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금요일 저녁, 딸아이를 기숙사에서 데려오는데 차를 타자마자 뒷자석에서 연신 떠들어댑니다.

"아니, 아빠! 어떻게 일주일 사이에 나라가 쑥대밭이 될 수 있어?! 이게 가능한 일이야? 지금 우리반 애들 난리야."

이런....

화보다는 어이없음 어조입니다. 냉기마저 서려 있습니다. 녀석이 여기저기 줏어들은 얘기를 불편한 기색으로 그저 들어야만 했습니다.

지난주 내내 가는곳마다 언론에서 흘러나온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속에 비아냥도 있고, 허탈감도 보이고, 답답함을 넘어 자괴감섞인 울분도 들립니다. 지금 드러난 일은 빙산의 일각이라고도 합니다. 이 사태가 어떤 모양으로 번져갈지 나라 안팎에서 귀추가 주목됩니다. 

딸아이의 어이없음에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녀석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기자를 했던 적이 있어. 주로 인물 취재를 하러 다녔고, 우연한 기회에 앞서가신 노무현 님을 뵌 적이 있지. 그분이 몇 번의 고배 끝에 98년 7월 종로 보궐선거에서 승리하고 이듬해 봄이었으니 네가 첫돌이 안됐을 때구나. 몇가지 질문 중에 꼭 듣고싶은 대답이 있었는데 그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까지 무슨 힘으로 살아오셨습니까?"

간단치 않은 물음이었던지 그분은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저만치 놓인 재떨이를 앞에 가져다 놓으시고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으셨어. 절반 즈음 태우셨을까,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어떤 순간에도 역사는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제가 여지껏 살아온 힘인 것 같습니다."

그 투박한 음성이 지금 생각나는 것은 아빠도 그것을 믿고 싶기 때문이야. 대한민국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끝없는 탐욕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지 않아. 자신의 잇속을 채우느라 온 나라 강바닥을 다 파헤쳐 이 산하를 신음하게 하는 사람이나,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온 국민의 평화와 번영을 책임져야 하는 엄중한 자리인지를 도무지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대한민국이 나아가고 있지 않아. 

만일 이 나라가 그들 손에 달려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서지 못했을 거야. 저 한줌도 안되는 사리사욕에 눈먼 자들의 손에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면 너희는 지금 학교에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못배웠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고갯길을 오르는 노인의 리어카를 밀어주는 따뜻한 손이,
나와 남이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서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그 마음들이,
국가의 폭력에 쓰러져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드리고자 밤을 지새우는 그 마음들이,
자식을 바다에 묻고 아파하는 가슴을 부둥켜안은 그 마음들이,
시린 바람에 촛불이 꺼질세라 청계광장을 불밝힌 그 손길들이,
이 참담한 지경에 참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뇌하는 지성들이,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정직하게 땀흘려 일하는 그 사람들이

모여모여 대한민국을 일구어왔고 이끌어갈 것이란다.

벌써부터 국가와 사회에 냉소를 가진 고3 딸아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진실은 그 빛을 스스로 드러낸다는 것을.

오늘 새벽 거리의 어둠입니다. 곧 동이 틀 것입니다.
▲ 어둠 오늘 새벽 거리의 어둠입니다. 곧 동이 틀 것입니다.
ⓒ 전경일

관련사진보기




태그:#국가, #진실, #쑥대밭, #노무현, #역사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