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략)…. 심하도다, 달단(達旦:몽골)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어리석음은 짐승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에서 공경하는 바를 알겠으며, 이른바 불법(佛法)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불상과 범서(梵書)를 마구 불태웠으며, 이에 부인사(符仁寺)의 대장경도 남김없이 불태워버렸습니다. 아, 여러 해를 걸려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버렸으니, 나라의 큰 보배가 상실되었습니다. 제불다천(諸佛多天)의 대자심(大慈心)에 대해서도 이런 짓을 하는 데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하략)...' - (대장각판군신기고문/동국이상국집 권 25, [잡저])

1236년(고려 고종 23년), 이규보는 몽골의 침입에 불력으로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대장경의 각판 작업을 맞아 임금과 신하가 함께 기원을 드리는 위의 글에서 200여 년 전 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이라는 국난을 맞아 나라의 힘을 모으기 위해 만들기 시작하여 문종 대에 와서 완성한 옛 대장경의 소실을 이렇게도 안타까워했다.

거란의 침입이 있었던 11세기 초, 외적의 침입을 불심에 기대어 극복하고자 했던 고려 현종의 발원에서 시작하여 문종 대에 와서야 완성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200여 년이 지난 다음에 또 다른 외적인 몽골군에 의해 소실된 사건은, 당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장기항전을 시작한 고려 왕실에는 국난 극복을 위한 중요한 주춧돌 하나가 빠진 것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전쟁의 위기 속에서 불경을 집대성하고 목판을 만드는 작업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싶겠지만, 불교가 국가 통치의 중요한 원리 중 하나로 작용하고, 왕이 법명을 받고, 왕실의 구성원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고려 사회에서 대장경을 판각하는 사업은, 국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2천여 명 승려에 '승시장'까지 섰던 부인사

팔공산 부인사 대웅전
▲ 부인사 대웅전 팔공산 부인사 대웅전
ⓒ 신재화

관련사진보기


지금은 동화사, 파계사 등에 묻혀 일삼아 필자와 같은 답사객이나 신도들이 찾는 곳이지만, 부인사는 이규보의 글에서 보는 것과 같이 고려 시대에는 왕실의 주도로 진행된 대사업이었던 대장경판을 보관하던 곳이었으며, 2천여 명의 승려가 39동의 건물에서 수련하던 대가람이었다. 그런 규모 때문인지 한창때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끼리만 모여 거래하던 승시장(僧市場)이 서기도 했던 곳이다.

그렇게 화려했던 부인사의 영광은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대장경이 소실되고, 임진왜란에 절 자체가 전소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흔적만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0년대에 들어 허상득이라는 비구니 스님에 의해 다시금 절의 모양새가 갖춰지고 최근 들어서 번듯한 법당과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해서 이제는 제법 절의 면모를 세워가고 있다.

하지만, 세월의 이끼가 아직 내려앉지 않은 탓일까. 동화사와 파계사를 잇는 팔공산 순환도로에서 슬쩍 산으로 올라앉은 부인사는 입구의 주차장까지 오르는 좁은 도로를 지나면서 느끼는 부드러운 설렘과, 소담한 부도를 끼고 돌아 오르는 진입과정의 예스러움, 아직 남아있는 석축과 이리저리 지난 시절의 흔적을 찾아 모은 여러 유적의 자국을 지나는 여정에 비해 새로이 들어선 절간의 모습은 마치 풍요롭고 조용하던 시골 마을 가운데에 능력 좋은 사장님이 반듯반듯하게 터를 닦고, 이리저리 밀고 쳐낸 뒤 지어놓은 이층양옥집 같은 느낌이 들어 이질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세를 일으키고, 부처님의 영험함을 받들어 절을 찾는 신도 대중들에게 조금 더 잘 차려진 절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그것을 탓할 수 없이 그저 세월의 더께가 좀 더 얹어지면 더 좋은 모습으로 남을 수 있겠거니 위로할 뿐이다.

그렇지만 일삼아 답사를 오는 이들에게 부인사는 느긋하게 걸어 다니면서 눈여겨 볼 만한 선조들의 흔적들이 있으니, 그 옛날의 영광을 간직한 채, 부인사의 주변 옛터들에서 모아놓은 석등과 누가 보아도 신라의 그것이라 짐작할 수 있는 석탑, 그리고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승탑이 그것이다.

숨결처럼 자리 잡은 부인사의 유물들

부인사부도
▲ 부인사부도(은통당승탑) / 대구유형문화재 제28호 부인사부도
ⓒ 신재화

관련사진보기


부인사 부도의 하단 사자상
▲ 부인사부도(은통당승탑) 하단 일부 부인사 부도의 하단 사자상
ⓒ 신재화

관련사진보기


주차장에서 부인사로 들어서는 입구에 번듯하게 세워진 비석 옆에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자리 잡은 승탑은 그 몸돌에 옅게 새겨진 주인의 이름을 따 '은통당부도'라 불린다. 전체적으로 빼어난 모습은 아니지만 수더분한 조각들 틈에서 아래위를 살짝 오므린 몸돌의 모양이며 하단에 새겨진 배가 볼록하게 나온 동자상, 귀엽게 자리 잡고 있는 사자상들이 고개를 슬쩍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웃음이 나오게 한다.

'은통당승탑'은 원래 절의 서쪽 능선에 쓰러져 있던 것을 유물조사 과정에서 수습된 뒤 분실과 환수, 다시 동국대학교에 갔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동국대학교에 있던 시절, 상륜부를 만들어서 올렸다는데 그래서인지 상륜부가 색이 튀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수더분한 승탑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스님의 승탑치고는 꽤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할 수 있겠다.

부인사 전경
▲ 부인사 전경 부인사 전경
ⓒ 신재화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절의 입구로 올라서면 아름드리나무들이 서 있고 높지 않지만 질서정연하게 쌓아 올린 석축을 마주한다. 그리고 다시 돌계단을 올라서면 그늘진 숲 저편에 동, 서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기의 석탑을 만나게 되는데, 원래는 동쪽의 석탑은 흩어진 부재들을 법당을 중건하거나 서탑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부 사용해버려 상층기단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는데, 절이 새롭게 불사를 일으키면서 화강암으로 번듯하게 세워놓았다. 그에 비해 서탑은 흩어진 부재들을 모아 1960년대에 진행된 유물조사 과정에서 복원하였는데, 전체적으로 신라의 삼층석탑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다만, 서탑의 전체적인 모양이 꽤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는데, 이것은 복원의 과정에서 동탑의 일부 부재들이 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 옛적의 부재들로 복원된 서탑은 그나마 볼 맛이 나는데, 하필 서탑의 옆에 있기 때문일지 몰라도 동탑으로 눈을 돌려보면 마치 갑자기 밝아진 핸드폰 화면을 볼 때처럼 눈을 파고드는 느낌이 들어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석탑을 지나면 삼각형의 꼭짓점을 이루는 부분에 제법 듬직한 석등이 있고, 다시 주불전의 옆에 위치한 명부전 앞의 석등을 만나게 된다.

부인사 서쪽 삼층석탑
▲ 부인사 서탑 / 대구유형문화재 제17호 부인사 서쪽 삼층석탑
ⓒ 신재화

관련사진보기


부인사 동쪽 삼층석탑
▲ 부인사 동탑 부인사 동쪽 삼층석탑
ⓒ 신재화

관련사진보기


석탑 앞에 있는 석등은 역시 유물조사 과정에서 쓰러져있던 것을 다시 세운 것인데, 가까이서 갈수록 생각보다는 크게 느껴지는 모양을 지닌다. 이것은 아마도 석등의 아랫부분을 받치는 기둥의 굵기와 길이에서 영향을 받은듯하다. 왠지 살짝 굵어 보이면서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듬직하게 잡아주는 느낌이다.

그에 비해 석등의 불을 켜두는 화사석은 뭔가 어색한 부분이 있는데, 알고 보니 그 화사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절터에서 수습된 화사석을 가져다 끼운 것이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부인사 석등
▲ 부인사 석등 / 대구유형문화제 제16호 부인사 석등
ⓒ 신재화

관련사진보기


석탑 앞의 석등이 전형적인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모습에서 조금의 변화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면 명부전 앞의 석등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으로 눈길을 잡아끈다.

기둥을 받치는 하대석까지는 다른 석등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 위쪽으로는 완전히 다른 모양, 정확하게는 정면보다 측면이 좁은 팔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런 모양에 맞추기 위해 화사석의 창도 정면에 두 개를 내고 측면에 하나를 낸 형태로 되어있다. 그래서인지 형태의 이질감에서 오는 보는 맛이 생기는 석등이다.

이 명부전 앞 석등도 현재의 절터에서 약 동쪽으로 200m 떨어진 다른 절터에서 찾아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로 온 것인데, 그래서 이 석등에는 '일명암지석등'이라는 이름도 따로 붙어있다.

부인사 일명암지석등
▲ 부인사 일명암지석등 정면 / 대구유형문화재 제22호 부인사 일명암지석등
ⓒ 신재화

관련사진보기


부인사 일명암지석등
▲ 부인사 일명암지석등 측면 / 대구유형문화재 제22호 부인사 일명암지석등
ⓒ 신재화

관련사진보기


답사를 마치고 다시 '은통당승탑' 앞에 서서 멀리 겹쳐지며 흘러내리는 팔공산 자락의 능선들을 바라보았다. 기록대로라면 이 승탑에서 조금 내려가 보이는 건물터가 바로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불에 타버린 대장경을 보관하던 경판고로 추정된다고 한다.

아마도 경판고가 남아있던 시절, 그 이후로도 한동안 부인사는 지금의 절터를 넘어서 사방으로 암자와 건물을 거느리고 수천 명의 수행승들이 오가며, 승시(僧市)가 서는 날이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이곳으로 몰려와 북적였던 대찰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유지되던 사찰은 몽골의 침입, 임진왜란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때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밀려오긴 하지만, 그래도 부인사 곳곳에 흩어져있는 부서진 석재들과 이리저리 끼워 맞춰서라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물들을 보면 '그래도 이것이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우리 역사는 너나 할 것 없이 힘겹고, 굴곡 많은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부인사
▲ 부인사의 옛 석재들 부인사
ⓒ 신재화

관련사진보기


팔공산 부인사
▲ 부인사에서 바라 본 팔공산 자락의 능선들 팔공산 부인사
ⓒ 신재화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 본 기사는 기자의 개인블로그 '바람길닷컴(http://baramgil.com)'에 함께 포스팅 됩니다.



태그:#팔공산부인사, #부인사, #은통당부도, #부인사석탑, #부인사석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여행가를 희망하다. post.naver.com/baramgil73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