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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대와 둘이서 
어딘가 남쪽 끝섬에서
쨍쨍한 태양에 불타고 
시원한 바람에 춤추고
야자나무 그늘 밑에서 
뽀뽀하고 싶소

- 하찌와 TJ, '남쪽 끝섬' 노랫말 중에서

그때는 몰랐다. 10년 전 우리의 아지트 같았던 홍대 클럽 'Ta:'에서 하찌와 TJ가 부르는 '남쪽 끝섬'을 듣고 있을 때, 그곳은 그저 꿈과 환상의 섬이었다. 10년 후 내가 그 쨍쨍한 태양 아래에 서게 될지 그때는 몰랐다.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물론 하찌 아저씨와 조태준이 몰타를 배경으로 그 노래를 만들었을 리는 없다. 몰타에는 야자나무 그늘이 없으니까. 하지만 몰타는 나에게 바로 그 '남쪽 끝섬'이었다.

지중해의 한가운데 떠 있는 섬나라 몰타(Republic of Malta)는 온갖 즐길 거리로 가득한 곳이다. 몰타의 역사는 기원전 6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지리적 특성으로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문화까지 모두 갖고 있다. 국토 면적이 제주도의 1/6에 불과하지만, 나라 곳곳에 중세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들이 있다. 게다가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환경은 몰타를 지상낙원으로 부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나라의 주 수입원이 관광 산업이기 때문에 몰타를 찾는 관광객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

아직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몰타는 유럽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여름 휴양지였다. 내가 어학연수 지역으로 몰타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주말이면 언제나 친구들과 모여 몰타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역사 유적, 멋진 해변 그리고 테마파크도 갔다. 축제는 얼마나 많은지 와인 축제, 맥주 축제, MTV 페스티벌, 재즈 페스티벌 등등 쉴 새가 없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바다에 뛰어들어 스쿠버 다이빙도 즐겼다.

무엇인가를 특별히 하지 않아도 좋았던 발레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발레타 ⓒ 한성은
몰타는 오래전부터 지중해 패권 다툼의 각축장이었다. 로마 제국과 이슬람 제국의 통치를 받았고 십자군 전쟁 시기를 지나 나폴레옹의 군대가 상주하기도 하였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의 집중포화로 많은 사상자가 나기도 했다. 유럽에서 가장 작은 수도라는 '발레타'는 몰타에 근거지를 두고 유럽을 지키던 몰타 기사단의 단장 '라 발레트(la Vallete)'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발레타는 그야말로 요새다. 과거 발레타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성벽에 올라서면 쓰리 시티즈(Three cities)라 부르는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다.

몰타 하면 언제나 노란색 건물에 색색의 발코니가 튀어 나와있는 거리 풍경이 떠오른다. 부르는 황석(黃石)으로 되어 있어서 건물들도 모두 노란색이다. 발레타의 좁은 골목마다 알록달록 옷을 입은 발코니가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고 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발레타는 건물을 신축하거나 변형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과거의 모습이 현재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다.

몰타의 상징인 몰타 발코니(Maltese Balcony)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여러 가지 설을 제시하고 있지만, 정확한 기원을 알기 어렵다고 했다. 1945년에 몰타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집주인 에드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더니 예상외로 쉬운 대답이 돌아왔다. 예전에는 지금 같은 폐쇄형 발코니가 아니었는데, 궁전에 살던 왕비가 겨울에 비가 발코니로 비가 들어오는 것이 싫어서 발코니에 창문을 만들었단다. 그걸 본 사람들이 너도나도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 몰타 발코니의 유래라고 했다.

형형색색을 칠 한 이유도 간단했다. 몰타의 건물들은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집을 구별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색깔을 칠했단다. 실제로 발코니 색깔이 같으면 한 집이고, 색깔이 다르면 다른 집이었다. 학자들의 복잡한 이야기보다 훨씬 믿을 만했다.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발코니는 지금도 몰타 기사단장 궁전에 남아있다.
몰타를 상징하는 색색의 몰타 발코니 ⓒ 한성은
몰타에서 처음으로 발코니를 만든 궁전이 지금도 남아 있다. ⓒ 한성은
발레타 중심에 있는 오래된 카페 코르디나 ⓒ 한성은
몰타의 수도인 만큼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발레타에 모여 있어서 몰타에서 지내다 보면 발레타를 자주 오게 된다. 낮에 발레타를 걷고 있으면 정말 중세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발레타에서는 무엇인가를 특별히 하지 않아도 좋았다.

한낮이라도 몰타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코르디나(Cordina)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몰타에서만 마실 수 있는 치스크(Cisk) 맥주를 마시면 내가 정말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느낌이 새삼스럽게 생겨났다. 몰타의 여름 햇볕은 강렬하지만,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덥지 않았다.

발레타는 사실 낮보다 밤이 더 좋았다. 밤에는 도시 전체가 조명을 받아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성채를 따라 타박타박 걷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둠이 내린 후 어퍼 바라카 가든(Upper Baraka Garden)에서 바라보는 몰타의 야경은 지금까지 여행했던 그 어떤 곳보다 예뻤다.

아테네의 야경도 발레타에 비할 바는 못됐다. 발레타와 건너편 쓰리 시티즈 사이로는 초대형 유람선이 다니는데 불을 환하게 밝힌 유람선이 지나던 순간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 바다 위를 가르는 그 화려한 불빛은 현실감이 떨어졌다.
어퍼 바라카 가든에서 바라본 쓰리 시티즈의 야경 ⓒ 한성은
발레타의 밤은 낮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 한성은
초대형 유람선의 불빛은 현실감이 떨어졌다. ⓒ 한성은
어퍼 바라카 가든 반대편에는 로어 바라카 가든(Lower Baraka Garden)이 있다. 어퍼 바라카 가든 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같은 이유로 찾는 사람이 적어 언제나 한적하다. 공원에 앉아 벽돌길을 달리는 마차의 또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공원에 앉아 바닷가 쪽을 바라보면 커다란 종탑이 하나 서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의 종(Siege Bell War Memorial)이다. 당시 독일군의 집중포화로 700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는데, 이들의 영면을 기원하기 위해 추모의 종 옆에는 바다를 향해 누워있는 청동상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의 종’ ⓒ 한성은
바다를 향해 누워있는 청동 조각상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 한성은
몰타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에 끔찍한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한 조각상과 공원이 많았다. 2차 세계대전은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피해를 줬다. '민족말살정책'이라는 소름 끼치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을 처참히 짓밟았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하기보다 잊기를 바라는 것 같다. 과거를 들추어내기보다 그대로 묻어두기를 바라는 것 같다. 과연 그대로 묻어두고 천천히 잊어 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적어도 유럽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발레타는 그저 걷기만 해도 좋지만, 꼭 들러야 할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성 요한 대성당(St. John's Co-Cathedral)'이다. 아름다움에 순위가 있을 수 있겠냐만은, 성 요한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리스트에 언제나 이름을 올리는 곳이다. 리처드 카벤디쉬가 지은 <죽기 전에 곡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에도 소개가 되어 있다.

성당은 일요일은 휴관인 데다 토요일도 12시 30분까지만 개방하기 때문에 시간을 잘 맞추어서 가야 한다. 꼼꼼하게 보려면 족히 1시간은 걸리기 때문에 여유있게 가는 것이 좋다. 성당 내부에는 그만큼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현재 성당 외부는 보수 공사 중이었다. 몰타의 건물들 대부분이 외부가 단조로워서 크게 아쉽지는 않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면 우선 모든 벽과 천장이 황금빛으로 꾸며져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진짜 금으로 장식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화려했다. 모든 벽면과 기둥에는 빠짐없이 조각상과 몰타 십자가로 채워져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성 요한 대성당'
바깥에서 바라본 성 요한 대성당 ⓒ 한성은
성당에 들어서자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이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 한성은
대성당 바닥은 모두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닥 장식이라고 하니 비교할 만한 곳도 없다. 바닥 장식에 사용된 대리석은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들은 대리석을 채색한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해당 색깔을 가진 대리석을 가져와서 완성했단다. 이곳을 두고 많은 매체가 '세계에서 가장'이라는 상투적인 수식을 지겹도록 붙이는 이유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장식처럼 보이는 직사각형의 그림들 하나하나가 실은 모두 몰타 기사단의 묘비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리석마다 기사들의 업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성당 지하에는 라 발레트를 포함한 12명의 기사단장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 즉 카타콤(catacomb)이 있다고 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천장에 세례 요한의 일생이 그려진 그림이 있다. 아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지창조 같은 유명한 천장 그림을 본 적은 없지만, 긴 아치형 천장을 가득 채운 세밀화를 보고 있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종교적 지식이 부족해서 각각의 그림들이 어떤 장면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오디오 가이드가 있지만 애석하게도 한국어는 지원하지 않았다.

유럽을 여행하면 항상 유명한 성당을 중심으로 크리스트교의 유적을 많이 보게 되는데 종교와 관련한 배경 지식이 없으니 늘 외적인 화려함만 눈에 담고 다니게 된다. 역사와 문화는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바닥은 대리석을 이용하여 몰타 기사단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 400여개로 장식되어 있다. ⓒ 한성은
세례 요한의 일생을 그린 천장 벽화 ⓒ 한성은
성당 내부는 전체가 황금빛으로 장식되어 있다. ⓒ 한성은
성당 내부의 화려함은 관광객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사실 성 요한 대성당이 일반인들에게 유명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의 <세례 요한의 참수>(1608)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당 내부에는 이 외에도 많은 그림이 있었지만, 미술의 문외한인지라 다른 그림들은 아는 것이 없었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독립된 기도실에 따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카라바조가 직접 서명을 남긴 유일한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카라바조를 향한 몰타인들의 사랑도 그만큼 뜨거운데, 몰타에는 카라바조의 이름을 딴 와인도 있을 정도다. 참고로 카라바조 레드와인은 참 맛있었다.

그림은 일단 크기부터 관람객을 압도했다. 가로 520cm, 세로 360cm로 마치 멀티플렉스 극장의 스크린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함께 갔던 미술학도 친구가 카라바조는 빛과 그림자를 보라고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천장에 광원이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보니 다른 조명은 없었다. 헤롯 안티파스와 살로메 그리고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는 책으로 자주 읽던 이야기였지만, 눈앞에 그림으로 펼쳐지니 이야기가 더 참담하게 다가왔다. 사람의 머리를 은쟁반에 담아 선물로 주는 일이 정말로 있었을까? 그나저나 지금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발레타는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다빈치 코드>에도 등장한다. 여유가 된다면 발레타를 방문하기 전에 영화를 보고 가면 더 좋을 것 같다. 영화에서 시온 수도회라 부르는 단체가 바로 몰타 기사단이다. 몰타 기사단은 템플 기사단, 로도스 기사단이라 부르기도 한다. 톰 행크스가 성 요한 대성당을 뛰어다니는 장면을 보면 괜히 반갑기까지 하다.

성당을 나오면 성 조지 광장에서 바닥 분수를 맞으며 아이들이 놀고 있다. 맞은편에는 몰타 기사단 궁전(Palace of the Grand Masters)이 있는데 발레타에 올 때마다 시간이 맞지 않아서 결국 들어가 보지 못했다. 몰타 기사단의 갑옷과 당시의 생활상을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쉬웠다.
마노엘 극장의 무대 ⓒ 한성은
중세 시대 귀족이 된 기분으로 박스석에 앉아 보았다. ⓒ 한성은
광장에서 바닷가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마노엘 극장(Manoel Theatre)이 있다. 이 극장 역시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마노엘 극장에서는 지금도 공연이 진행 중이었는데, 공연을 볼 형편은 못 되었다. 공연은 못 보더라도 극장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 입장권(5유로)을 사면 작은 박물관과 함께 무대와 객석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장권을 사서 들어갔는데, 실망도 한참을 했다. 유럽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자주 보던 그런 극장이었다. 생각보다 규모도 무척 작아서 극장을 돌아보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냥 '이곳에 가장 오래된 극장이 있구나' 하고 지나칠 걸 그랬다. 5유로면 큼직한 젤라또를 먹을 수 있는데 말이다.

발레타에는 역사가 깊고 카페도 많고, 유럽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구즈 비스트로(Guze Bistro) 같은 식당도 많다. 그런데 어학원 선생님 중에 한 분이 그런 데는 다 필요 없고 발레타에 가면 반드시 젤라또를 먹어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한 가게가 있었다. 유명 젤라또 프렌차이즈 가게였는데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그 집은 특별히 맛있는 집이라며, 이탈리아 젤라또 보다 맛있다고 했다. 현지인의 추천인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찾아갔다.

유명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야 했다. 그리고 유명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훨씬 비쌌다. 하지만 마노엘 극장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다행히도 젤라또는 발레타 왕복 페리 값 정도의 가치는 했다. 콘에 예쁘게 담느라 일하는 사람들이 고생 꽤나 할 것 같았다.

발레타에는 이 외에도 몰타의 역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Malta 5D 극장, 2차 대전의 흔적을 잘 간직하고 있는 라스카리 전쟁 박물관, 16세기 귀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카사 로카 피콜라 등 볼거리가 넘쳐났다. 발레타에 있는 수많은 박물관을 다 보려면 하루 이틀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역시 발레타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언제나 그렇듯 타박타박 천천히 걷는 것이다.
젤라또를 꽃모양으로 담아 주었던 가게 ⓒ 한성은
어디나 그렇듯 도시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타박타박 천천히 걷는 것이다. ⓒ 한성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 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몰타, #발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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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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