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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우유를 마시며 비밀서약서를 썼다.
 딸기우유를 마시며 비밀서약서를 썼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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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않던 행복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지금 내 양손을 한 짝씩 붙잡고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은 사랑스러운 조카들이다. 언니의 아들과 남동생의 딸로 각각 열 살, 일곱 살이다. 자칭 타칭 조카 바보인 내가 다른 사람은 빼놓고 딱 우리 셋이서만, 이렇게 손을 잡고 나란히 길을 걷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나를 사이에 두고 큰조카와 작은조카 둘이서 쉴 새 없이 조잘대는 걸 듣고 있자니 마냥 웃음만 나온다. 이 길이 바로 꿈길이다.

이번 추석에 시댁에 내려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혼 후 무려 여섯 번의 명절을 치르는 동안 나는 친가 쪽 식구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시댁은 내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 한참 떨어진 전남 진도. 오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 평소 자주 만나지 못하니 명절에라도 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남편의 이야기는 이해가 갔다.

그래서 명절 당일 차례를 지내고 곧장 처가로 가는 게 보통이지만 우리는 하루 이틀을 더 진도에서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왔다.

시댁 식구들과 지내는 것이 싫은 건 아니었다. 문제는 내 가족들과 보내는 명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곳에 나만 없다는 것은 내게 말 할 수 없는 허전함을 남겼다. 특히 조카들이 커가는 것을 명절에나마 드문드문 볼 수 있었는데 그마저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명절을 지낼수록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이 커졌고, 나는 서럽고 억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속 이렇게 지내긴 싫었다. 결국 남편은 '남편의 명절'을, 나는 '내 명절'을 보내기로 했다.

오랜만에 친가 식구들과 함께 보내는 명절은 예상보다 훨씬 편안하고 충만했다. 몇 년에 걸친 설득 끝에 차례상 음식은 점점 줄어 이제 곧 상 자체를 없애자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먹을 음식으로 나는 소불고기를, 언니는 해물찜을 준비해왔다. 엄마는 여느 때처럼 생선조림을 했다.

옥상에서 삼겹살도 구워 먹었다. 느긋하게 돗자리에 누워 하늘과 구름과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며 이야기를 했다. 바로 그때, 작은 조카가 "고모 집은 어디야?"라고 물었다. "여기서 걸어서 십 분"이라고 대답한 것이 꿈같은 산책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바로 자리를 털고 있어났다.

조카들도 나만큼이나 설레는 듯했다. 큰조카는 우리집에 비밀기지를 만들자고 했다. 작은 조카는 무조건 "좋다"고 했다. 나는 나대로, 우리집 최연소 손님들에게 무엇을 대접할까,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방금 밥을 먹어 배가 잔뜩 부른 상태고, 과자나 아이스크림은 내 맘에 들지 않고....

문이란 문은 모두 꽁꽁 닫아 놓은 터라, 혈기 왕성한 아이들에겐 집이 좀 더울 수 있으니 시원한 걸 해주고 싶었다. 아! 냉동실에 얼려둔 딸기가 있었지! 냉동딸기를 우유와 함께 갈아 '진짜 딸기 우유'를 만들어 줘야겠다. 딸기만으론 아이들이 좋아하는 단 맛을 낼 수 없으니 꿀을 조금 넣을까? 아니면 상큼하게 사이다를?

집에 도착하자마자 작은조카가 이 방 저 방으로 뛰어다니며 탐색에 나섰다. 이미 몇 번 우리집을 다녀간 큰조카는 비밀기지로 삼기 좋은 '이모가 글쓰는 책상'의 아래 공간을 살폈다. 틈틈이 내가 딸기우유 만드는 것에도 참견을 했다.

냉동딸기를 갈 때 처음엔 우유를 조금만 넣어야 한다. 우유를 많이 부으면 딸기가 둥둥 떠다녀 제대로 갈리지 않는다. 딸기가 죽처럼 변한 뒤 나머지 우유를 더하는 것이 팁이라면 팁이다. 몇 번 믹서기를 돌리니 뚝딱 딸기우유가 만들어졌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딸기우유 세 잔을 내놨다.

한 모금 맛을 보고는 "이모·고모표 딸기우유가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조카들이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역시 향이 강한 꿀보다는 사이다를 조금 넣길 잘 한 것 같다. 하나 가득 따라준 딸기우유를 한 컵씩 싹 비운 걸 보니 흐뭇하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가 보다.

엄마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조카들은 다음에 '비밀기지'에서 수행할 미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미션이란 바로 아무도 몰래 우리끼리 컵라면을 먹는 것! 우리는 동그랗게 뜬 눈을 마주치며 깔깔대고 웃었다. 미션을 수행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굳게 약속했다.

연휴가 끝나고 맞이한 일상. 문득, 걱정이 된다. 다음 명절에도 조카들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의 비밀스런 약속이 평화롭게 지켜질 수 있을까. 단정할 순 없지만 기다려봐야겠다.


태그:#단짠단짠 그림요리, #요리에세이, #딸기우유,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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