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땅의 청년은 어디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가.

가계부채와 실업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가운데 기반 없는 청년들은 포기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씩 포기하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직장과 결혼에 이어 꿈과 사랑까지 포기하기를 요구받는 청년들이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여기 지난 시대의 법칙들이 무너지고 붕괴되는 혼란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세 편이 있다. 하나는 2차대전 시기 유태인 수용소로 보내진 소년 죄르지의 이야기를, 다른 하나는 기존의 독법으론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를, 마지막 하나는 오늘의 한국을 배경으로 주류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소외되버린 어느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담담하게 술회한 임레 케르테스, 학생운동에 참가해 경찰에 구금된 뒤 극심한 실어증을 앓고 이후 단어조차 해체되어버린 듯한 소설을 써내려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며 매일 조금씩 쓴 소설에서 한 줌 희망도 찾기 어려운 한국사회 밑바닥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한 김의까지.

헝가리와 일본, 한국의 특이한 작가들이 내놓은 소설 세 권을 여기서 한 권씩 살펴보자.

임레 케르테스, <운명>

책 표지
▲ 운명 책 표지
ⓒ 다른우리

관련사진보기


지난 3월 31일 헝가리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가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은 지 14년 만이다. 본인이 겪은 실제 홀로코스트 생존 경험을 바탕으로 '아우슈비츠 이후의 문학'을 정립했다고까지 평가받는 케르테스, 그의 첫 장편 <운명>은 그의 소설 가운데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소설은 15세 소년 죄르지 쾨베시가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자이츠 수용소에서 경험한 일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살던 14살 소년 죄르지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버스에서 끌려나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 수용되고, 독일이 패망하기까지 1년여간 부헨발트와 자이츠 수용소를 거치며 온갖 절망스런 경험과 마주한다. 그는 독일이 패망하고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한 저널리스트와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모두의 예상과 달리 수용소 안에도 삶이란 것이 존재했으며 자신은 그로부터 일종의 행복까지 느꼈음을 증언한다.

<운명>의 특이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수용소를 완전히 비참한 공간으로 다룬 많은 작품과 달리 이 소설에선 그 끔찍한 장소에서조차 삶이란 게 있음을 내보인다. 죄르지는 잔혹한 노동과 폭력적인 규칙에 순응하며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집중한다. 그 삶이란 내일과 미래가 아닌 바로 이 순간을 극복해내는 것이다. 엄격한 관리를 통해 눈앞의 역경을 하나씩 이겨내고 그 가운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죄르지의 모습에서 독자는 운명과 행복, 자유와 극복 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되묻게 된다.

케르테스는 이 소설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개인의 의지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일깨운다. 모두가 쉽게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모든 운명 역시 개인의 동의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삶의 주인이 개인이어야 함을 역설한다. 곧 사회적 폭력이 개인의 종말을 강요하는 시대라고 해서 이를 운명이라 부르고 자신을 잃어가는 건 책임에 대한 비겁한 회피라는 주장이다.

나치의 아우슈비츠는 지나갔으나 전쟁과 독재, 각종 폭압이 상존하는 오늘, 케르테스의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소설에서 케르테스는 죄르지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운명없다>라는 원제가 더욱 솔직하고 와 닿는 이유다.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책 표지
▲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책 표지
ⓒ 웅진지식하우스

관련사진보기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혹여 누군가 정의를 내린다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리처드 파인만이 양자역학에 대해 남긴 유명한 말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것으로 바꾸어 보면 꽤나 그럴듯한 구절이 만들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난해한 소설을 쓰기로 유명한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일본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격으로 손꼽힌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붙는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 지독하게 지루하고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진다.

좋게 말해 기존 언어와 이야기의 형식을 해체하고 작가만의 독특한 표현양식을 실험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무엇을 위한 해체이고 실험인지 근대적 합리성에 기반한 독자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안으로만 침잠해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이들처럼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독자와 공유하는 단 하나의 순간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듯하다. 심지어는 제목에 쓰인 '야구'라는 단어조차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야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1995년 초판이 출간된 이래 빠르게 자취를 감췄지만 그 지독한 악명이 도리어 어떤 종류의 명성이 되어 2005년 마침내 개정판이 나오게 됐으니 세상은 꼭 합리적으로 돌아가진 않는 모양이다. 옮긴이조차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다고 털어놓는 상황에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기도 하다.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말하는 야구는 때로 포르노 같고 인생이며 소설 같기도 한데 그 가운데 무엇과도 일치하진 않는다. 대체 무엇이 우아하고 감상적인 것인지, 이성의 잣대를 대고 이해하려 한다면 끝없는 좌절만 맛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이 소설을 가치 있게 읽는 독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의 이 평은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에 대한 리뷰적 성격이라기보다 미래의 독자에 대한 경고이자 도발이 될 것이다.

이 평을 읽고도 책장을 펴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수평선을 넘어 항해를 떠나기로 결심한 모험가처럼, 우주선을 타고 대기 밖으로 나아가는 우주비행사와 같이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와 마주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김의,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

책 표지
▲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 책 표지
ⓒ 나무옆의자

관련사진보기


절망의 시대다. 청년에겐 더욱 그렇다. 그런데 가뜩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는 청년들 가운데서도 더욱 힘든 이들이 있다. '인구론(인문대 졸업생은 90%가 논다)'이며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따위의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심각한 취업난에 처한 인문계열 졸업생이 바로 그들이다.

인문대생 가운데도 철학과 학생은 가장 푸대접을 받는다. 철학이란 학문이 현실세계서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일찍이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오늘날 진정으로 죽어가는 건 철학인지도 모른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철학은 현실세계를 이해하는 임무를 조금씩 자연과학에 넘겨주더니 뇌과학의 발달과 함께 사고의 영역마저 침범당하고 있다.

소설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 속 주인공 인우는 그 철학과를 심지어는 대책도 없이 자퇴한 인물이다. 이혼한 엄마와 둘이 살고 있는 그는 개를 죽이고 털을 그슬려 보신탕집에 넘기는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번다. 용돈이라고 해봐야 담뱃값을 대고 나면 남는 게 없지만 담배만큼은 제 손으로 벌어서 피고 싶다는 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유일한 이유다. 다른 일도 해봤지만 내성적이고 여린 성격 탓에 사람과 어울리는 게 버겁기만 하다.

인우의 엄마는 과거엔 아빠였다. 말인즉 트랜스젠더라는 것인데, 인우가 5살 때 성전환수술을 하고 엄마와 이혼한 뒤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성소수자들이 모이는 카페에서 일을 하는데 수입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아 생활에 늘 쪼들린다.

10평이 조금 넘는 변두리의 허름한 아파트, 매일 같이 비루하고 역겨운 풍경이 넘실대는 이곳에서 인우는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간다. 인우에게 이 아파트가 끔찍한 건 괴물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학생이라기보다 양아치란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밤색머리, 그가 바로 악마다.

소설 속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비루하고 처연하다. 숨죽인 채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오늘을 견뎌도 다시 눈을 뜨면 온 세상이 고통이다. 괴롭고 힘들어도 주변에는 도움을 청할 곳 하나 마땅치 않고 세상은 이들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를 구하려 발버둥치는 대신 영혼을 밟고 모멸감을 견디는 편을 택한다.

한국사회의 밑바닥, 어디서도 희망을 구할 수 없는 변두리 아파트를 배경으로 작가는 한 편의 끔찍하고 불행한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그가 그린 세상에는 쉬운 희망은 자취를 감췄고 위악적이라 할 만큼 불쾌한 이야기들만 수두룩하다. 이와 같은 세계가 오늘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기에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은 분명한 의미가 있다. 작가는 소설 가운데 희망을 심지 못했지만 독자 일반은 어떻게든 희망을 발굴해야 하므로.

나는 다시 가스토치의 파란 불꽃을 점화한다. 그리고 밤색 머리의 얼굴을 향해 불길을 갖다 댄다. 내가 인간이었을 때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양이이므로 할 수 있다. 나는 파란 불꽃의 방향이 밤색 머리의 눈으로 향하게 한다. 밤색 머리의 눈이 또 한 번 타기 시작한다. 너덜해진 눈꺼풀이 마저 탄다. 이윽고 눈알이 타기 시작한다. 강렬한 파란 불꽃을 견디지 못한 눈알이 그만 터져버린다. 밤색 머리의 터진 눈알에서 지지직 소리와 함께 액체가 흘러나온다. 밤색 머리가 내게 흘리는 눈물이다. 용서를 구하는 항복의 백기다. 아, 이 벅찬 심장의 자유와 황홀감을 어디에 비할까. - 61페이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 / 나무옆의자 / 김의 지음 / 2015. 10. / 13000원>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 웅진지식하우스 /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 박혜성 옮김 / 2005. 07. / 9000원> <운명> / 다른우리 / 임레 케르테스 지음 / 박종대 옮김 / 2002. 12 / 13000원>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웅진지식하우스(2017)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김의 지음, 나무옆의자(2015)


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박종대, 모명숙 옮김, 다른우리(2002)


태그:#운명,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어느 철학과 자퇴생의 나날, #김성호의 독서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