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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직장일로 몹시 우울한 날이었다. 가까이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의 "놀러 와" 하는 한 마디에 바로 달려갔다. 나는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장난감들을 대충 발로 밀어내 누울 공간을 마련하고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내가 '교활한' 직장 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마구 늘어놓자, 친구는 먹다 남은 음식을 정리하고 그릇을 설거지 통으로 옮기며, "나도 3년 넘게 '미친X' 밑에서 일하느라 갑상선 병까지 얻었잖아"라고 이야기를 했다. 결국 직장생활이란 누가 오래 버티느냐의 싸움이란 씁쓸한 결론을 내렸다.

한참 떠들고 나니 배가 고팠다. 친구가 점심을 차리겠다고 했다. 사실 나는 외식을 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음...... 친구의 음식이 내 입맛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처음 해봤다는 시금치나물을 먹어보니, 너무 오래 데쳐 흐물흐물한 데다 물기를 덜 짜 질척하고 마지막에 참기름 대신 올리고당을 넣어 무척 달달했다. 어떤 요리를 하든 기존의 레시피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 그야말로 개성 넘치는 맛이 난다.

내가 대답을 얼버무리는 사이 친구는 벌써 요리를 시작했다. 매캐한 냄새가 퍼져왔고 내 심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식탁에 오른 것은, 아! 말로만 듣던 두부찌개!

친구가 만든 두부찌개엔 두부,고춧가루,식용유,마늘,파 이외엔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조미료 한 숟가락을 빼곤.
 친구가 만든 두부찌개엔 두부,고춧가루,식용유,마늘,파 이외엔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조미료 한 숟가락을 빼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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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친구가 결혼준비를 할 때였다. 시어머니가 친구에게 부탁을 하더란다. '우리 아들'이 두부찌개를 무척 좋아하는데, 결혼을 하면 나를 '대신해' 두부찌개를 꼭 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전문직을 가진 직장인으로, 살림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다. 친구나 남편이나 요리와 살림 실력은 비슷비슷했다. 그런데 두부찌개를 친구에게 '부탁'하며 레시피까지 '친절히' 알려주더라는 것이다.

레시피는 간단했다. 냄비에 고춧가루와 기름을 넣어 볶다가 물을 붓고 두부, 마늘, 파를 넣으면 끝. 육수도, 채소도 들어가지 않는, 도무지 맛있을 것 같지 않고 맛있을 리 없는 레시피였다. 시어머니의 '부탁'도, 레시피도, 모두 어이가 없다며 흥분하는 내게 친구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며 해맑게 웃었다.

결혼 후 두부찌개를 끓였는데 역시나, 시어머니가 해주던 그 맛이 아니었다. 몇 번을 해봐도 그랬다. 결국 시어머니에게 다시 요리법을 묻자 돌아온 대답은 "조미료 안 넣었어?"였단다. 두부찌개의 맛이 완성된 순간이다.

바로 그 두부찌개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국물이 아주 새빨간 것이 보기만 해도 속이 얼얼했다. 무조건 매워야 남편이 잘 먹는단다. 한 숟갈 맛을 보니 고춧가루와 마늘을 많이 넣어 무척 얼큰했다. 아주 맛있다고 할 순 없지만, 자꾸 당기는 맛이다. 역시 조미료의 힘이란!

"요즘도 해 줘?"
"미울 때는 안 해주다가 그래도 가끔은 해 줘."
"직접 해먹으라고 하지?"
"카레랑 감자볶음 같은 건 잘 하는데 두부찌개는 절대로 안 해먹더라고."

시어머니의 바람대로 친구는 두부찌개 하나는 남편 입맛에 맞게 제대로 끓이게 됐다.

살림과 육아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던 친구는 작년부터 재택근무를 신청하고 1년 동안 아이에게 줄 밥과 반찬을 매일같이 만들었다. 올리고당을 넣은 시금치나물도 그렇게 탄생했다. 매 끼니를 때우는 노동은 누구에게나 만만한 것이 아니다. 가끔 축제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어쩔 땐 전쟁 같기도 하고, 대부분은 귀찮고 고된 반복적인 노동일 뿐이다.

즐거움과 보람만으론 절대 이어갈 수 없는, 대단히 많은 정신에너지와 몸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집밥'을 먹는 사람이라면, 이 노동을 기꺼이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성의 일'이 아닌.

나는 두부찌개 한 냄비를 모조리 비우고 말았다. 엄청난 포만감과 함께 씁쓸함이 밀려왔다. 씁쓸한 이유? 아, 그게, 친구가 다진 마늘을 너무 많이 넣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절대로!

친구가 만든 새빨간 두부찌개. 정말 빨갛다.
 친구가 만든 새빨간 두부찌개. 정말 빨갛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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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단짠단짠 그림요리, #요리에세이, #두부찌개, #조미료, #집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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