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규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날마다 해야 하는 보충수업과 야자, 두 달 반 동안 고민한 제규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정규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하고 싶다고요.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식구들 저녁밥을 짓는 제규는 지금 2학년입니다. 이 글은 입시공부 바깥에서 삶을 찾아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기자 말 

유난히 무더운 여름, 남편과 제규는 집 밥을 열심히 차렸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 남편과 제규는 집 밥을 열심히 차렸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엄마, 걱정하지 말고 미역국 끓여. 난 맛없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꽃차남이 잠자리에 들면서 한 말이다. 그 전에 우리는 생일선물을 사러 나갔다 왔다. 항균효과가 있고, 발냄새를 억제한다는 '인삼양말' 세 켤레를 샀다. 꽃차남이 가진 돈은 500원짜리 동전 4개. 그 돈으로는 택도 없었다. 모아놓은 용돈을 들고 온 제규는 "다른 거 큰 선물 사요"라고 했다. 함께 선물을 사러 온 게 중요하다. 계산은 내가 했다.  

8월 18일 오전 0시 20분. 남편이 집에 들어왔다. 제규는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에 서서 큰소리로 "아빠, 생신 축하해요"라고 했다. 술을 좀 마신 남편은 환하게 웃었다(생일이니까).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지금 몇 시야? 학교 갈라면 빨리 자야지"라고 말했다. 나도 남편을 웃게 해주고 싶었다. 우발적인 선물을 주었다.

"여보, 안방에 밤새 에어컨 켜도 돼. 생일선물이야."   

나는 일찍 일어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잤다. 그런데 알람 소리를 듣지 못 했다. 오전 5시 30분, 제 방에서 자던 제규가 안방으로 와서 나를 깨웠다. 미리 사다놓은 국거리용 쇠고기를 꺼냈다. 냄비에 물을 붓고는 끓였다. 까딱 잘못하면 국물이 넘치고 가스레인지가 더러워지니까 지켜보고 있었다. 밥솥에 쌀을 안칠 때만 자리를 떴다가 금방 불 앞으로 왔다. 

마흔살 넘으면서 "너무 애쓰지 말자"는 합리화를 한다. 생일 잔칫상이니까 잡채나 부침개는 당연히 올라야 한다. 그러나 나는 1년에 한 번, 남편 생일날에만 요리하는 사람. 작년에 끓인 미역국은 마늘향이 강하게 났다. 재작년 미역국은 매웠다. 식구들은 "냄비 빡빡 씻은 거 맞어?"라고 물었다. 맛도 이상한데 위생까지 의심받다니, 정말 억울했다.

1년에 한 번, 미역국에 도전하다

무더웠던 여름, 그래도 먹어야 했다. 살아야 하니까.
 무더웠던 여름, 그래도 먹어야 했다. 살아야 하니까.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오래전, 음식 만들기에 불타오른 적 있다. 제규를 낳았을 때였다. 결혼하고 밥상은 줄곧 남편이 차렸지만 아기 이유식은 내가 만들고 싶었다. 개월 별로 아기에게 해먹이라는 이유식 책을 샀다. 앙증맞은 그릇에 담긴 갖가지 이유식 사진 밑에는 조리 순서가 나와 있었다. 여러 번 읽었지만 만들 때는 갈피를 못 잡았다. 남편은 뚝딱뚝딱 잘도 만들고만.

요리책은 글자로 읽으면 체화가 안 됐다. 남편이 알려주는 말을 잘 기억해뒀다. 그런데 까먹는 거다. 내 식대로 다시 공책에 적었다. 소리 내서 읽어봤다. 아, 몰라. 나는 레시피를 해독 못 하는 '똥멍청이'였다. 주방에 서서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면 진땀이 났다. 설거지나 하고 빨래만 삶는 곳, 나는 주방을 그런 용도로만 써왔다.    
               
쇠고기는 1시간 동안 끓였다. 국물에 미역을 넣으려고 보니까 포장지에 미역국 레시피가 있었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미역과 마늘을 넣고 어느 정도(차라리 몇 분이라고 알려주면 좋겠는데…) 볶으란다. 그 다음에는 물을 넣고 푹 끓여서 간을 하면 된다고. 어? 나는 쇠고기만 신경 써서 끓였는데. 따로 미역을 볶았다가 끓여놓은 쇠고기 국물과 합체하라는 거겠지.

"제규야, 다진 마늘 어디에 있어?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잠결이지만) 찾아봐요. 냉장실 있지. 어제도 썼어요."

다진 마늘이 있어야 미역을 볶는다. 내 눈에는 안 보였다. 냉동실에서 소설책 두께로 얼려놓은 마늘을 꺼냈다. 나는 며칠 전부터 팔이 아픈 상태. 셔츠를 입으려고 팔을 올리는 것도 힘들다. 그렇지만 남편 생일이니까 초인적인 힘을 냈다. 꽁꽁 언 마늘을 칼로 잘라냈다. 미역을 볶고, 끓여놓은 쇠고기 국물에 쏟아서 함께 끓였다. 생선도 굽고.

내가 차린 남편 생일상. 밥, 미역국, 생선 준비하는데도 긴 시간이 걸렸다. 다른 반찬은 남편이 전날 미리 해둔 거다.
 내가 차린 남편 생일상. 밥, 미역국, 생선 준비하는데도 긴 시간이 걸렸다. 다른 반찬은 남편이 전날 미리 해둔 거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미역국에 밥, 생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전날 남편이 해놓은 반찬을 꺼내서 상을 차렸다. 다해서 1시간 반이 걸렸다. 먼저 제규를 깨웠다. 수저를 놔 달라고, 거실에 에어컨을 켜 달라는 부탁을 했다. 오줌을 누고 온 꽃차남은 "엄마가 이걸 다 해냈어?" 감탄했다. 남편은 집에서 입는 정장차림(팬티와 런닝)을 하고 생일밥상을 받았다.

"생신 축하합니다. 생신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빠, 생신 축하합니다."

아이들은 남성성을 뽐내며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누구의 생일이든, 촛불은 자기가 꺼야하는 꽃차남은 "아빠가 꺼. 생일이잖아"라고 점잖게 말했다. 이제 생일선물 전달식. 인삼향이 나는 양말과 처제가 미리 주고 간 속옷. 부족해 보였나? 꽃차남은 안방으로 가서 자기 전 재산의 절반을 가져왔다. 500원짜리 동전 두 개를 주면서 "아빠, 잘 써"라고 했다.   

식구들이 숟가락을 들 때,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편은 내가 끓여주는 생일 미역국을 '원샷'하는 경향이 있다. 꽃차남은 미역국에 밥을 말 거다. 그러나 제규는 맨 처음 한입은 맛을 음미하며 먹는다. 요리학원 원장님한테 '절대 미각'을 가졌다는 칭찬까지 받은 '분'이다. 제규는 "좋은데요"라고 했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엄마, 쇠고기 미역국이잖아요. 근데 멸치 맛이 나. 멸치로 육수 냈어요?"
"아닌데. 다른 맛이 못 끼어들게 완전 철통 방어하면서 끓였어. 1시간 동안 불 앞에서 지켜본 거야."              
"내가 틀릴 수도 있죠, 뭐. 맛있어요."

밥 먹다 보니까 오전 7시 반이 넘었다. 제규는 카풀 버스를 놓쳤다. 내가 태워다주기로 했다. 남편한테는 꽃차남 학교 보낼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밥 먹고, 케이크 먹고서 소파에 누워있던 남편은 "나 오늘 생일인데?"라면서 의아해 했다. 생일 맞은 사람을 째려봐도 되나? 안 되겠지. 남편 얼굴을 상냥하게 봤다. 다만 "뭐라고?" 물었다.

나는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가지고 나왔다. 제규는 슬리퍼를 신고, 운동화는 손에 들고 있었다. 차에 타자마자 양말을 신고, 신발을 갈아 신었다. 다른 날 같았으면, 혼자서 학교 갈 준비를 한다. 스스로 밥을 챙겨 먹고서 늦지 않게 카풀 버스를 탄다. 한 마디로, 아빠 생일날이라서 땡 잡은 거다. 나는 '은혜'를 베푸는 처지, 생색내지는 않았다.  

여름 내내 외식 네 번, 집 밥으로 이긴 더위

올 여름, 제규는 새벽 2시에 레몬청을 만들곤 했다. 식구들 다 자는 시간에 뭔가를 만들면, 우주의 기운이 느껴진단다.
▲ 제규가 만든 레몬청 올 여름, 제규는 새벽 2시에 레몬청을 만들곤 했다. 식구들 다 자는 시간에 뭔가를 만들면, 우주의 기운이 느껴진단다.
ⓒ 강제규

관련사진보기


"제규야, 아침에 밥 하는데 너무 덥더라. 올 여름은 유난히 덥잖아. 불 앞에서 요리하느라 고생했지? 아빠랑 너는 열도 많잖아. 근데 우리 식구는 방학 때 외식을 딱 네 번밖에 안 했잖아. 일본 가정식, 삼계탕, 영광에서 굴비정식, 또 삼계탕하고 냉면. 힘들었지?"
"아니요. 아빠도 밥 하는 거 안 힘들었을 걸? 레몬청이랑 피클 잘 만들게 돼서 좋아요."

제규한테 가장 많이 하는 잔소리 중에 하나가 "일찍 자. 그래야 키 커"다. 173cm 넘고 나서는 잘 안 통한다. 제규는 레몬청을 만들고 오이 피클 담그는 걸 좋아한다. 오전 2시에 만드는 걸 특히 즐긴다. 식구들이 잠든 시간에 부엌 불만 켜고 요리하면, 우주의 기운이 느껴진단다. 나는 "그 시간은 귀신이 활동하는 시간이야"라고 우긴 적도 있다.   

"엄마, 그때가 딱 좋다니까요. 레몬을 굵은 소금에 씻고, 끓는 물에 한 번 데쳐요. 레몬은 우리나라에서 안 자라요. 미국에서 건너오니까 왁스칠을 해요. 그래서 잘 씻어야 해요. 베이킹소다 뿌려서 또 씻고, 흐르는 물에 한 번 더 씻어요. 레몬 씨는 빼고요. 안 그러면 써요. 레몬 끝에 꼭대기 부분은 즙을 싸서, 설탕이랑 꿀이랑 일대일로 섞고요."

제규는 서울에서 온 손님들에게 시원한 레몬청을 대접했다. 친구 수민이한테는 크림파스타, 피클, 샐러드, 레몬청으로만 상을 차려줬다. 동생 꽃차남과 시후(위층 사는 꽃차남 친구) 점심도 차렸다. 동생 데리고 만화영화도 보러 다녔다. 생각해보니, 이 여름 내내 '은혜'를 베푼 쪽은 제규였다. 밥 하는 남편이었다. 덕분에 우리 식구는 더위 안 먹고 잘 견뎠다.          

덥다. 움직이지 않아도 땀이 난다. 그래도 제규는 놀러온 친구한테 밥을 차려줬다.
▲ 제규가 친구 수민이한테 차려준 음식 덥다. 움직이지 않아도 땀이 난다. 그래도 제규는 놀러온 친구한테 밥을 차려줬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태그:#집 밥,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수민아, 마동석 근육 꼭 만들거라. 홧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