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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10주기전과 천경자 1주기전 기자간담회. 김홍희 관장은 전시담당자와 함께 전시전반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플럭서스를 대표해 덴마크출신 플럭서스작가 '에릭 앤더슨'도 참가하다
 백남준 10주기전과 천경자 1주기전 기자간담회. 김홍희 관장은 전시담당자와 함께 전시전반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플럭서스를 대표해 덴마크출신 플럭서스작가 '에릭 앤더슨'도 참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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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서소문 본관 3층)이 백남준 10주년 추모전을 맞아 독일 브레멘과 파리와 대만 등에서 대여해온 백남준 관련 작품 15점과 플럭서스 관련 작품 200여점을 7월 31일까지 함께 전시한다. 플럭서스는 백남준과 운명을 같이한 예술적 고향으로 20세기미술사에 빛나는 파격적이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운동을 펼쳐왔다.

1950년대 말 이후 미국의 잭슨 폴록(1912~1956)의 사망 등으로 추상표현주의의 위세가 수그러지면서 그 대안으로 예술의 상품화와 물질화, 자본과 결합된 엘리트주의를 반대하면서 일체의 경계를 허물고 삶과 예술을 연결시키려는 '플럭서스'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20세기초 기존체제를 모두 거부하며 일어난 다다이즘 일부는 계승했다.

여기에 참가한 작가는 화가 뿐만 아니라 음악가, 무용가, 시인, 건축가, 영화제작자, 행위예술가 등 다양하다. 특정 예술장르로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만큼 통합예술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다양한 형식과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만발했다. 이런 총체성은 20세기 초에 시작한 '바우하우스(1919-1932)'의 미적 세계관과도 통한다.

이번 전시는 '플럭서스의 방'과 '백남준의 방'으로 나눈다. 플럭서스 방으로 가면 아이디어 뱅크 같은 개념작품이 많다. '벤 패터슨'의 '20세기 예술의 작은 역사(1993년)'에서는 "뒤샹으로부터 뉴 아트, 케이지로부터 뉴 뮤직, 커닝햄으로부터 뉴 댄스가 시작됐고, 그 끝은 '플럭서스다"라고 했는데 플럭서스가 20세기 예술의 모태임을 자부한 말이다.

플럭서스의 대부는 '존 케이지'

서울시립미술관 3층 '백남준의 방'에 전시된 영상자료 및 작품들 왼쪽 상단에 백남준이 1961년 '오르기날레' 공연과 1962년 플럭서스 개막공연에서 선보인 '머리를 위한 선' 영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 3층 '백남준의 방'에 전시된 영상자료 및 작품들 왼쪽 상단에 백남준이 1961년 '오르기날레' 공연과 1962년 플럭서스 개막공연에서 선보인 '머리를 위한 선' 영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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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럭서스 운동의 대부는 역시 존 케이지, 그는 백남준에게도 큰 영감을 줬다. 그는 작곡에서 '화음'보다 '소리'를 중시했다. 화음은 귀하게 취급받고 소음이 천하게 취급받는게 불만이었다. 마르셀 뒤샹의 열렬한 추종자인 그는 "예술가란 완성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보는 자"라는 뒤샹의 말에 공감해 작가의 의도보다 관객의 반응을 더 중시했다. 

존 케이지는 주역이나 선불교를 접하면서 이를 작곡에 응용했다. 그래선지 우연성과 즉흥성을 중시했다. 백남준은 그가 동양사상을 근거로 작곡을 하는 걸 처음엔 미덥지 않아 했지만 그의 작품 '침묵'을 주제로 한 '4분 33초'를 듣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존 케이지와 백남준의 스승이 똑같이 무조음악가 '쇤베르크'라는 점은 흥미롭다.

또 그는 '르네 샤르(René Char)'가 한 "모든 동작은 처녀림이다(L'acte est vierge)"라는 말을 재해석해 '소음, 기계소리, 닭 우는 소리 심지어 우리 몸에 흐르는 피 소리' 등등 모든 소리를 처녀림같이 신비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음악으로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존 케이지는 "우리가 하는 모든 게 음악(Everything we do is music)"으로 봤고 "모든 신체의 움직임이 다 춤이다"라고 한 미국의 전설적 안무가 '머스 커밍햄'과 후에 친구가 되어 두 사람은 평생 춤과 음악을 융합하고 통섭하는 예술을 했다.

플럭서스가 생기기 이전부터 백남준은 그의 스승격인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전시를 1959년과 1960년에 선보였고, 여기서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충격적 퍼포먼스를 펼쳤다. 1961년엔 '슈톡하우젠'이 작곡한 '오르기날레(Die Originale)'에 출현해 선(禪)을 주제로 한 탁월한 역량을 보여 이 분야에서 뉴 스타로 부각되었다.

플럭서스와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요셉 보이스'를 상징하는 두 가지는 바로 평화를 상징하는 '토끼'와 예술가의 카리스마를 상징하는 '모자'다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요셉 보이스'를 상징하는 두 가지는 바로 평화를 상징하는 '토끼'와 예술가의 카리스마를 상징하는 '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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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무명시절인 1960년부터 '요셉 보이스'와 친구였는데 플럭서스에서 더 가까워졌다.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 때 그가 찾아왔다. 백남준의 전시의도를 알아차리고 전시장에 설치된 피아노를 도끼로 때려 부셔 백남준을 즐겁게 해줬다.

보이스는 "모든 사람은 다 예술가다"라는 말로 유명해졌다. 그는 또 1965년에 이성이라는 미신을 믿는 사람보다 차라리 토끼가 자신의 말을 더 잘 알아들을 거라며 토끼에게 현대미술을 설명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기인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독일에서 국보급 작가가 된다. 월계관처럼 그의 모자는 이런 위상에 걸맞게 그의 카리스마를 상징한다.

그리고 백남준은 1962년 플럭서스 창립공연에서 '오르기날레(1961)'에 이어 '라몬테 영'의 "직선을 하나 그리고 그걸 따라 가라"라는 말대로 잉크와 토마토주스를 섞어 그걸 머리에 붓고 붓처럼 그리는 '머리를 위한 선(Zen for Head)'도 선보인다. 이런 백남준은 외국까지 두루 소문이 나 1964년에는 뉴욕아방가르드축제에 초대받기도 했다.

백남준은 그의 비디오아트를 발명하기 전 여기서 과격한 예술실험을 했고 그의 첫 전시를 구상하는데 영감도 받았다. "백남준 없이 플럭서스 없고 플럭서스 없이 백남준 없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다. 백남준은 한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플럭서스가 뭐냐?"고 질문 받자 백남준은 "이건 나의 젊음, 나의 순결, 아주 순수한 이상이었다"고 답한다.

플럭서스의 창시자 '마키우나스'

백남준 I '조지 마키우나스' 빈티지TV, 라디오캐비닛, 바이올린, 개구리, 망치, 소니TV, 안경, 전화기 234×190×60cm 1981 ⓒ 정영삼 잘린 넥타이는 반권위주의의 상징한다
 백남준 I '조지 마키우나스' 빈티지TV, 라디오캐비닛, 바이올린, 개구리, 망치, 소니TV, 안경, 전화기 234×190×60cm 1981 ⓒ 정영삼 잘린 넥타이는 반권위주의의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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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는 '마키우나스(1931~1978)', 그는 리투아니아 태생이고 부모는 건축가와 발레리나였다. 1944년 구소련이 쳐들어오자 미국으로 이민해 건축을 전공했고 다시 그래픽디자이너로 독일 미 공군기지인 비스바덴에서 근무했다. 여기서 전자음악의 창시자 '슈톡하우젠'을 만났고 1962년 9월엔 여기서 플럭서스 첫 공연을 올렸다.

마키우나스와 백남준은 서로 잘 통했는데 둘이 다 약소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윤회설을 믿었고 마키우나스는 환생하면 개구리가 될 거라며 장난스럽게 그를 개구리 판화로 그리기도 했다. 둘은 나중에 유명예술가가 되어 정치발언도 하고 싶어 했다.

[플럭서스 자료화면] https://www.youtube.com/watch?v=cGZ9OS1Oj14

마키우나스가 이 단체의 이름을 '플럭서스(fluxus)'라고 한 것은 역시 영어단어에서 '흐른다(flow)'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플럭스(flux)'에서 온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정신의 골자를 담는 예술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건 또한 고대철학자 헤라클레토스가 말한 "만물은 창조의 흐름에서 유전한다"는 문맥과 같은 것이다.

반서구적인 플럭서스 선언문

전시장 3층 '플럭서스의 방'에서 전시된 마키우나스가 1963년에 쓴 플럭서스 '선언문(Manifesto)' 일부분.
 전시장 3층 '플럭서스의 방'에서 전시된 마키우나스가 1963년에 쓴 플럭서스 '선언문(Manifesto)'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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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마키우나스가 뉴욕 소호에 플럭서스 본부를 만들고, 발표한 선언문을 살펴보면 "부르주아의 병폐와 지적이고 전문적이며 상업화한 문화를 추방하라. 죽은 예술, 모방적이고 인위적 예술과 추상적이고 환영적이고 수학적인 예술을 추방하라. 융합적인 가치는 수용하고 유럽주의(Europanism)는 추방하라"라고 적고 있다.

이런 사상의 배경은 바로 악명 높은 나치즘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서구의 이성주의·과학주의·합리주의가 꽃피운 상징처럼 선전했으나 실은 대학살의 주범이었다. 이 회원들이 서구중산층의 교양상징인 피아노에 못을 박고 그걸 톱으로 자른 이유다. 백남준은 바이올린을 개처럼 질질 끌고 다니면서 서구의 근대주의를 조롱했다.

플럭서스는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구분을 없애고 무엇보다 예술의 지방화, 문화의 민주화에 힘썼다. 결과보다 삶의 과정을 즐기고 소멸의 미학이라고 할까 무목적이고 무소유적인 삶의 양식을 실험했고 아는 척, 고상한 척 하는 스노비즘을 경멸했다.

당시 플럭서스는 돈도 없고 명성도 없었기에 기존 미술계로부터 무시를 당했지만 이런 예술적 소외에 대항하기 위해 투쟁했고 그 무기는 바로 '우정의 철학'이었다.

이들의 이상향이 담긴 '플럭서스 섬(지도)'을 보면 이들의 취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아나키즘과 보헤미안 기질에 노장사상과 선불교(Zen buddhism)까지 섞여 있었다. 정신주의·관념주의를 배격하고 몸을 중시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며 기존 예술과는 반대로 갔다. 그들의 엉뚱한 짓은 사람들 눈에는 정신병원에 나온 환자로 보이기도 했다.

플럭서스 회원은 누구누구인가?

3층 '백남준의 방'에는 다양한 영상도 소개된다. 백남준, 멜방이 흘러내린 채 미국의 역대대통령을 조롱하는 듯한 표정이다. 여기 백남준 모습에서도 재미와 장난기로 심각하지 않은 예술을 하려 한 플럭서스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3층 '백남준의 방'에는 다양한 영상도 소개된다. 백남준, 멜방이 흘러내린 채 미국의 역대대통령을 조롱하는 듯한 표정이다. 여기 백남준 모습에서도 재미와 장난기로 심각하지 않은 예술을 하려 한 플럭서스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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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운동 멤버로는 앞에서 언급한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가 있다. 존 케이지는 1956년부터 1961년까지 뉴욕 '뉴스쿨'에서 현대음악을 가르쳤는데 그 강의를 들은 음악가 '조지 브레히트', '라 몬테 영' 그리고 '딕 히긴스' 등도 다 이 단체에 가입했다.

이밖에도 퍼포먼스의 창시자 '앨런 카프로우'를 비롯해, 비트세대 시인 '긴즈버그', 뮤지션 '벤 패터슨', 안무가 '트리샤 브라운', 프랑스작가 '보티에', 여성 퍼포머 '앨리슨 놀즈', 독일시인 '토마스 슈미트', 데콜라주(décollage)작가 '볼프 포스텔', 영화감독 '조나스 메카스' 이번에 서울에 온 덴마크 출신의 '에릭 앤서슨' 등등이 있다.

이 단체는 동서의 경계 없는 국제주의 원칙을 채택했기에 한국의 '백남준'을 물론 일본의 '오노 요쿄', '구보타 시게코', '미에코 시오미' 등 아시아 작가도 참여하게 된다.

특히 그 과격성에서 존 레논 부인 오노 요코와 백남준 부인 구보타 시게코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요코는 1964년 도쿄에서 자신이 입은 옷을 가위로 조금씩 잘라내게 하는 '자르기(cut piece)'를 선보였고, 시게코는 1965년 뉴욕에서 백남준의 기획으로 여성의 성기에 붓을 꽂아 그림을 그린다는 '버자이너 페인팅'을 선보였다.

위 사진에서 보듯 이 운동은 미디어와 미디어를 연결하는 '인터미디어'(intermedia)를 중시했고 소통과 관객의 참여로 완성되는 방식을 취했다. 붓 대신에 피아노, TV 같은 전자매체도 도입했고, 기존가치의 해체와 파괴를 통해 새로운 예술의 물꼬를 텄다.

백남준은 1992년 12월 19일 뉴욕에서 플럭서스 운동에 이렇게 평가했다.

"플럭서스는 서방에서는 문화혁명을, 동구에서는 정치혁명(회원 중 '하벨'은 체코대통령, '란즈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 대통령이 되다)의 공을 세웠다. 우리는 약소국과 강대국 작가들이 작업을 하면서도 내분이 없었던 유일한 예술운동이다. 왜냐면 위계질서 묶이지 않고 글로벌한 우애를 꽃피웠기에 그리고 우린 무궁화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질긴 꽃이었다"

'크라잉 스페이스(추모의 공간)'

초기 플럭서스 멤버 에릭 앤더슨 모 방송매체와 인터뷰하는 모습. 아래는 그의 작품 '크라잉 스페이스' 2016. 눈물이 날 할 정도로 강력한 형광색을 쓰다. 한국의 농기구인 돌절구나 지게도 보여 친근감이 더 간다. 이 작품은 컴퓨터를 통해 전 세계에 실시간 중계된다.
 초기 플럭서스 멤버 에릭 앤더슨 모 방송매체와 인터뷰하는 모습. 아래는 그의 작품 '크라잉 스페이스' 2016. 눈물이 날 할 정도로 강력한 형광색을 쓰다. 한국의 농기구인 돌절구나 지게도 보여 친근감이 더 간다. 이 작품은 컴퓨터를 통해 전 세계에 실시간 중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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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플럭서스 초기멤버인 덴마크 출신 '에릭 앤더슨(1940-)'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백남준을 위해 헌정 작으로 장소 특정적 작품인 '크라잉 스페이스'(추모의 공간)를 선보였다. 앤더슨은 여기서도 플럭서스의 정신을 '액체'에 비유해 흥미롭다.

백남준은 플럭서스와 어떤 관련성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백남준은 1957년 독일에 도착했는데 당시 유럽은 실험적인 전자음악으로 새로운 예술을 시도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마침 현대음악을 전공한 백남준에게 딱 맞는 개념이었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크라잉 스페이스'는 가장 약한 눈물이 가장 단단한 바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옛 그리스 신화에 근거한 이야기"라며 "액체의 속성을 지닌 플럭서스는 고체와 같은 사회를 바꾸려 했다는 면에서 진정한 예술혁명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눈물(액체)로 바위(고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개념은 강대국 사이에서 오랫동안 고난을 역사를 살아온 우리에겐 잘 맞는 말이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라는 우리의 속담을 떠올리면 이 말을 너무나 쉽게 이해가 된다. 앤더슨은 그럼에도 이곳이 슬픈 눈물의 공간이 아니라 기쁜 눈물의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주문했다.

3층전시실 '백남준의 방' 작품들

백남준 I 'W3' 64개 모니터 1994 ⓒ 학고재갤러리 소장[뒷면] / 백남준 I '자화상 달마 휠' 소형마차, 골동품 TV케이스, 모니터, 멀티미디어플레이어, 마차받침대 등 158×126×149cm 1998 ⓒ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앞면 왼쪽] / 백남준 I '이지 라이더(easy rider)'1995 [앞면 오른쪽]
 백남준 I 'W3' 64개 모니터 1994 ⓒ 학고재갤러리 소장[뒷면] / 백남준 I '자화상 달마 휠' 소형마차, 골동품 TV케이스, 모니터, 멀티미디어플레이어, 마차받침대 등 158×126×149cm 1998 ⓒ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앞면 왼쪽] / 백남준 I '이지 라이더(easy rider)'1995 [앞면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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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백남준 방'에 들어가면 볼거리가 많다. 뒤 벽에 64개TV로 만들어진 'W3(WWW)'이 보인다. 이 작품은 백남준이 1974년 '전자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라는 제안서를 록펠러재단에 내고 심사를 통해 기금을 받아, 20년 후에 구현한 것이다. 이 제목은 인터넷주소를 말한다. 인터넷개념은 이렇게 백남준 발명품임을 알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인 '달마 힐(오른쪽)'은 백남준의 자화상이다. 역시 그의 전자아트의 진수를 보여준다.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휠체어에 몸을 맡겨온 자신의 모습을 배설물로 하체가 녹은 '달마'의 고행에 비견하며 바퀴의자를 탄 로봇으로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1969년 미국 SF영화 '이지 라이더(easy rider)'에 영감을 받아 만든 왼쪽 동명의 작품은 온 인류가 언제 어디서나 더 쉽게 소통하는 세상을 염원하는 게 주제다.

여기서 보여주는 현란한 전자 빛은 참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국의 전통 굿에서 경험할 수 있는 원시적 생명력이 첨단의 전자과학과 만나고 거기에 예술가의 놀라운 상상력이 합쳐져 21세기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시집 간 부처'와 백남준 영상자료

백남준 I '시집 온 부처' 이층장식장, 부처조각, TV, 메모, 사진, 포스터, 훈장, 88올림픽 뱃지 120×45×160cm 1989-1992 ⓒ 유가족소장품
 백남준 I '시집 온 부처' 이층장식장, 부처조각, TV, 메모, 사진, 포스터, 훈장, 88올림픽 뱃지 120×45×160cm 1989-1992 ⓒ 유가족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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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번에 유가족이 보관해오다 처음 공개된 '시집 간 부처'는 처녀가 시집갈 때 가져가는 앤티크 이층장식장을 활용한 것이다. 여기 이층장에 놓인 물건을 보면 가족과 찍은 사진이 많은데 이는 평생 고국을 떠나 살면서 그리워했던 혈육애 때문이리라.

또한 훈장도 보인다. 이는 아마도 백남준이 뉴욕 구겐하임전시와 새천년준비위원 활동 공로로 2000년 '문화의 날'에 김대중 정부로부터 받은 '금관문화훈장'인 것 같다. 백남준은 당시 이 소식을 듣고 "내가 이런 상을 탈 줄 알았다면, '백'씨 아닌 '천'씨 성을 타고 나 천년을 두고 훌륭한 작품을 더 많이 만들었을 텐데"라는 위트 넘치는 유머도 남겼다.

끝으로 전시장중앙에 2개 영상자료가 있다. 재불작가 '김순기'가 백남준과 나눈 인터뷰 '봉주르 백남준(1982)'와 MBC광복50주년 '세계 속 한국인 백남준(1995)'을 볼 수 있다. 삼성가보다 더 부잣집 아들이었던 백남준이 경기중 다닐 때 어떻게 맑시즘에 빠져 박정희 형인 '박상희'가 주동한 '대구사건(1946)'에 행동대장이 됐는지 등도 소개된다.

[관련기사 : '재벌가' 막내아들은 왜 마르크스에 빠졌을까]

[천경자 1주기 추모전: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사람이다]
-서울시립미술관 2층에서 2016년 8월 7일까지

천경자 I '환상여행(미완성)' 종이 위 색채화 130×61.5cm 1955 ⓒ 서울시립미술관소장
 천경자 I '환상여행(미완성)' 종이 위 색채화 130×61.5cm 1955 ⓒ 서울시립미술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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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백남준10주년 추모전(3층)과 함께 '천경자 1주기 추모전(2층)'은 8월 7일까지 열려 백남준전보다 1주일이 더 길다. 서울시에 기증된 작품 93점과 전체와 함께 개인 컬렉터의 주요작품이 '인생-여행-환상' 3가지 주제 하에 작가의 글, 사진, 기사, 삽화, 영상, 아카이브 등 총 100여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부제는, 작가의 저서 <자유로운 여자>(집현전, 1979)에 등장하는 문장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 어디서 일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들-그 위에 인생이 떠있는지도 모른다"에서 인용한 것으로, 미술관 측은 작가가 삶을 통해 겪은 희로애락의 세계를 관객도 공감하도록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녀의 작품 중 가장 독창적인 건 뱀 그림인 '생태(1951)'이다. 자신도 뱀을 너무 무서워하지만 자신을 넘어서보려는 하나의 시도로 이걸 그려봤다고 털어놓았다. 이번에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환상'시리즈로 작가가 그리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을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화려한 색채를 통해 환상적으로 그려냈다.

[천경자전시연계 심포지엄] 2016년 8월 6일 늦은 1시부터 6시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지하1층 세마홀에서

덧붙이는 글 | <백남준∞플럭서스전(전시장3층)> 작품 해설 및 도슨트 설명 시간: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전시정보] http://sema.seoul.go.kr/korean/exhibition/exhibitionView.jsp?seq=487
<천경자전(전시장2층)> 작품 해설 및 도슨트 설명 시간: 오후 1시, 오후 4시
[전시정보] http://sema.seoul.go.kr/korean/exhibition/exhibitionView.jsp?seq=488



태그:#백남준, #플럭서스, #마키우나스,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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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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