개, 금춘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풍신수길이 욕보이려 하자 이양녀는 죽기로 저항하였는데, 문득 풍신수길이 그녀를 의롭게 생각하여 풀어주었다. 그래서 전 관백의 딸 원씨와 별도의 집에서 거처하였다.

마침내 이양녀는 절개를 지켜 귀국하였다. 이양녀는 사로잡힐 때 공의 비단 갓끈을 가지고 갔는데, 항상 그것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금춘이 먼저 돌아가게 되었을 때 갓끈의 구슬 두 개를 빼어 주면서 "공의 부인이 만약 살아 계시거든 이것으로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삼도록 하라" 하였다.

나중에 이양녀가 귀국하여 부인과 그것을 서로 맞춰 보고 함께 통곡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 이 이야기는 신흠이 1612년(광해군 4) 이전에 쓴 것으로 여겨지는 '李良女傳(이양녀전)'으로,  그의 문집 <상촌집>에 실려 있다. 
천곡기념관에는 귀한 유물들이 많다. 나는 1596년 송상현의 묘소를 동래에서 이곳으로 이장할 때 위패와 혼백을 싣고 오는 데 사용했던 요여(腰輿)에 유난히 마음을 빼앗긴다. 그가 죽은 지 4년만에 타고 왔던 가마이다. 요여를 보고 있으려니, 그 뒤를 따라가며 울부짖었을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송상헌이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보내기 위해 쓴 혈서를 담고 있는 부채그림 '혈선도(血扇圖)'와, 7대손 송상휘가 1756년(영조 31) 윤봉구에게 부탁하여 만든 '혈선발(血扇跋)' 또한 동래읍성 전투의 처절한 역사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해준다. 물론 1658년(효종 9)에 동래부사 민정중이 그린 '동래부 순절도(東萊府殉節圖)'에도 눈길을 고정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1741년(영조 17)의 충렬공 시호 추증 교지와 의정부좌찬성 추증 교지, <천곡수필집(泉谷手筆集)> 필사본 1책, 1750년(영조 26)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임금이 제사 때 읽을 글로 쓰라면서 지어보낸 치제문(致祭文) 등의 유물들, 그리고 청주성 탈환도와 동래읍성 전투도 같은 기록화 앞에서도 한참 발길을 멈춘다. 현대 작품인 기록화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유산들이다.

충렬사 신사당 아래의 천곡기념관
 충렬사 신사당 아래의 천곡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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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사당 북서쪽에 송상현 묘소가 있다. 송상현 묘소 앞에는 이양녀의 헛묘와 금섬의 묘가 좌우로 자리잡고 있다. 묘소를 참배하려는 사람은 충렬사 입구 여산송씨정려각에서 왼쪽으로 1km 가량 구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된다. 1659년(효종 10)에 세워진 신도비가 흥덕구 수의동 산1-1 산비탈에 있고, 그 뒤로 가파른 계단이 묘소까지 이어진다.

충렬사 뒤편 1km 지점에 있는 송상현 공 묘역

본래 송상현의 묘소는 전사한 동래에 있었다. 1595년(선조 28) 부인 성주이씨가 맏아들 인급(仁及)을 시켜 왜적들의 점령지인 부산에 있는 공의 묘를 옮겨오게 해달라고 조정에 청원했다. 그래서 이듬해인 1596년 청주에 새 묘소를 마련하게 되었다. 새 묘소 자리는 선조와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선조는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진 두사충에게 송상현의 새 묘소 터를 보아줄 것을 부탁했고, 그 결과 지금의 자리가 최고의 명당이라는 답을 들었다. 이때 송상현과 금섬의 묘가 함께 만들어졌다.

이소사의 헛묘(왼쪽)와 금섬의 묘가 송상현 묘소 앞에 좌우로 나란히 놓여 있다.
 이소사의 헛묘(왼쪽)와 금섬의 묘가 송상현 묘소 앞에 좌우로 나란히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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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6년 뒤인 1622년, 부인 성주이씨가 타계했다. 그러나 비록 정경부인 교지를 받은 이씨였지만 남편의 옆에 묻히지는 못했다. 임금이 정한 묘역에 임의로 새 묘소를 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씨의 묘소는 충렬사에서 남쪽으로 1km 가량 떨어진 황구산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송상현 묘소 앞 오른쪽에 놓인 금섬 묘의 상석(床石, 제사용 돌)에는 '烈女韓召史金蟾之墓(열녀한소사금섬지묘)'가 새겨져 있다. 소사(召史)는 양민의 아내 또는 과부의 성씨 아래에 붙이는 호칭이므로, 비명의 뜻은 대략 '열녀 과부 한금섬의 묘' 정도로 읽힌다.

왼쪽 묘소 앞에는 '烈女李召史良女之壇(열녀이소사양녀지단)'이라는 작은 빗돌이 서 있다. 묘(墓, 무덤)가 아니고 단(壇, 제사를 지내는 제단)인 것은 이 무덤이 실제 묘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금섬의 묘비에 나란히 이름을 새겨 두었지만, 한 묘소에 두 여인을 함께 쓰는 법은 없다고 하여 따로 헛묘를 만들게 된 것이다.

지금 글 끝에 금섬과 이양녀의 묘소와 단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은, 무슨 이유로 본부인이자 정경부인인 성주이씨의 무덤만 홀로 떨어져 있는지 알고자 하는 분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한 사족이다.


태그:#송상현, #임진왜란,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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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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