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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남을 때려본 적이 없습니다. 꼬맹이 시절 티격태격하며 조막만한 손을 날릴 법도 한데 기억에 없습니다. 순박했지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 까만 밤, 뜬 눈으로 새우던 때가 있었습니다. 생전 처음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증오가 가슴 가득했습니다. 때로 흠칫 흠칫 그런 자신에게 놀라기도 했지요. 내 안에 이런 끔찍한 게 있다니....

증오가 증오를 낳지요. 세대를 건너기도 하고 끝 간 데없이 이어져 자칫 비극에 이르지요. 한 사람의 마음속에 온 세상을 사르고도 남을 증오가 똬리 틀고 있습니다.

2007년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은 전도연 씨의 영화 '밀양'이 생각납니다. 아이를 잃은 신애(전도연 분)는 고통 가운데 신음하다가 교회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고 범인을 찾아가지요.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죄 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았다는 범인의 편안한 얼굴을 보고 돌아가, 교회에서 기도를 하다가 앉아있던 좌석을 거칠게 두드리며 뒤집어집니다.

'신'과 '용서'를 생각하게 하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지만 어딘가 무척 이상합니다. 신애나 범인에게나 동일한 '신'일 것입니다. 그러나 범인은 나와 이웃과의 관계가 나와 신과의 관계를 반영해주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범인이 아이를 죽이고 왜 용서는 신에게 구하나요. 아이의 어미에게 용서를 구해야지요.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습니다.

범인은 자신의 죄책감에 못 이겨 울어대고 감정의 정화로 환상 속에서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신께 나아가기 전에 타인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화목하고 다시오라고 했는데, 아무도 용서해 준 적 없건만 가해자 혼자 스스로 용서받았다고 하니 어이가 없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가 부흥회 집회 중에 오열하는 신애. 범인에 대한 분노와 자식에 대한 슬픔이 뒤섞인 비탄입니다. 보는 이의 가슴을 절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힘으로 '용서'를 하고 찾아가지만 범인의 그 가증스러움을 보고 뒤집어집니다.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하느냐 말이에요! 그럴 권한은 주님에게도 없어요!"

기독교가 가진 뒤틀린 '신'인식을 고발함과 동시에,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용서'에 대한 오해가 뒤범벅이 된 장면으로 보입니다.

상대가 뉘우치는 것을 보면 조금 더 용서하기가 쉬울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미움과 증오가 솟아나는 이유가 저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쇠사슬로 마음을 칭칭 동여매고 천릿길을 가게 됩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잘못을 뉘우치는 행위와 무관합니다. 이것이 영화가 아니고 실제였다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죽인 범인을 찾아간다는 것은 범인이 뉘우치든 말든 그 행위와 관계없이 이미 증오의 태산을 넘어 깊은 용서를 체험한 것을 반증합니다. 그 깊은 용서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은 범인의 가증스러움을 만나는 순간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일회성이 아니라 점진적인 내적 현상이지요.

만약 상대방이 잘못을 뉘우쳐야만 용서할 수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가요. 저 범인처럼 이상한 신에게 이상한 용서를 받고 이상한 평화를 누리면 어쩌나요. 평생 분노의 쇠사슬로 자신을 칭칭 동여매고 살지도 모르지요. 범인은 편안하건만. 안타까운 것은 실제로 우리의 일상도 그렇지요. 뺨을 때린 사람은 발 뻗고 잡니다.

내 안에 있는 미움과 증오는 상대방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작은 '나'가 그 미움과 분노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내게 이 큰 고통을 안겨준 가해자는 저렇게 멀쩡히 잘 사는데 그를 용서하지 못함이 내 탓이라고?!"

용서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으로 보입니다. 내 탓일 리가 있나요. '용서'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가운데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원천'이 샘물처럼 흘러나와 분노와 증오를 말갛게 씻어내는 과정이 '용서'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저 거대한 원천(살며 사랑하며11, '달은 구름에 가렸어도~' 참조)을 종교에서는 '신'이라고 할수도 있겠지요.

그 '용서'는 가해자보다 일차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용서'입니다. 그가 사죄를 하든 철면피로 버티든 그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대가는 스스로 되돌려 받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 눈에 안 보일 뿐이지요. 불교에서 그것을 '업'이라고 하지요. 그 용서를 통해 쇠사슬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범인이 아닌 신애, 내 자신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초점은 타인보다 '나 자신'입니다.
 
제가 처음 죽여버리고 싶었던 그 사람은 제게 미안하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당시에 그 목소리만 들어도 염증이 나고 그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만 봐도 불편했습니다. 새벽에 혼자 깨서 괴로웠지요. 그는 앞으로도 영원히 사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사과하지 않는다고 평생 새벽마다 깨서 분노에 치를 떨어야한다면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꽤 시간이 흐른 뒤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이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어도 제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살면서 시시때때로 부딪치는 상황에서 잊지 말아야 할 최종병기 활, 오늘은 '용서'였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분노의 장막을 거두어 커튼을 여는 순간 분노와 증오로 얼어붙었던 가슴에 밝은 햇살이 비춥니다. 사십여년에 걸친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킨 만델라 전대통령은 인간의 복수심이 끊임없는 분쟁과 피를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흑백간의 화해를 이끌어냈습니다. 그 위대한 힘이 사라진 남아공에 또다시 피바람이 불고있다니 안타깝습니다.
▲ 분노의 장막 우리 마음에서 분노의 장막을 거두어 커튼을 여는 순간 분노와 증오로 얼어붙었던 가슴에 밝은 햇살이 비춥니다. 사십여년에 걸친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킨 만델라 전대통령은 인간의 복수심이 끊임없는 분쟁과 피를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흑백간의 화해를 이끌어냈습니다. 그 위대한 힘이 사라진 남아공에 또다시 피바람이 불고있다니 안타깝습니다.
ⓒ 전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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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용서, #밀양, #최종병기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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