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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가 화제다. 3일 이화여대는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전 이화여대 설립자인 김활란 동상이 페인트를 뒤집어 썼다. 김활란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활란뿐 아니라 일제시대 이 땅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어떤 선택과 판단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책이 나왔다.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선안나 저, 도서출판 피플파워)이라는 '솔직한 제목'의 이 책은 놀랍게도 청소년용 도서다. 이 책은 각 분야별로 일제시대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7인과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던 7명의 행적을 비교·대조한 책이다. 김활란은 친일반민족행위자 7명에 묶였다.

책에 소개되는 독립운동가·친일반민족행위자 14명 가운데 4명이 여성이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이화여대를 설립한 김활란이다. 도대체 김활란은 무슨 일을 했기에 이화여대 설립이라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름을 나란히 할까?

"김활란, 학교에서 한복 사라지는데 결정적 계기"

김활란의 초기 행적은 크게 2가지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 '개신교'와 '미국'이다. 사업가 집안에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어릴 때부터 개신교에 몸담았다. 그는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으면서 이름마저 '헬렌'의 한자식 음운 표기인 '활란'이 됐다.

영어를 잘 하고 미국인 선교사의 눈에 띄자 어렵지 않게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개신교 단체에서 사회활동을 했다. 미국 유학을 통해 1931년 조선 여성 최초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된다. 그의 박사논문 제목은 <조선의 부흥을 위한 농촌계몽>이라고 한다.   책에 따르면 이 논문에는 일제 침략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으며 조선총독부를 '정부'라고 칭했다고 한다. 게다가 대부분 일제 어용도서를 참고해 만든 논문은 내용이 부실했다고 한다. 1932년 <비판>이라는 잡지는 김활란의 논문을 "조선에서 발표됐더라면 그날의 휴지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며 "조선 사정에 어둡고 호기심을 가질 만한 미국으로 들고 가서 발표했다는 것이 훌륭한 처세술"이라고 했다.  
김활란
▲ 김활란 김활란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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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박사학위를 받은 김활란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문맹 퇴치, 금주, 금연, 절약, 저축, 미신타파 등 일제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사회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 와중에 수차례 독립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이 왔지만 "나는 여성 교육을 통해서 조국의 발전과 독립에 이바지하겠습니다"라는 애매한 말로 넘겼다고 한다.

김활란이 본격적으로 친일반민족 행적을 시작한 것은 1936년 12월 조선총독부 주최 방송교화선전협의회 부인 강좌반 강사를 맡으면서다. 이때 참여한 강사들을 중심으로 친일단체인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결성됐는데 김활란은 상무이사를 맡았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애국금차회도 김활란은 주역으로 활약했다.

애국금차회는 금비녀와 금반지를 모아 국방헌금으로 일제에 전달하는 것이 주요 사업이었다. 이후 열혈 개신교 신자였지만 '조선신궁을 중심으로 일본정신 발양을 목적으로 하는 기원제' 발기인 및 준비위원이 됐고 종교적 신념을 깨고 이화여대 학생들을 신사참배 시켰고 이후 강제징용, 징병, 근로정신대 모집에도 적극 나서는 등 숱한 친일반민족 행적을 남겼다.

특히 놀란 점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복을 처음 입도록 한 것이다. 당시 일제는 초·중학교까지는 한복을 버리고 교복을 강요했지만 전문학교까지는 교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활란은 전문학교 가운데 처음으로 교복을 입도록 했다.

이때 극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김활란은 '단체생활상 필요한 일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웠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이 일은 학교에서 한복이 완전히 사라지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한 마디로 그는 일제가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부분까지 '창조적'으로 행동하는 적극적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청소년용 도서지만 친일과 독립운동 대담하게 다뤄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 표지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 표지
ⓒ 피플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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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들이 무슨 짓을 했어요?"
"독립운동가들이 하신 일이 뭐죠?"

중·고등학생들에게 막상 이런 질문을 '당하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친일파들은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막연한 말로, 독립운동가들은 안중근·윤봉길 의거·김구 선생·3.1운동 등 몇 명을 간신히 입에 올릴 따름이다. 하긴 배운 게 그것 뿐이니 어쩌겠는가. 교과서에서도 몇몇 사례만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갈 뿐이고 심지어 학교 수업에서도 일제강점기 후반부터는 '진도'에 밀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는 뭔가 막연히 '느낌'으로 머리가 굵어지는 아이들에게 궁색한 답을 하다가 얼버무리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아이들도 훗날 자녀에게 또 궁색한 답을 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교과서에서 해줘야 한다. 교과서에서 당시 시대상황을 충분히 설명한 뒤 양쪽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비교·대조하면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과서는 책임을 방기했으며, 그나마 일부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쓴 책들은 정작 중요한 내용 -특히 사회주의와 관련된- 것들은 빼 버리고 이야기식으로 억지 짜맞추기를 하거나 미화한 것이 많다.

결국 제대로된 답을 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 저자 선안나씨는 동화작가 특유의 간결한 문장력으로 청소년들의 이해를 돕고,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 가운데 14사람을 선정하고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묶었다.

[명문가]이회영vs이근택
[사업가]안희제vs김갑순
[여성]남자현vs배정자
[문학]이육사vs현영섭
[언론]안재홍vs방응모
[개화여성]김마리아vs김활란
[군인]장준하vs백선엽

명단 중 앞에 나오는 사람은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사람이고, 뒤에 나오는 사람은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사람이다. 특히 이 책은 청소년용 도서 치고는 대담하게도 장준하, 방응모, 김활란, 백선엽 등 민감한 사람까지도 함께 다뤘다. 예를 들면 백선엽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그가 일본에서 발간한 자서전을 언급하기도 한다.

"(중략)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간토토벌대로)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 - 본문 297쪽. 

현존하는 '권력'인 <조선일보>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소개했다.

"해마다 1월 1일이면 1면 조선일보 상단에 일왕 부처의 사진과 요란한 찬양 기사도 실렸습니다. 일왕 생일을 기념하는 명치절에는 축하행사를 소개하고 찬양 사설을 싣는 한편 일본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는 '황국신민서사'를 일본어로 게재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 -  본문 206쪽. 

독립운동을 덮어 놓고 미화하기 보다는 사실을 최대한 정확하게 쓰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임시정부는 어려운 형편에서 파벌싸움이 극심했습니다. 장준하와 청년들은 과격한 저항을 하며 격렬히 문제제기를 했지만 서로 갈등만 깊어질 뿐이었습니다. 결국 학도병 출신 청년들은 삼십 리 정도 떨어진 토교라는 곳으로 옮겨가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 -본문 275쪽. 

"소련으로 넘어간 독립군 부대는 자유시 참변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습니다. 소련의 지지를 받는 독립군과 소련군이, 소련의 지시를 거부하는 독립군을 공격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들도 여러 갈래로 흩어져 서로 다른 분파가 전투를 벌이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 -본문 103쪽. 

이처럼 이 책은 충실한 자료를 바탕으로 청소년에게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또한 일제시대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주인공들의 행적도 충실히 다뤘다. 따라서 청소년 뿐 아니라 어른들도 충분히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책이다.

물론 양쪽의 인물을 비교·대조하는 방식을 썼기 때문에 살짝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겪었다.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사람은 자신의 실적을 쌓고 해방 이후까지 화려한 삶을 살았다. 이 두 부류의 간극이 너무나 크다는 점이다. 사실 어린이가 읽는 동화책에서 조차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삶이 갈리는 것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책 저자는 '독립운동가들이 정의다'라고 하고 싶었겠지만 '공무원이 꿈'인 청소년들이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슬쩍 걱정이 되기도 한다. 독립운동가들의 엄청난 고난을 보면서 혹여 청소년들이 염세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낫다고 생각할까 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가 겪은 '냉정한 역사적 현실'이 그것인 것을.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 - 광복을 염원한 사람들, 기회를 좇은 사람들

선안나 지음, 피플파워(2016)


태그:#김활란, #선안나, #피플파워,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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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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