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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치오 만치니 교수
 에치오 만치니 교수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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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관습과의 고리를 끊고 더 나은 현실을 상상하고, 이를 어떻게 실현시킬지 생각하는 것이 디자인 행위다."

'사회혁신을 위한 디자인' 분야의 세계적 석학 에치오 만치니 명예교수(밀라노공대)는 우리 시대의 디자인을 이렇게 정의했다.

에치오 만치니 교수는 오랜 세월 더 나은 사회,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디자인(또는 전문 디자이너)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실천해온 학자이자 디자이너, 또 사회혁신가다. 한국에선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지난 5월 번역 출간된 그의 책 <모두가 디자인하는 사회>(원제 'Design, When Everybody Designs')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제법 긴 추천의 글을 썼을 만큼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오는 18일부터 3일간 열리는 '미래혁신포럼'(서울시 주최)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에치오 만치니 교수를 16일 오후 3시 서울 중구에 위치한 더플라자 호텔에서 만났다.

국가와 시장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온갖 사회적 난제들과 맞닥뜨린 오늘, 디자인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이들이 늘고 있다. 최근엔 박근혜 정부도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에 큰 관심을 보일 정도니,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디자인의 '혁신 잠재력'에 기대를 걸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일찍이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에 눈떴던 에치오 만치니 교수는 뒤늦게 디자인에 눈을 돌리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들려줄 수 있을까. 

그는 디자인에 대해 "늘 해오던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라며, "사회혁신의 흐름과 의미있는 사례를 남들보다 빠르게 인식하고, 그러한 사례가 사람들에게 더 쉽게 받아들여지고 지속가능하도록 기술을 활용하는 게 디자인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또 "지난 세기에 기술혁신이 디자인의 자극제가 되었다면, 21세기에는 사회혁신이 디자인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는 최근 20년 사이 가난한 이들의 운송수단으로 취급받던 자전거가 가장 똑똑한 운송수단으로 탈바꿈했다며, 이 변화 역시 디자인과 관련돼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자전거 주차장, 공유자전거와 결제 체계, 자전거도로 등 변화에 영향을 미친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디자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 그는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택에 직면하는지는 100년 전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디자인 능력은 더 절실해질 것"이고, "앞으로 가야할 길은 '전통적 여정'과 전혀 다른 길"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끝으로 그는 "지방정부(서울시)가 나서서 사회혁신의 흐름을 주도하는 일은 흔치 않다"라며 "지금의 좋은 분위기가 유지되도록 노력하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에치오 만치니
 에치오 만치니
ⓒ 윤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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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활동의 목표는 사회혁신"

- <Design, When Everybody Designs>를 출간하신 지 약 2년이 지났다. 당시 책의 서론에서 우리 시대를 "지속가능성을 향해 변화하고 있는 과도기적 세상"이라고 규정하고, 이 책을 "과도기적 세상 속 디자인과 사회 변화에 관한 책"이라고 썼다. 이런 시대에 디자인을 새롭게 정의한다면 어떻게 정의하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 의미를 채워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의미를 채우는 과정은 같지 않다. 크게 두 가지 다른 선택이 있는데, 하나는 관습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디자인적 방식이다.

관습적 방식은 간단하다. 늘 해오던 방식대로 하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 관습을 따르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도 나름의 지혜가 담겨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늘 하던 방식대로는 더 이상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지 못하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필요한 게 '디자인 방식'(design mode)이다. 늘 해오던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이런 디자인 방식은 세 가지 능력으로 이뤄진다. 현실을 바라보는 비판적 감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창의력 그리고 무언가를 현실화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을 찾는 현실감각 등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기존 관습과의 고리를 끊고 더 나은 현실을 상상하고, 이를 어떻게 실현시킬지 생각하는 것이 디자인 행위인 것이다."

- 당신은 "기술적 혁신을 인식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제품과 서비스로 만드는 일"이 디자이너의 전통적 역할이라고 하면서, 사회혁신을 위해선 그 반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금 더 설명해 달라.
"대개 사람들이 말하는 디자인은 기술의 혁신에서 출발한다. 가구를 예로 들자면, 신소재가 개발되었을 때 이를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혁신을 위한 디자인은 그 반대다.

사회혁신의 흐름과 의미있는 사례를 남들보다 빠르게 인식하고, 그러한 사례가 사람들에게 더 쉽게 받아들여지고 지속가능하도록, 나아가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기술을 활용하는 게 디자인의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세기에 기술혁신이 디자인의 자극제가 되었다면, 21세기에는 사회혁신이 디자인의 자극제가 될 것이다. 또한 점점 더 많은 디자인 활동의 목표가 사회혁신에 맞춰질 것이다."

'모두가 디자인하는 시대'
 '모두가 디자인하는 시대'
ⓒ 안그래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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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책에서 디자인이 사회 문제의 해결 못지않게 새로운 '의미의 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서도 조금 더 설명해 달라.
"최근 20년간 유럽과 미국, 또 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자전거의 가치가 새롭게 발견되고 정의되었다. 그저 자동차를 가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타는 운송수단으로 취급받던 자전거가 지금은 가장 똑똑한 운송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돈도 적게 들고, 친환경적이며, 건강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이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디자인과도 관련돼있다. 새로운 자전거 주차장, 공유자전거와 결제 체계, 자전거도로 등이 새롭게 디자인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디자인이다."  

- "'우리 모두는 디자이너다'라는 말은 더는 가능성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좋든 싫든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되었다"고 했다. 어떤 뜻인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디자이너라고 인식할 필요는 없다. 나는 가수가 아니지만 샤워할 때 노래를 한다. 마찬가지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나 디자인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디자인은 앞서 설명했듯이, 관습적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문제가 있고 선택지가 있을 때, 내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디자인 행위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택에 직면하는지는 100년 전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당시엔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가까운 미래엔 더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디자인 능력은 더 절실해질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길은 '전통적 여정'과 전혀 다른 길이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 대해서도 우리는 어떤 도시를 만들지 상상할 수 있다. 전에는 시장이 행정가들이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우리가 상상해야만 한다."

- 한국에선 '리빙랩(Living Lab)'이 이제 막 첫발을 떼었다. 서울혁신파크도 주택가 골목길의 주차난 해결을 위한 실험을 비롯해 몇 가지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의 리빙랩에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리빙랩은 미국에서 시작했고 당시엔 굉장히 '기술 중심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럽의 리빙랩은 새로운 기술의 적용보다는 다양한 사회 문제의 해결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본다. '리빙랩'이란 이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든 이해관계자, 특히 최종 사용자가 포함돼있는가, 또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이다. 그런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또 개인과 공동체, 행정기관과 기업 등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존재 방식 및 행동 방식을 디자인할 수 있도록 지식의 생산과 확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낡은 사고와 행동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사회적 학습의 과정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 전체를 사회기술적 실험이 진행되는 하나의 거대한 연구실로 여겨야 한다. 미래에는 이런 실험적 접근이 '일상적' 방식이 될 것이다."

-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과 디자이너들, 사회혁신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울시가 사회혁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방정부가 나서서 사회혁신의 흐름을 주도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래서 흥미롭다. 사회혁신이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본다. 지금의 좋은 분위기가 유지되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사회혁신은 그 사회만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반영한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사회혁신이 발현되는 모습은 무척 다양하다. 그래서 함부로 조언을 하기가 어렵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다면, 사회혁신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서울시민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에 있는 동안 이런 궁금증도 풀어가고 싶다."

에치오 만치니(Ezio Manzini) 교수 약력
지속가능성을 위한 디자인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2009년에 사회혁신 디자인을 주제로 한 디자인 대학들의 네트워크인 데시스네트워크(DESIS Network)를 설립해 세계 곳곳의 디자인 대학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사회혁신 디자인에 관한 담론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 오랫동안 이탈리아 밀라노공과대학(밀라노폴리테크니코) 디자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지속가능성을 위한 디자인 연구를 진행했다. 또한 전략 디자인, 서비스 디자인 등 새로운 디자인 전공을 개설하며 디자인 교육의 영역을 넓혔다.

밀라노공과대학에서 '지속가능성을 위한 디자인 혁신(DIS) 연구실'을 이끌었고, 디자인 전공 박사학위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서비스 디자인 센터(DES)'의 코디네이터를 역임했다. 디자인 분야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탈리아 황금콤파스 디자인상, 미샤 블랙 경 메달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현재 밀라노공과대학 명예교수이자 영국 런던예술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국 통지대학과 장난대학의 초빙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서울혁신파크 리빙랩 사회혁신 실험 공모 블로그 (http://innovationpark.kr/livinglab) 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에치오 만치니, #사회혁신, #디자인, #서울혁신파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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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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