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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말]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영국인들은 역사를 매우 사랑하며 존중한다. 그들은 개인의 역사까지도 매우 사랑한다. "체험은 최상의 스승이다"(Experience is the best teacher)고 하여 기성세대의 체험담을 대단히 귀중한 자산으로 여기며, 여기에서 교훈을 배운다.

지식인의 사회비판은 자동차의 제동장치(브레이크)와 같다.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곧 추락하고 만다. 이번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연재는 체험에서 우러난 기록이다. 한 개인의 기록이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지난 시대를 이해하고, 앞날을 살아가는데 지혜를 얻기 바란다. 왜냐하면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다.

신문은 사회의 목탁이요, 거울이다. 비판이 없는 일방의 충성과 맹종처럼 무서운 게 없다. 과거 나치즘이나 파시즘, 우리나라 유신시대가 그 단적인 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동안 나의 글은 늘 비판에 따르는 대안을 제시해 왔다. 이번 연재 기사 '제Ⅰ부 초록색 견장'에서 다루는 병역문제, 군내 구타 및 부패 부조리 문제 등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의 하나였다. 그 원인과 대안 및 해결책은 마지막 회에서 깊이 다룰 예정이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현해탄은 알고 있다>라는 흑백영화가 있었다. 이는 한운사 원작의 KBS 드라마를 김기영 감독이 각색·감독했다. 이 작품은 태평양 전쟁 당시 조선 청년으로 남방전선에 끌려간 아로운이라는 주인공이 일본군에게 겪는 학대와 구타, 기합(얼차려)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군국주의 일본군의 실체를 잘 알 수 있었다.

일본군 상관 모리는 반도청년 아로운을 개처럼 끌고 다니면서 군화 밑창을 핥게 하는 등,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 작품에는 작가의 체험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영화엔 원작자 한운사씨의 체험이 반영됐다고 한다.

조갑제씨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2권에는 만주군 육군군관학교 시절의 박정희 생도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당시 문경초등학교 교사였던 청년 박정희는 연령 초과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지원이 불가능하자 최후의 방법으로 혈서까지 써가며 자원 입대한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4월,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한 조선인 박정희 등 조선인 생도 11명은 주보(酒保, 요즘 군매점)에서 13명의 조선인 1기 생도들과 상견례를 가졌다. 그 며칠 뒤 1기생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들은 2기생 후배들을 지도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누구를 혼내줄까를 결정하는데 박정희와 김재풍이 뽑혔다.

김재풍은 미남이라서, 박정희는 단단하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뭔가 건방져 보인다는 여론이 나온 것이다. 간도 용정의 광명중학교 출신 방원철이 나서서 '내가 손을 봐주겠다'고 자원했다. 며칠 뒤 토요일 저녁식사가 끝난 뒤 방원철은 두 사람을 내무반 숙사 뒤 건설 자재가 흩어져 있는 으슥한 곳으로 불러냈다.

'너희 두 놈은 우리 선배들 사이에서 태도가 건방지고 예절이 형편없다는 불평이 수 차례 나왔다. 그래서 오늘은 선배의 기합 맛을 보여 주겠다. 입 다물어!' 

기골이 장대한 방원철은 주먹으로 (그들의) 따귀를 갈기기 시작했다. 김재풍은 금방 옆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박정희는 달랐다. (박정희는) 방원철의 주먹을 맞고 몸이 옆으로 밀렸다가도 금방 원래 자세로 돌아와 딱 버티고 서서 다음 타격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몸은 용수철 같았다.

방원철은 속으로 '야, 여기 독한 놈 하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더 세게 때렸다. 그래도 고개를 치켜들고 펀치를 받아내는 박정희가 꼭 차돌 같고, 뱀대가리같이 느껴졌다고 한다."(조갑제 지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조선일보사 2001. 4. 발간 제2권 109~110쪽)

위의 두 예문에서 보듯이, 일제강점기 일제에 끌려간 조선 청년들은 일본 군인들에게 차별과 멸시, 구타와 기합을 몹시 받았고, 또 스스로 지원해 간 군관학교 생도들조차도 동족 간 허울 좋은 '지도'라는 구실로 선배들에게 구타와 기합을 받아왔음을 실례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시대상이었다. 이런 구타와 기합의 고약한 인습은 무슨 대단히 빛나는 전통 마냥 우리 국군에는 물론, 학교 사회에까지도 이어져 왔다.

나는 고교시절 아침 등교 때마다 조마조마 마음 졸이면서 교문에 들어섰다. 거기에는 무서웠던 훈육주임과 완장을 찬 규율부들이 눈을 부릅뜨고 죽 늘어서서 등교하는 학생들의 복장을 살폈다. 등교하는 학생은 정문 앞에 이르면 그들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훈육주임과 완장을 찬 규율부들은 그 가운데 복장위반을 학생이 눈에 띄면 "야, 고1 이리 와!"라고 불러 교문 뒤로 보냈다. 복장위반자가 거기로 가면 규율부원에게 먼저 엉덩이가 얼얼하도록 몽둥이찜질부터 당했다.

잠복근무

소대장 부임 이후 밤낮이 뒤바뀐 생활이었다. 대부분 소대원들은 올빼미처럼 낮엔 잠을 자고 밤에는 예상 침투로 길목 초소에서 잠복근무를 했다. 잠복근무는 일몰 시작부터 다음 날 일출 시각까지 2~4명이 1개조로 꼬박 밤을 새웠다. 병사들은 석식을 마치면 곧장 야간 근무복장으로 연병장에 집결한다. 신체 노출 부분은 숯으로 야간위장을 하기에 영락없는 검둥이였다.

군장도 요란하다. 모포를 판초우의로 말아 어깨에 걸고 소총, 실탄, 수류탄, 크레모아, 야간조준경, 경보기 등을 소지하는데 각자 한 짐은 톡톡히 된다. 나는 근무자들의 야간위장 상태와 소지품 검사(주로 담배, 라이터, 성냥 등)를 마친 후 그날의 암구호와 경계 수칙을 복창시킨다.

"먼저 보고 먼저 쏘자."
"담배를 피우지 말자."
"졸면 죽는다"
"…."

군장검사가 끝나면 초소장 인솔로 각 초소로 떠난다. 병사들은 초소에서 밤샘 잠복근무를 하고 다음날 아침 귀대해 장비 점검 및 일조점호를 한다. 그런 뒤 아침 구보, 세면, 청소를 한 후 조식을 든다. 조식이 끝나면 주간 근무자를 제외하고는 오전 취침이다. 오전 11시 30분에 기상, 중식을 든 후 다시 오후 취침이다. 오후 4시 무렵, 다시 기상, 석식과 야간 근무 준비로. 하루하루가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일과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소대원들과 함께(맨 오른쪽이 기자, 1969. 7.)
 그 무렵 소대원들과 함께(맨 오른쪽이 기자, 1969.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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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빠따'

내 숙소에서 오침을 하고 있는데 잠결에 '딱딱…, 윽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딱딱' 하는 소리는 가을날 도리깨질 소리와 비슷했는데, '윽윽' 하는 소리는 분명 사람의 비명이었다. 분명 어디서 매를 맞는 소리였다. 야전침대에서 일어나 후딱 겉옷을 입고 나가자 내무반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은 한적한 취사장 뒤편이었다.

내가 그곳에 이르자 소대원들은 일렬횡대로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한 채, 한 녀석씩 일어나서 엎드린 녀석들을 하나하나 지나가며 매질 하고 있었다. 소대 내무반장 겸 향도인 안중석(가명) 하사는 그 광경을 뱀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소대원 전원을 취사장 뒤로 집결시켜 '계급 군번 순으로' 엎드리게 한 후 매질을 하는 이른바 '줄 빠따(배트의 일본 식 빌음으로 몽둥이질을 말함)' 체벌을 주고 있었다.

"안 하사! 뭐하는 거야!"

나의 돌연한 출현과 고함에 곡괭이 자루를 든 한 녀석이 흠칫 놀란 채 엉거주춤했다. 안 하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내 앞으로 뛰어왔다.

"공격! 소대원들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누구 맘대로!"
"소대 내무반 교육은 제 소관입니다."
"야! 내무반 교육은 좋은 말로 할 것이지 왜 곡괭이 자루로 해?"

그는 내 말에 지지않고 대꾸했다.

"소대장님! 요즘 소대원들 군기가 엉망입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줄 빠따를 쳐야 내무반 군기가 섭니다. 그저 엽전들은 자고로 빠따를 쳐야 말을 잘 듣습니다."
"뭐라고?"
"좋은 말로 하면 따지고 기어오릅니다."
"안 돼! 당장 그만 둬!"

"소대장님은 그냥 모른 체 하십시오."
"안 돼! 즉각 중지시켜!"
"오늘만은 양해해 주십시오. 다음엔 소대장님에게 사전 보고하고 교육시키겠습니다."
"너, 나한테 항명이냐?"
"이건 항명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우리 소대원들의 내무반 군기를 바로잡기 위해섭니다."

특권의식

안 하사는 물러서지 않고 내게 끝까지 말대꾸를 했다. 나는 엎드려 있는 소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일어섯! 전원 내무반으로 뛰어가서 5분 내로 취침이다. 알겠나?"
"네엣!!!"

소대원들은 나와 안 하사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다가 하사 계급보다 소위 계급이 더 높은 줄 판단한 듯 후딱 내무반으로 돌아갔다.

"저 오늘 이 시간 부로 소대 향도 그만둘 랍니다."
"뭐? 그만두겠다고? 네 간덩이가 고래등만큼 부었군."

안 하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듯 계속 씩씩거렸다. 그 무렵 안 하사의 간덩이는 보통 부어 오른 게 아니었다. 그 간덩이는 강철 중대장이 키웠다.

중대장은 때때로 한밤중에 내무반장인 안 하사를 불러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그 은밀한 지시란 사단장 관사 언저리의 조경을 위한 향나무를 상납코자 북한산성 어귀에 있는 OO화원의 향나무를 그에게 부탁해 특공대를 조직해 몰래 뽑아오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 다음날 이른 새벽 5분대기조 차량으로 몰래 뽑아 온 나무를 대대장에게 보냈다.

그런가 하면 중대장은 그 무렵 비봉에 근무하는 1소대 송아무개 선임하사에게 대대장 BOQ(숙소)를 짓는다고 서까래와 대들보 감으로 북한산 소나무를 몰래 베어 오게도 했다. 그 나무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운반했다. 그러자 그들 하사관들은 중대의 중요한 임무는 자기들이 도맡아 한다는 착각 속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간덩이가 잔뜩 부어 올랐다. 이는 마치 지난날 중앙정보부나 특수부대 요원들이 요원 납치 등 특수임무를 자기들이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특권의식을 갖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둘러 한때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안 하사! 너 하사관학교에서 교육받을 때 많이 맞았지."
"네."
"그때 기분이 어땠나?"
"…."

"왜 대답을 못 하나?"
"…."

"이담에 네 아들이 군에 입대해서 상급자한테 맞아 병신이 돼서 돌아오면 그때 너 어쩔 거냐?"
"…."

폭력의 원인

안 하사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계속 씩씩거렸다.

"왜 대답을 못하나? 넌 일본 놈들이 한국의 장정들을 저희가 저지른 전쟁터로 내몬 뒤 폭력으로 다스리던 그 못된 버릇을 그대로 본받고 있는 거야!"

20킬로미터 행군 후 중대연병장에서 소대원과 함께(맨 오른쪽 기자, 맨 왼쪽이 소대 향도였던 안 하사. 1970. 1.)
 20킬로미터 행군 후 중대연병장에서 소대원과 함께(맨 오른쪽 기자, 맨 왼쪽이 소대 향도였던 안 하사. 1970. 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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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도 이웃 중대에서 상급자가 LMG(기관총) 총열로 부하의 허벅지를 친다는 게 잘못 허리를 쳐서 후송된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 총열로 맞은 병사는 척추신경이 으스러져 하반신을 못 쓰는 불구자가 될 것 같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러한 구타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온 남의 집 귀한 아들을 평생 불구로 만든 거다. 그래서 백성들은 군대 생활이라면 으레 '빠따'를 연상할 만큼, 군내 구타는 아주 고질화돼 있었다. 이런 점도 그동안 젊은이들이 병역을 기피하고자 하는 하나의 원인이었다.

사실 나도 후보생 시절 여름방학 야영훈련 때 구대장들에게 여러 번 매를 맞았다. 소위로 임관된 후 광주보병학교에서도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았다. 현역 장교도 두들겨 맞았는데 하사관학교나 일반 병사를 훈련시키는 훈련소의 구타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언필칭 자유민주주를 신봉한다는 대한민국의 군대는 아직도 일제 군국주의 잔재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었다. 하긴 일본군이나 만주군 장교, 하사관 출신들이 창군의 주요 인물이었다니 그때의 인습이 하루아침에 청산될 리가 있으랴. 더욱이 그들은 민족 앞에 전과에 대한 속죄도 전혀 하지 않은 마당에.

폭력을 잘 휘두르는 군인이 모범군인으로 표창을 받고 진급이 빠른 세태가 문제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상납 잘하는 썩은 군인이나 부당한 지시에도 맹종하는 군인들이 벼락 출세하는 풍토도 문제다. 우리 중대장도 사단 최우수 중대장으로 표창을 받았다고 했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온갖 비리들이 숨겨져 있었다. 

"안 하사! 사람의 교육은 말로 하는 거다. 물론 말로 안될 때도 있을 테지. 그러나 벌을 줄 때도 폭력을 쓰거나 인권을 유린해서는 안 된다. 정 그렇게 부하를 교육할 자신이 없거든 네 손으로 계급장을 떼라."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시정하겠습니다."
"알았으면 가 봐!"

폭력의 악순환

그를 돌려보내고 다시 내 막사로 돌아왔지만 잠이 싹 달아나 버렸다. '줄 빠다'란 아주 고약한 체벌이다. 소대 내무반장이 '줄빠다를 쳐라'는 명령을 내리면, 나머지 소대원 39명은 즉시 '엎드려 뻗쳐'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 가장 선임이 빠따를 들고 39명의 엉덩이를 한 대씩 친다. 그러면 다음 선임이 일어나 38대의 빠따를 친다. 맨 졸병은 39대를 그대로 엎드린 채 맞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후임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래야 자기도 빠따를 한 대 칠 수 있으니까. 선임들이 빠따를 치면서 후임들에게 하는 말이다.

"야! 억울하면 군대 빨리 올 것이지. 웬 말이 많아. 나는 너보다 먼저 새벽밥 먹고 왔다."

지도자(지휘관)들은 합리성·정당성이 없을 때는 폭력을 휘두른다. 폭력에 시달린 병사들은 전투시에 용감할 수 없다. 병사들은 누구를 위해 싸운다는 확고한 신념이 없을 때 전투력을 상실한다.

전투력을 상실한 군사는 아무리 그 숫자가 많아도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중국 장제스 군대는 다수 병력과 월등한 화력을 보유했지만 마오쩌둥 군대의 소수 병력에 쫓겨 끝내 대만으로 쫓겨갔다. 그 근본 원인은 장제스 군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전투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내가 30여 년 학교에서 지켜본 바, 신입생 가운데 맞은 녀석은 그 이듬해 꼭 후배를 때렸다. 그들이 후배를 때리는 이유도 한결 같았다. '버르장머리가 없다' '선배를 우습게 여긴다' 등이었다. 폭력은 악순환하기 마련이다. 누가 이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 당장 나부터 실천해야 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폭력 사회는 결코 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 없다. 폭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 기자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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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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