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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동안 그가 내뱉은 온갖 파격적인 공약들. 이를테면 주한미군 철수나 한·일 핵무장 용인 같은 것들이 그렇게 쉽게 이행되지는 않겠지만, 미국 행정부의 색깔이 일정 정도 달라지리라는 것은 확실히 예상할 수 있다.

오바마나 트럼프 같은 아웃사이더들이 연달아 통치자 자리에 오르는 일은 주로 체제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다. 기존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을 때, 이런 아웃사이더들을 내세워 국가적 모험을 하는 예가 많다.

이렇게 위기 상황에서 등장하는 아웃사이더 지도자는 나라를 살릴 수도 있고 아니면 확실하게 망칠 수도 있다. 지금 미국은 트럼프를 앞세워 일대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이다.   

국가 존망 위기에서 '아웃사이더'가 등장한다

9일(미국 현지시각) 뉴욕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수락연설을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9일(미국 현지시각) 뉴욕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수락연설을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 연합뉴스·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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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도가 성공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바로, 서기 7세기 신라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패권쟁탈전으로 동아시아가 요동을 치고 백제 의자왕이 신라를 집중 공격하여 100여 개의 성을 빼앗는 상황 속에서 신라는 국가 존망의 일대 위기를 맞이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신라는 그때 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는 모험을 선택했다. 아웃사이더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여성인 선덕여왕에게 통치권을 맡기고, 비주류 왕족인 김춘추에게 외교를 맡기고, 가야 출신인 김유신에게 군사를 맡겼다. 이 모험의 성공으로 신라는 7세기의 위기를 넘겼음은 물론이고 고구려·백제의 멸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자기 조국한테 그런 선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가 아무리 '아메리카 퍼스트'를 추구한다 해도, 지금 미국의 국운이 상당히 불안하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의 위기는 그의 능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계 최대 무역로의 추이를 살펴보면, 그가 미국을 더 부강하게 만들기는커녕 도리어 쇠망의 길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초원길·비단길·바닷길의 위치.
 초원길·비단길·바닷길의 위치.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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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세계 역사에 등장한 최대 무역로를 순서대로 열거하면 초원길-비단길-바닷길이다. 이 길들은 인간과 상품과 정보를 글로벌 차원에서 이동시키는 최대 루트였다. 그리고 이 길에서 세계 패권이 창출되었다. 길에 대한 지배력을 통해 인간·상품·정보를 장악하는 민족이 세계 패권을 차지하는 게 세계사의 기본 패턴이었다.

동유럽에서 몽골까지 이어지는 초원길이 세계 최대 무역로였던 기원전 2세기까지는 초원길을 장악하거나 이와 가까운 민족이 세계 패권을 차지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말을 타고 초원길을 달릴 수 있는 유목민이 농경민이나 해양민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유지했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에 중국 한나라에 의해 중동과 중국을 잇는 비단길(사막길)이 개척되고, 이 길을 통한 인간·상품·정보의 이동이 초원길을 능가하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말이 달릴 수 없는 사막의 길을 통해 인간·상품·정보의 이동이 촉진되면서 농경민이 유목민에 대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이후로도 초원길은 여전히 사용되었고 이 길을 통해 유목민이 농경민을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주도권은 기본적으로 비단길과 농경민에 있었다. 

하지만 서기 16세기에 서유럽인들이 전 세계 바닷길을 하나로 통합하고 이 길을 세계 최대 무역로로 만들면서 상황이 또다시 바뀌었다. 이때부터는 바다를 잘 활용하는 민족이 세계 패권을 장악했다. 몽골처럼 바다와 멀거나, 한국·중국처럼 바다 옆에 있으면서도 바다를 활용하지 못하는 민족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 대신,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끝인 서유럽과 동쪽 끝인 일본이 세계적 차원의 바닷길을 통해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간결한 세계경제사>의 저자로 한국에도 알려진 미국 경제학자 론도 캐머런이 "16세기 이전만 해도 서유럽은 고립된 몇몇 지역의 하나에 불과했다"고 말한 것처럼, 또 세계적인 경제사 학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리오리엔트>에서 "19세기에 유럽 중심적 세계관이 발명되기 전, 그러니까 근세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은 아시아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말한 것처럼, 비단길 시대의 서유럽은 비단길과 너무 멀리 떨어진 까닭에 세계 2류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랬던 서유럽이 16세기부터 전 세계 바닷길을 헤집고 다니면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찾아낸 항로를 이용해 아프리카로 가서 노동력을 공짜로 착취하고, 아메리카로 가서 세계 화폐인 은을 강탈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돈으로 서유럽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무역을 하고 과학혁명·산업혁명을 이루다가, 19세기 중반에는 중국과의 아편전쟁에서 승리하여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지위에 올랐다.

서유럽에서 갈라져 나온 미국 역시, 바닷길을 이용해 서유럽과 더불어 세계 최강에 올랐다. 서유럽이 서유럽-아프리카-아시아 항로를 활용해 패권을 획득했다면, 미국은 태평양 항로를 활용해 그것을 차지했다. 처음엔 인디언과의 전쟁에 전력을 쏟던 미국은 1880년대에 이 전쟁이 일단락되자 1890년대부터는 서유럽을 모방해 바닷길 공략에 나섰다. 태평양 여기저기에 산재한 하와이·필리핀·괌·사모아·웨이크 등을 점령함으로써 태평양 바닷길을 자신의 길로 만든 것이다.

하와이왕국 국기 하강식. 1898년에 미국에 강점됐다는 상징적 표시로 거행된 의식이다.
 하와이왕국 국기 하강식. 1898년에 미국에 강점됐다는 상징적 표시로 거행된 의식이다.
ⓒ 위키피디어백과사전 영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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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뒤에 미국은 일본의 조선 강점을 돕는 조건으로 동아시아 해양지역 지배에 대한 일본의 협력을 얻어내고, 일본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뒤인 1921년에는 워싱턴회의를 통해 일본·영국·프랑스와의 협력 하에 태평양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세계패권 장악에도 바닷길 지배가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같은 바닷길에 대한 지배력을 기반으로 미국은 경제적 의미의 세계 최강에 오른 데 이어, 1945년에는 정치적 의미의 세계 최강에도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로 바닷길에서 중대한 사정변경이 생기고 있다. 이 변화로 인한 악영향은 미국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가 미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 바닷길을 지배한 양대 축은 서유럽(영국·프랑스 등)과 미국이었다. 그런데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서유럽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양대 축의 지배가 불안정성을 보이고 있다. 서유럽의 위상 변화는 바닷길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이런 위상 변화가 서유럽의 약화는 물론이고 양대 축의 동반 약화까지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중반부터 바닷길에서 나타난 중대한 사정변경은 서유럽에 대한 도전이 드세졌다는 점이다. 서유럽-아프리카-아시아 항로에서 서유럽에 대한 도전이 강해진 것이다. 아프리카는 제3세계로 똘똘 뭉치고, 중동은 미국과 서방세계에 도전하고, 동아시아는 해상무역을 통해 서유럽의 경제력을 잠식했다. 거기다가 이 길의 동쪽 끝인 동아시아에서 1960년대에는 중국이, 1990년대 이후에는 북한이 핵무장 카드를 들고 나와 미국과 서방세계를 곤혹스럽게 했다. 

서유럽-아프리카-아시아 항로에서는 또 다른 문제점이 생겼다. 과거에 서유럽인들이 안정적으로 관리하던 이 항로는 오늘날 해적의 온상이 되고 있다. 아프리카 서해안의 토고 및 나이지리아 해역, 아프리카 동부의 소말리아 해역, 홍해, 방글라데시 해역, 말레이시아 및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해적 출몰이 잦은 것은 이곳들에 대한 서유럽의 통제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닷길에 대한 서유럽의 지배력이 약해짐에 따라 미국-서유럽 협력체제에 기초한 세계 지배 시스템이 위협을 받고 있다. 이것은 트럼프의 나라가 행사하던 세계 지배권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동아시아와의 협력, 그게 트럼프가 살 길

이런 상황에서, 태평양 서쪽 연안의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이 바닷길의 한쪽 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과거에 서유럽이 차지했던 양대 축의 한쪽 자리를 동아시아 국가들이 메워 가고 있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태평양시대라는 것은, 동아시아가 바닷길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로 급부상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향후 미국이 세계 패권을 이어가자면, 동아시아와의 협력체제를 새로이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협력체제라는 것은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인 관계, 차별적이 아닌 대등한 관계에 기초한 동반자적 협력체제를 말한다. 이런 체제를 구축하지 못하면, 미국은 바닷길에 대한 지배력을 계속 이어갈 수도 없고 세계 패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도 없다.

하지만, 미국은 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제껏 핵우산과 MD(미사일 방어체계)를 앞세워 동아시아를 통제하거나 압박해왔으니, 동아시아와 새로운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다가 문화적·인종적 불일치도 협력체제 구축에 방해가 되고 있다. 서유럽과 달리 동아시아는 미국과 이질적인 지역이다. 그래서 미국 입장에서는 동아시아를 바닷길의 새로운 파트너로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 패권을 이어간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동아시아 침탈을 기반으로 부강해진 미국이, 동아시아를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트럼프는 유세 과정에서 한미동맹이나 미일동맹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동아시아와의 협력은 안중에도 없는 듯이 떠들어댔다. 물론 대통령 취임 후에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머릿속에는 동아시아와의 협력에 필요한 마인드가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니 트럼프 집권 이후에는 미국의 세계패권이 한층 더 약해질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위기의 미국을 구할 가능성이 낮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의 미국이 핵우산과 MD를 앞세워 동아시아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는 한편, 동아시아에 대한 기존 정책을 폐기하고 동아시아를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한다면, 동아시아와의 협력체제를 기초로 태평양 바닷길을 포함한 전 세계 바닷길에 대한 지배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가 이제껏 했던 말들을 죄다 주워 담고 미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전향적인 동아시아 정책을 지향한다면, 기울어가는 미국을 되살리는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도 있을 것이다.


태그:#도널드_트럼프, #미국_대선, #바닷길, #패권,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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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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