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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에 말안장처럼 푹 내려앉은 부분이 노루재이다. 울진에서 이 고개를 넘어오면 안동으로 가고, 안동에서 이 고개를 넘으면 울진으로 가게 된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에서 남하하여 울진까지 온 후 이 고개를 넘어 안동으로 침공하려 했지만 봉화의병군에 막혀 발길을 돌렸다.
 가운데에 말안장처럼 푹 내려앉은 부분이 노루재이다. 울진에서 이 고개를 넘어오면 안동으로 가고, 안동에서 이 고개를 넘으면 울진으로 가게 된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에서 남하하여 울진까지 온 후 이 고개를 넘어 안동으로 침공하려 했지만 봉화의병군에 막혀 발길을 돌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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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26일, 내성(봉화)의병군 600명은 침입해오는 일본군 3천여 명을 격퇴하기 위해 출정했다. 내성의병군은 봉화 쪽에서 울진 방향으로, 내륙에서 바다를 향해 동진(東進)하며 노루재를 넘었다.

의병군의 행군로가 상식에 맞지 않다. 상식은, 일본군은 남에서 북으로 진군한 침입군이다. 적들은 부산에서 한양으로, 다시 평양과 함경도로 갔다. 그러므로 일본군은 상주에서 안동을 거쳐 동진하여 봉화로 침입해야 상식에 부합한다. 즉, 일본군과 맞서 싸우려는 내성의병은 적들과 반대 방향으로 행군해야 하므로 서진(西進)이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의병들도 동쪽으로 갔다?

침략군과 의병군이 나란히 동쪽으로 이동했다면, 의병군은 적들을 뒤에서 습격하기 위해 그렇게 움직인 것일까? 아니다. 상식과 다르게, 일본군은 동해를 등진 채 서진하여 봉화로 쳐들어 왔다. 이 일본군은 한양에서 강원도로 진입한 후 원산에서 해안선을 타고 내려온 남하(南下) 침입군이었다. 그들은 삼척을 거쳤고, 이윽고 울진에 닿은 후 일부는 계속 남진(南進)하여 영해로 가고, 나머지 일부는 태백산맥을 넘어 안동을 향해 서진했다. 그래서 봉화 의병군이 동진을 했던 것이다.

강원도에서 내려와 안동 방면으로 공격해온 일본군

의성군 봉양면에 있는 오봉종택으로, 임진왜란 당시 안동부사와 안동판관이 도망가고 없을 때 예안현감으로서 지역을 잘 방위했던 신지제를 기려 세워진 집이다. 종택 뒤에 신지제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신지제는 뒷날 의병을 일으켜 팔공산 일대에서도 활약을 펼쳤다.
 의성군 봉양면에 있는 오봉종택으로, 임진왜란 당시 안동부사와 안동판관이 도망가고 없을 때 예안현감으로서 지역을 잘 방위했던 신지제를 기려 세워진 집이다. 종택 뒤에 신지제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신지제는 뒷날 의병을 일으켜 팔공산 일대에서도 활약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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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본군도 처음부터 동해 쪽에서 안동 방향으로 침입할 계획이었던 것은 아니다. 1592년 4월 25일 상주 북천전투에서 이일의 조선 중앙군을 진압한 일본군은 한양을 바라보며 내달렸지만, 그 후 일부 병력을 보내 안동을 점령하려 했다. 안동을 향해 진격해온 적은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일부였다. 그러나 적들은 경상좌병어사 성응길의 조선군을 뚫지 못하고 다인(의성군 다인면) 쪽으로 물러갔다.

당시 안동의 지휘부는 이미 붕괴된 상태였다. 울산의 경상좌병영으로 출동했던 부사 정희직은 그 후 안동으로 돌아왔지만 청송으로 피란을 떠나버렸고, 그 이후 복귀한 판관 윤인성도 군사를 모으는 데 실패하자 풍기 쪽으로 달아나버렸다. 다만 예안현감 신지제(申之悌)만은 자리를 굳게 지키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성응길과 신지제의 분투에 힘입어 당분간 안동 일원은 적의 치하에 들어가지 않고 안전 지대로 남았다. 그래서 상주 선비 조정의 <임란일기>에는 그 가족들이 안동으로 피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적들이 안동 일원을 계속 가만히 놔둘 리는 만무했다. 그 무렵,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조선 8도를 분할 점령한 뒤 곳곳에서 군량과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로 결정했다.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은 평안도, 가등청정은 함경도,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은 전라도...... 식으로 적들은 분할 통치할 지역을 분담하였다. 경상도는 모리휘원(毛利輝元, 모리 데루모토)이 맡았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군들이 다녔던 노루재 정상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탓에 지금은 잡목과 넝쿨들로 뒤얽혀 사람 통행이 불가능해졌다. 사과밭 사이로 산 능선이 낮게 내려앉은 지점이 아득한 옛날의 고갯길 부분이다. 막힌 곳에서 150미터가량 더 나아가면 다시 길이 나타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군들이 다녔던 노루재 정상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탓에 지금은 잡목과 넝쿨들로 뒤얽혀 사람 통행이 불가능해졌다. 사과밭 사이로 산 능선이 낮게 내려앉은 지점이 아득한 옛날의 고갯길 부분이다. 막힌 곳에서 150미터가량 더 나아가면 다시 길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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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6월 22일에 이르러 적들은 안동에 난입했고, 7월 8일에는 예안도 함락되었다. 하지만 조선군과 의병들은 그 이튿날인 7월 9일 예안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19일에는 안동에서도 내쫓았다. 그리고 다시 일본군이 공격해온 때가 바로 7월 하순, 강원도에서 남하해 온 삼길성(森吉成, 모리 요시나리)의 일본군 4군의 침입이었다. 그래서 적들은 동해 쪽에서 몰려 왔고, 이를 막기 위해 봉화 의병군은 노루재를 넘었던 것이다.

봉화의 류종개, 임흘, 김중청, 윤흠신과 그의 아우 윤흠도, 김인상, 김성일의 조카 김철, 권경 등 600의병들은 노루재 일원에 매복한 채 적들을 기다렸다. 3천 명이나 되는 일본군은 조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인 데 반해 아군은 무기도 변변하지 못한 농민군이었지만, 죽음을 불사하는 의로운 기운 하나만은 우리 의병이 적들보다 훨씬 드높았다.

'1. 북소리를 들으면 나아가 싸우고, 징소리를 들으면 싸움을 그쳐야 한다. 2. 북소리가 끊이지 않으면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으며, 함부로 물러서는 자는 벨 것이다. 3. 징소리가 두 번 울린 연후에 후퇴할 것이요, 후퇴에 늦은 자는 벨 것이다. 4. 군대의 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벨 것이다. 5. 늦게 모이는 자는 벨 것이다. 6. 사사로이 민간의 물건을 취하는 자는 그것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벌을 줄 것이다. 7. 군령을 따르는 자는 상을 줄 것이고,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벌을 줄 것이다.'

일곱 가지 군령 아래 훈련을 해온 내성의병군이었다. 게다가 이 의병군을 제외하면 노루재로 출동하여 적과 맞서 싸울 만한 군대가 달리 존재하지도 않았다.

도로를 따라가서 만나는 노루재의 정상. 지금은 이 도로 아래로 터널로 차량들이 다니기 때문에 아주 한적한 길이 되었다. 그래서 노루재 정상을 알리는 간판도 땅에 내려져 있는 광경이 사진으로도 확인된다.
 도로를 따라가서 만나는 노루재의 정상. 지금은 이 도로 아래로 터널로 차량들이 다니기 때문에 아주 한적한 길이 되었다. 그래서 노루재 정상을 알리는 간판도 땅에 내려져 있는 광경이 사진으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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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6일, 이윽고 첫 전투가 벌어졌다. 적의 선봉대가 앞서 나타났다. 매복하고 있던 내성의병군은 적들을 기습하여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적은 많고 우리는 적었다. 7월 28일, 적의 본대가 몰려왔을 때는 이미 중과부적이었다. 600명 아군은 1600명이나 되는 왜적을 척살했지만 결국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군사를 잃은 일본군은 분풀이를 하느라 류종개, 윤흠신, 윤흠도, 김인상, 권경 등 전사한 아군 장수들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머리를 하늘에 매달았다. 아직 죽지 않은 아군은 불로 몸을 지졌다.(<삼강행실사적>)' 왜적이 물러간 뒤 김인상의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어서 자신이 지어주었던 옷으로 겨우 분별해 장사를 지냈다.

봉화의병 600명은 일본군 3000명을 맞아 1600명을 척살하는 전과를 올리지만 끝내 중과부적으로 모두 순국했다. 600의총이라는 이름으로 사당 충렬사 뒤에 만들어져 있는 봉화의병군 합동 묘소가 반쯤 햇살을 받은 채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봉화의병 600명은 일본군 3000명을 맞아 1600명을 척살하는 전과를 올리지만 끝내 중과부적으로 모두 순국했다. 600의총이라는 이름으로 사당 충렬사 뒤에 만들어져 있는 봉화의병군 합동 묘소가 반쯤 햇살을 받은 채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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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노루재를 지킨 봉화의병군의 사흘에 걸친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결코 허망한 전몰은 아니었다. 아니, 봉화의병군의 사흘에 걸친 장렬한 전투와 죽음은 그 이후 경상북도 북부 지방을 지켜내는 밑거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향후 경상도 전역의 전쟁 흐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천 군대 중 절반인 1600명을 노루재에서 잃은 일본군은 전투력이 급감했고, 사흘 동안의 시간을 번 덕분에 1천여 명의 군대를 조직하는 등 전투 준비를 갖춘 안동의 안집사 김륵 등을 누를 여력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영해로 내려간 일본군도 영해부사 한효순, 군관 장립, 박언국 등의 활약에 막혀 더 이상 남쪽으로 진군하지 못했다. 결국 왜적들은 경상도 북부 일원에 대한 침범을 포기한 채 강원도로 돌아갔고, 강원도 내륙 깊숙한 곳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다.

겨우 살아남은 임흘 등 봉화의병군 재건하여 다시 활약

노영구는 논문 <임란기 봉화 소천 지역의 전투와 항쟁 활동>에서 '소천 전투와 이어지는 방어전의 성공으로 경상도 북부 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침공이 좌절되면서 이 지역은 안정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안동 일원의 연합 의병 부대인) 안동별읍향병(安東別邑鄕兵)과 같은 대규모 의병부대를 조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면서, 봉화의병군의 전투와 전몰이 가지는 의의에 대해 '임진년(1592) 연말부터 경상도 북부 지역 의병과 관군은 상주의 당교 등 일본군의 주요 거점에 대한 공세에 나서 일본군을 크게 압박하여 성과를 내었다. 결론적으로 소천전투를 계기로 일본군의 경상도 북부 지역 장악은 불가능해졌고, 이 지역을 발판으로 한 조선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경상도에서 크게 위축되었다'라고 높게 평가했다.

노루재 아래를 흐르는 소천은 1592년 봉화의병군이 일본군을 맞아 싸운 전투 장소의 한 곳으로, 뒷날 소천면의 이름이 되었다. 소천은 소천면소재지와 2011년에 조성된 봉화임란의병전적지 사이를 흐른다.
 노루재 아래를 흐르는 소천은 1592년 봉화의병군이 일본군을 맞아 싸운 전투 장소의 한 곳으로, 뒷날 소천면의 이름이 되었다. 소천은 소천면소재지와 2011년에 조성된 봉화임란의병전적지 사이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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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임흘과 김중청 등은 그 후 의병부대를 재건했다. 대장 임흘, 좌부장 김용(김철의 형), 우부장 이화, 참모 김중청 등으로 구성된 2차 의병군은 상주 당교 전투에 참전하는 등 큰 활약을 펼쳤고, 전후 복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내성의병군의 행군로를 따라 노루재를 넘으면, 고개가 거의 끝나가는 곳에서 '임란 의병 전적 기념비'를 만나게 된다. 도로가 급하게 굽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로 운전에 집중하다 보면 발견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기 아주 십상인 지점이다.

기념비 둘레에 아홉 기의 돌탑이 쌓여 있어 특별히 이채롭다. 물론 돌탑들은 오가는 나그네들이 쌓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이곳 돌탑들은 기념비를 건립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노루재 전투 때 전몰한 선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추모탑들이다.

1985년에 조성된 노루재의 임진왜란 당시 봉화의병군을 기리는 전적지의 모습. 핵심 현창 시설은 전적기념비이지만 주변에 충혼탑 격으로 돌탑들을 세워놓아 답사자들에게 이채로운 느낌을 제공한다.
 1985년에 조성된 노루재의 임진왜란 당시 봉화의병군을 기리는 전적지의 모습. 핵심 현창 시설은 전적기념비이지만 주변에 충혼탑 격으로 돌탑들을 세워놓아 답사자들에게 이채로운 느낌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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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앞에 세워져 있는 '전적지 안내'라는 제목의 안내판을 읽어본다. 본문의 첫 문단은 '이 화장산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우리 향토 의병들이 왜적들과 대혈전을 전개한 전적지이다. 삼척 일대를 유린한 왜병은 봉화를 거쳐 영남 지방의 내륙으로 침투하려고 하였다. 음력 7월 28일 창의대장 류종개 이하 600의병은 이 산에 진을 치고 적 선발대를 맞아 싸워 모두 섬멸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적장 모리 요시나리의 본대 3천을 맞아 싸운 우리 의병은 결사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산화하였다'이다.

600명이 3천 명 대적했지만 처음에는 대승 거둬

첫 문단에서 노루재 전투의 개요를 설명한 안내판은 이어 '뒷날 나라에서는 창의대장 류종개를 예조참의로 추서하고 김인상, 윤흠신, 윤흠도 형제와 함께 정려를 내렸다. 이때에 순국한 의병들은 그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채 이곳에 잠들었으므로 나라에서는 감관(監官, 감독하는 관리) 1인과 산직(山直, 무덤을 지키는 사람) 12인을 지정하여 선열들의 영혼을 위로한 바도 있었다'라고 해설한다. 노루재 전투에서 전몰한 선열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현창 사업에 대한 해설이다. 

안내판의 마지막 문단은 '40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이곳에 봉화 군민의 뜻을 모아 기념비를 세우고 정성어린 돌을 하나씩 올려 북두칠성형의 적석봉(積石峰, 돌로 쌓은 봉우리)을 쌓았다'라고 건립 내력을 소개한 뒤 '매년 추념제(追念祭, 추모하는 제사)를 올리고, 이곳을 봉화 제일의 성역지(聖域地, 성스러운 땅)로 보존해 나갈 것이다' 하고 각오를 밝힌다.

노루재를 넘어 거의 소천면 소재지가 눈에 들어오는 지점에 닿으면 전적기념비와 추모탑 격인 돌탑들을 볼 수 있다. 1985년에 조성된 이 전적지는 2011년 새로, 크게 조성된 소천면의 전적지에 앞서 만들어진 임란의병 현창시설이다. 사진은 전적기념비 앞면에 부착된 동판에 새겨져 있는 비명을 찍은 것이다.
 노루재를 넘어 거의 소천면 소재지가 눈에 들어오는 지점에 닿으면 전적기념비와 추모탑 격인 돌탑들을 볼 수 있다. 1985년에 조성된 이 전적지는 2011년 새로, 크게 조성된 소천면의 전적지에 앞서 만들어진 임란의병 현창시설이다. 사진은 전적기념비 앞면에 부착된 동판에 새겨져 있는 비명을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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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와 돌탑들이 세워진 때는 1985년이다. 그 이후 2011년, 이곳의 기념비와 돌탑만으로는 내성의병군을 제대로 기릴 수 없다고 생각한 봉화 사람들은 고개 아래 소천면 소재지에 '봉화 임란 의병 전적지'를 크게, 새로 조성했다. 사당인 충렬사는 물론, 기념관, 전사청, 외삼문, 내삼문, 관광안내소 등을 두루 갖춘 웅장한 면모를 뽐내는 전적지이다. (관련 기사 <임진왜란 중 일본군 침입 없었던 '복받은 땅'> 참조)

그에 비하면 이곳에는 기념비와 돌탑들밖에 없으니, 기념비 받침석 앞면에 붙어 있는 동판의 노루재 전투 기록문과 뒷면 동판에 새겨져 있는 물암(勿巖) 김융(金隆)의 한시와 번역문을 공들여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전투의 경과에 대한 앞면 동판의 내용은 안내판의 것과 중복되는 측면이 있으므로 여기 재수록하는 것을 생략하고, 뒷면 동판의 시 중 국역시만 옮겨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주먹을 불끈 쥐어 튼튼한 배짱을 믿었노라
비바람 속의 한 칼은 새털같이 가벼운데
장한 기개는 충혼을 따르지 않을 건가
백봉천길 깊은 골에 성난 물결소리 울렸어라

이제, 27세의 나이로 죽음의 전투에 참전했던 청년 김중청이 남긴 글의 한 대목을 되새겨 보는 것으로 노루재 답사를 마칠까 한다.

"그저 덤덤하게 사는 것은 의리에 죽는 것보다 못하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다 죽으면 그만이다."


태그:#노루재, #봉화임진란의병전적지, #류종개, #임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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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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