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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나기전 만들었던 프라모델들인데, 한동안 창고에 쳐박아 두었다가 다시 꺼냈다. 이제 숨겨두었던 프라모델 조립 본능을 깨울 시기가 왔다.
▲ 완성된 프라모델 로봇 아이가 태어나기전 만들었던 프라모델들인데, 한동안 창고에 쳐박아 두었다가 다시 꺼냈다. 이제 숨겨두었던 프라모델 조립 본능을 깨울 시기가 왔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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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의 생이별, 킹콩보다 더 위협적인 큰 아들

한때, 그들은 나의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텅 빈 집에서 지쳐 퇴근한 나를 반가이 맞아주었고, 거나하게 취한 날이면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지친 기색 없이 나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주말이나 휴일에도 따분할 틈조차 없었다.

그렇게 식구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나는 어떤 책임의식 같은 걸 느꼈고, 그것은 훗날 가장으로써 가족 부양의 책무를 수행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을 거라 믿는다.

그들과의 생이별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으나,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쥬라기 공룡이나 킹콩보다 더 위협적인 큰 아들 녀석이, 며칠 사이에 걸음마를 떼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의 휘젓는 손짓 한 번에 낙엽처럼 나뒹구는 그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그들은 아우슈비츠만큼이나 처참한 골방 창고에 갇히게 된다. 한 줄기 빛조차 허락되지 않은 비좁은 상자에 갇혀 애타게 나를 찾았을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아! 나의 로봇들이여!

프라모델 조립이라는 열정적 취미의 결정적 장벽은 나이도, 주변의 시선도 아니었다. 정상 구조물을 눈뜨고 못 봐주는 사내 아이 둘이 내 가족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방해물이었다.

한 개 조립하는데 적어도 대여섯 시간쯤 걸리는 나의 소중한 피조물들을 아이들 손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뜨려 놓는 일, 그것이 벗들에게 해줄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배려였다. 또한 그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로봇을 만들고 싶다는 의지는 고이 접어두어야 했다.

그 후로 세월은 흘러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듣는 나이가 되었다. 아빠 물건에 손대선 안 된다는 것쯤은 논리가 아닌 눈치로 받아들일 시기가 온 것이다. 이제껏 봉인해두었던 프라모델 조립 욕구가 스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때가 되었다, 로봇 형제들이여!

여기까지 읽고 난 독자라면 의구심 내지는 호기심이 생길 것이다. 배 나온 중년의 아저씨에게 프라모델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지? 라고 묻고 싶어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래 글은 그에 대한 변론 내지는 변명의 글이다. 나잇값 못하는 어느 키덜트의 고해성사쯤으로 해두자.

남자도 때론 혼자 있고 싶어, 중년에게 프라모델은 자연스러운 선택지

그 많은 취미 중에 어째서 프라모델인가? 나이가 든다고 모두 동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표현의 제약을 받는 순수한 감성들을 억지로 누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꽃처럼 해맑은 동심을 긍정적으로 발산하는 데 있어 프라모델만한 것이 또 있을까?

왜곡되고 뒤틀린 방법으로 표출된 동심은 자칫 오해를 사거나 범법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판타지 영화를 선호하듯, 멜로영화에 눈물짓듯 중년에게 프라모델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지인 것이다.

거기에다 남자도 때론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무언가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하루 종일 만화방에 틀어박히고 싶다거나, 여관방을 빌려 밤새 게임기를 부여잡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것보다는 건넌방에 차분히 앉아 열심히 로봇을 조립하는 당신의 남편이 더 순수하고 정열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더구나 완성 후에 느껴지는 성취감은 스트레스까지 한방에 날려버리니 이는 마당 쓸고 돈 줍는 격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을 하나 둘 수집하는 과정은 또 어떠한가?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한 부동산이나 자동차를 모으는 대신, 로봇 완성품을 수집하다 보면 물질에 대한 비뚤어진 소유욕이 승화됨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아내의 성화로 인해 눈물을 머금고 수집한 로봇들을 조카들에게 분배하고 나면, 소유의 덧없음을 깨닫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엿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중년에게 이렇게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취미가 어디 있겠는가?

치매 예방, 각종 술자리 자제, 용돈 불필요... 프라모델 취미의 장점

아이들과 종종 찾는 블럭 대여점. 옆에서 바라보다 보면 어는 순간에 함께 조립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 블럭 대여점에서 열심히 조립중인 아이들 아이들과 종종 찾는 블럭 대여점. 옆에서 바라보다 보면 어는 순간에 함께 조립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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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해서 고해성사는 정리하고,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야 하는 아내들을 설득할 프라모델 취미의 장점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아내들이여, 당신의 남편이 어느 날, 조립식 프라모델 몇 상자를 들고 퇴근했다. 자,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내말을 들어보시라.

남편이 새벽 두시 쯤 간신히 기어들어와 신발장 앞에서 쓰러져 잠이 드는 것보다 백배 낫지 않은가? 프라모델이 지닌 취미로써의 첫 번째 장점은 무척이나 건전하다는 것이다. 땡돌이 남편을 원하는 아내가 있다면 귀 담아 들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둘째로 비교적 저렴한 비용의 취미생활이다. 물론, 일부 덕후들에 의해 소개되는 고가의 수입 프라모델도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의 취향일 뿐이다. 3만원 상당의 타이타닉 프라모델 하나면 1주일은 충분히 보내고도 남는다.

프라모델에 눈 먼 당신의 남편은 더 이상 용돈조차 필요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정기적으로 그가 요구하는 프라모델을 공급해주기만 하면 말이다.

세 번째 장점은 장기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과정은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함을 요구하는데, 이러한 작업들을 반복하다 보면 손을 많이 사용하게 되어 뇌세포가 자극을 받고 이로 인하여 치매예방의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나 일관성 있게 주위가 산만한 남편이 있다면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이다. 거기에 각종 술자리와 모임을 피해서 튼튼해지는 오장육부의 건강은 덤이다.

마지막으로, 프라모델 조립은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다. 일정 연령 이상이 되면 블록이나 조립 완구를 가지고 놀게 되는데, 옆에서 아빠도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자녀들과 함께 프라모델을 조립하다 보면, 대화의 물꼬가 터지고 아빠를 편한 친구처럼 생각하게 된다.

대화 없는 가정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대화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프라모델은 아이들과 공통의 분모를 만들어주는 마법을 지녔다.

마흔을 넘어선 또래들에게 취미삼아 하는 일이 뭐냐고 가끔 묻는다. 골프, 사진, 마라톤 등 그래도 뭐라도 대는 녀석들은 다행인 축에 속한다. 아직도 그런 달달한 것이 우리한테 남아 있냐고 어느 영화 대사처럼 되묻는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쓰릴 때가 있다.

그런 친구들에게 이제 힘차게 권하고 싶다. 시간 나면 어렸을 적에 꿈꾸던 로봇을 만들어 보라고. 일과 사람에 지친 당신을 로봇 태권브이가 꿈속에서나마 위로해줄테니...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8월 19일 <영남일보> 위클리포유에도 게재됩니다.



태그:#프라모델, #아머드 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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