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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유적지 답사

나는 1999년부터 최근까지 국내외 항일유적지를 여러 차례 답사한 바 있다. 그리하여 <항일유적답사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 등을 펴냈다. '답사(踏査)'란 말은 글자 그대로 '내 발로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조사하는 것'으로, 이에는 무엇보다 체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

뤼순 203고지 이령산 전몰자 위령탑 앞에서 기자(2009. 11.)
 뤼순 203고지 이령산 전몰자 위령탑 앞에서 기자(2009. 1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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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나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으로, 안 의사 마지막 행적 156일을 연추마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 뤼순까지 그대로 추적했다. 그때 마지막 답사지는 바로 안 의사가 순국한 뤼순감옥 일대였다.

나는 당시 안중근기념관 김호일 관장의 소개로 다롄대학교 유병호 교수를 만났다. 그분에게 현지 가이드를 부탁하자 다롄안중근연구회 박용근 회장을 추천했다.

나는 그의 안내로 이틀 동안 다롄 시내 일대와 뤼순 일본관동법원, 일아감옥(日俄監獄) 등을 잘 둘러봤다. 마침 시간이 남기에 러일전쟁 최대격전지인 이령산 203고지 안내를 부탁드렸다. 

그러자 박씨는 이령산 중턱 택시정류장에 이른 뒤 기사 핑계를 대면서 거기서 지형 설명으로 끝내려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박씨에게 택시기사에게는 별도 대기료를 더 주겠으며, 당신도 거기서 잠깐 쉬라고 했다.

그런 뒤 나는 그곳 안내판을 보면서 혼자 203고지로 올라갔다. 203고지 정상에 오르자 일본군 전몰자 위령탑과 러시아군 포진지, 일본군 280미리 유탄포 전시장, 203고지 진열관 등, 볼거리가 엄청 많았다. 한참 그곳 전적지를 촬영을 하는데 박씨가 헐떡이며 뒤따라 올라왔다.

"어르신 산삼을 많이 드셨나 봅니다."
"그런 것을 먹은 적 없습니다. 난 육군 보병 출신이요."
"아, 네에."

그밖에 지린성 청산리전적지나 국내 호남의병지 답사 때도 그런 일이 더러 있었다. 독립군 전적지나 의병 창의지역은 대부분 산골 궁벽한 곳이요, 100~200년 이전의 일이라 정확한 현장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전적지를 대충 지나치지 않았고, 내 눈으로 일일이 확인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현장을 찾아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았다.

그러한 내 체력은 고교시절 신문배달로, 그리고 육군보병학교 시절의 훈련, 현역 보병소총소대장 시절에 산야를 누볐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이란 지나고 보니까 좋은 것만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 악전고투한 지난 인생이었기에 앞날을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이나마 건강하게 살아온 듯하다. 그야말로 크고 길게 보면,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되는 게' 인생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세상은 한 차원 더 높은 단계에서 보면 공평한지도 모르겠다.

동방의 귀인

나는 학훈단(현, 학군단)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대학 1, 2학년 때 줄곧 병역연기원을 내야 했다. 2학년 때인 1966학년도 1학기 초 병역연기원을 내고자 학생처에 갔다. 하지만 1차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1차 등록 마감 날까지 등록금을 백방으로 구했으나 허사였다.

나는 다시 학생처에 가서 꼭 2차에 등록을 할 테니 병역 연기원을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담당 직원은 구비서류에 등록금 납부 확인필이 꼭 있어야 하기에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잘랐다.

나는 낙담을 하고 대학 본관 앞을 지나는데 그날은 1차 등록마감일로, 많은 학생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본관 회계과 창구 앞에서부터 본관 앞 미루나무 그늘까지 100미터 이상 기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 줄에 서 있는 고교동창 윤기호가 눈에 띄었다. 그는 고교시절 밴드부원으로 커다란 호른을 불었던 친구였다. 그와나는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만 그렇게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그때 내가 무척 절박한 탓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낯이 화끈거릴 정도로 염치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기호야, 네 등록금 나한테 양보해주라. 나 학훈단 입단하려고, 병역 연기원 때문에 그래. 내 2차 등록 전까지는 꼭 갚을게."
"그래? 알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자기 손에 쥐고 있던 돈을 나에게 건네주면서 아예 자기 자리까지 양보해줬다. 솔직히 그런 온정은 서로 처지를 바꿔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그 친구 덕분으로 그날 등록한 뒤, 즉시 학생처에 병역연기원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듬해 학훈단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때 자기 등록금을 건네준 윤기호(오른쪽) 고교 친구와 함께 일본기행 중 부관페리 선상에서(2008. 4.).
 그때 자기 등록금을 건네준 윤기호(오른쪽) 고교 친구와 함께 일본기행 중 부관페리 선상에서(2008. 4.).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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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훈단 입단

1967년 3학년 새 학기를 앞두고 학훈단에 입단 전형에 지원했다. 신체검사는 무난히 통과했고, 100미터 달리기, 돌멩이를 넣은 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달리기, 철봉대에서 팔굽혀 펴기 등, 체력검사에도 무난히 합격했다.

마지막 신원조회에도 무사히 통과했다. 마침내 학훈단 후보생이 되자 나의 대학생활은 고3 수험생 못지않게 하루 일과가 몹시 팍팍했다.

102 힉훈단 시절 대학 본관 앞에서 중앙도서관을 배경으로(1968. 5.).
 102 힉훈단 시절 대학 본관 앞에서 중앙도서관을 배경으로(1968.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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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 학점이 20여 점에, 교직과목을 매 학기 4~6학점 이상 취득(총 24학점)해야 했고, 학훈단 군사학도 주당 6시간 정도였다. 그러자 주당 30시간이 훨씬 넘는 교육시간이었다.

대학시절 내내 찌든 가난으로 입주 가정교사나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나의 대학생활에는 낭만이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좀 창피한 얘기지만 그 시절 나는 '세시봉'이니 '르네상스'니 하는 음악감상실은 물론, 대학 앞 당구장에도 한번 가 보지 못한 촌닭이었다.

그 무렵 고려대학교는 데모학교라고 불릴 만큼 각종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1965년 입학 때부터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6․8부정선거에 3선 개헌 반대에 이르기까지 대학가의 시위는 재학 내도록 끊어지지 않았다. 그때 나도 다른 학우들만큼 그런 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일반인들이나 일부 학우들 가운데는 학훈단 후보생들은 '바보티시'라고 조롱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명분이 있는 시위에는 거의 참여했다.

내가 오래 살고 보니까 인생길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세상사람들 말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 세상사람들의 말이란 그 사람 처지에서 지껄이기 때문에 내 인생에 큰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인생에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의 신념 속에 일관된 삶을 일생토록 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102 학훈단 본부에서는 대학의 시위 학풍을 어느 정도 눈감아 준 듯했다. 만일 그때 시위 전력 학생들을 모두 찾아 죄다 제적시켰다면, 아마도 102 학훈단 후보생 가운데 절반도 임관치 못했을 것이다. 

대학 재학 중 3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충북 증평 36사단에서 충북대생들과, 대학 4학년 때에는 경기도 소사 33사단에서 인하대생들과 각각 4주 동안 병영훈련을 받았다. 증평 36사단 훈련 때는 물사정이 나빠 무척 고생했다.

어느 하루 구대장이 점심 식사 도중, 식사 군기가 나쁘다고 하여 수채에 버린 짠밥을 입으로 주워먹게 하는 벌을 줬다. 그러자 102 학훈단 교육생들이 주동이 돼서 '우리가 개돼지냐'고 집단 항의를 했다. 그 벌로 연병장에서 몇 시간 동안 단체 기합을 받은 기억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 집단 항의는 해당 구대장의 전출로 일단락되었다.

1968년 11월 졸업을 앞둘 무렵 임관고사를 치렀다. 마지막 신체검사에도 무난히  통과하여 마침내 1969년 2월 2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임관식이 있었다. 학훈단 군번은 성적순이었는데 나는 성적이 좋지 못해 69-021xx번으로 전체 동기생 가운데 2/3선이었다. 병과는 보병이었다.

102학훈단 내에 내 군번은 꼭 중간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 대학교 학훈단 후보생들의 군사학 성적은 대체로 우수하지 못했다.

그 무렵 중앙대, 동국대, 경희대 후보생 성적이 우수했고, 매년 그들이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 국방부장관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지방의 전남대학교, 영남대학교, 동아대 후보생들도 군번이 빨랐다.

1969. 2. 20.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전신)에서 임관식을 마친 뒤 국문학과 동기생들과 기념촬영을 하다(좌로부터 한승옥, 이상길, 박도, 임봉재 소위로 이 가운데 한승옥 숭실대 교수는 지난해 선종했다).
 1969. 2. 20.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전신)에서 임관식을 마친 뒤 국문학과 동기생들과 기념촬영을 하다(좌로부터 한승옥, 이상길, 박도, 임봉재 소위로 이 가운데 한승옥 숭실대 교수는 지난해 선종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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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학교 입교

소위 임관식과 대학 졸업식을 마친 다음 그해 2월 28일 서울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입영열차를 탔다. 이튿날 새벽 송정리역에 하차하자 헌병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했다.

같은 군용열차를 타고 간 포병, 기갑 병과 동기생들은 송정리 역 광장에서 곧장 트럭을 탔다. 그런데 보병들은 집합시키더니 더플 백만 트럭에 싣게 한 뒤 인솔 장교가 명령했다.

"지금부터 구보를 실시한다. 목표 상무대! 뛰어 가!"

그런 정보를 미리 안 동기생들은 이미 지급된 작업복에 군화를 신었기에 구보가 덜 힘들었을 게다. 하지만 그런 정보를 몰랐던 나와 다른 몇몇 동기생들은 육군 정복에 단화를 신은데다가 밤새 열차를 탔기에 새벽 구보가 매우 힘들었다. 인솔 장교는 호루라기를 불면서 군가를 부르게 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 너와 나는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
"원수의 적을 향해 밀어나가자 / 굳세인 우리 앞에 가랑잎이다. / … 우리는 보병이다. 국군의 기둥 / 우리는 보병이다. 국군의 자랑 …."

보병학교에서는 '3보 이상 구보'라는 말의 실체를 첫날부터 시범으로 교육시켰다. 우리들은 단김을 내뿜으면서 상무대로 달려가는데 포병과 기갑병과 동기생들은 "야, 보병 땅개들!"이라는 야유를 하면서 트럭을 타고 우리 구보대열을 휙휙 지나갔다.

나는 3중대 1구대에 배속됐는데 구대장들은 중위·소위로 같은 위관 장교인데도 엄청 무섭고 매우 거칠게 교육생들을 다뤘다. 내무반은 난방이 제대로 안 돼 3월 초였지만 몹시 추웠다. 구대장들은 입교 첫 날부터 도무지 잠을 재우지 않았다. 그들은 각 내무반을 돌면서 조는 친구들을 끌어내 몽둥이로 마구 두들겨 팼다.

첫날 아침, 식사 집합으로 식당에 가서 식판에 배식을 받자 여러 동기생들은 밥맛이 없다고, 보리밥이라고 밥을 거의 남겼다. 다행히 나는 첫날부터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먹었다. 연일 거칠고 고된 생활이 계속되자 눈이 쑥 들어가고 손등이 터지는 등, 춥고 배고픈 날이 계속되자 거의 모든 피교육자들은 죄다 식판에 한 톨의 밥알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대부분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키 마련이었다.

첫 봉급날

하루 종일 교육에 보초근무, 사역 등으로 배가 쉬 꺼지자 동기생들은 배가 몹시 고픈 나머지 한 밤중에 PX로 달려가서 빵을 사먹었다. 그때 우리 동기생들은 어떻게나 빵을 많이 사먹었던지 'ROTC 7기생들은 빵 소위'라는 말이 돌았다. 그 빵을 사먹다가 구대장에게 발각되어 빵을 입에 문 채 각 내무반으로 끌려 다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우리 중대 제3구대장은 김아무개 중위였는데 그는 걸핏하면 몽둥이를 휘둘러 '미친 개'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말로 훈계하기보다 몽둥이로 가르쳤다. 어느 날 나도 다른 동기생들과 그에게 걸려 알철모에 팬티바람으로 세면장에 집합했다.

그는 알철모에 찬물을 가득 받게 한 뒤 물 한 방울도 밖으로 흘리지 말고 온몸에 붓게 했다. 그러자 우리 몸은 금세 동태처럼 얼었다. 구대장은 그런 우리를 엎드리게 한 다음 침대 각목으로 허벅지를 마구 두들겼다. 그때의 피멍은 2주가 지난 뒤에야 풀리기 시작했다.

보병학교 장교교육에서도 몽둥이가 난무했는데, 일반 병들의 훈련소나 하사관학교에서는 구타가 더욱 심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었을 것이다. 군에서 교육받다가 매를 맞아 신체 장애가 된 경우가 많았을 테다.

병영 내 구타와 기합은 훈련소나 기성부대 가리지 않고, 전후방이 없이 전천후로 이루어졌다. 그 무렵은 신병이 전입 오면 먼저 군기를 잡는다고 기합부터 줬다. 이런 구타와 기합은 지난날 일군이나 만주군 시절의 잔재였다. 일제가 자기들이 일으킨 전쟁을 합리화시키고자, 식민지 출신 병에게 무조건 충성을 강요하고자, 폭력을 마구 휘둘렀다. 일군 만주군 출신들이 창군 주요 멤버로 그런 고약한 고질의 악습이 그대로 이어온 결과였다.

사람의 교육은 말로 하는데, 그 말에 앞서 먼저 몽둥이로 패는 것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짐승을 사육하는 짓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사육이다. 사실 폭력은 정당성이 없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육군보병학교 시절 내무반 친구들(왼쪽부터 김정갑, 박도, 조규석, 박기헌 소위. 1969. 5.)
 육군보병학교 시절 내무반 친구들(왼쪽부터 김정갑, 박도, 조규석, 박기헌 소위. 1969.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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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춥고 배고프고 매를 맞는 가운데도 가장 반가운 날은 봉급날이었다. 보병학교에서는 3월 10일 봉급은 사회에 나와 첫 번째로 받는다고, 한국은행에서 갓 나온 신권과 집으로 송금하기 좋게 은행 쿠폰(일종의 수표)으로 지급했다.

첫 봉급을 받자 동기생들은 어머니 속옷값을 보내드린다고 내무반 책상에서 각자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없어 슬그머니 화장실로 가서 실컷 울었다. 그 울음 속에는 불효에 대한 참회가 담겨 있었다.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풍수지탄(風樹之嘆)의 고사가 이리도 가슴을 찌를 줄이야.

후일 교사가 된 이후 나는 그 고사성어를 가르칠 때마다 마음이 몹시 아팠다. 부모에게 효도는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그때 그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체험적으로 알았지만 세월은 결코 기다리지 않았다. 반세기를 지난 지금 나는 그때를 반추하며 눈시울을 적신 채 이 대목을 쓰고 있다. 나는 불효자요, 청개구리였다. 평생 불효의 멍에를 진 채 살고 있다.

(*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 기자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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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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