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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공순의비와 비각(사하구청 누리집 사진)
 정운공순의비와 비각(사하구청 누리집 사진)
ⓒ 사하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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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선조 27) 8월 12일자 <선조실록>을 읽는다. 선조가 '임진년(1592) 이후 우리 군대가 크게 위축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退縮何也)?' 하고 묻는다. 류성룡이 '정운이 죽은 후 수군의 사기가 꺾인 탓에(舟師退挫) 교활한 적들에게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정운이 죽은 후 조선 수군의 사기가 크게 꺾였고, 그래서 아군이 물러서기만 하고 기세가 크게 약해졌다? 정운에 대한 조선 수군들의 신망이 아주 대단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언해주는 기록이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이 부분보다도 더 세간의 주목을 받는 정운 관련 내용이 있다. 1594년(선조 27) 11월 12일자에 실려 있다.

이날 정곤수는 '정운이 이순신에게 "장수(이순신)가 만일 가지 않으면 전라도는 반드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기 때문에(以此迫脅) 이순신이 할 수 없이 가서 (적을) 격파했다 합니다(舜臣不得已往擊云矣).' 하고 선조에게 말한다.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1543∼1592)이 직속 상관인 전라좌수사 이순신(1545~1598)을 협박(!)했다는 놀라운 기록이다.

이순신을 협박(!)하는 녹도만호 정운

정운공순의비 전경(사하구청 누리집 사진)
 정운공순의비 전경(사하구청 누리집 사진)
ⓒ 사하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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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공이 전함을 이끌고 좌수영의 앞바다에 주둔하였지만 나아가 싸우려 들지 않았다. 정운 공이 칼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아가 눈을 부릅뜨고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영남을 격파하고 전승의 기세를 타고 한없이 밀어붙이고 있으니, 그 형세가 반드시 한꺼번에 수륙(水陸) 양쪽으로 전진할 것입니다. 공은 어찌하여 이처럼 망설이며 출전할 뜻이 없습니까?" 하면서 말소리와 안색이 모두 상기되니, 이순신이 기가 질려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공이 이내 선봉을 자청하여 곧바로 바깥 바다로 나아가 전투에 임하였다.'

<국조인물고>에 수록되어 있는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문장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도 활약했던 안방준은 정운의 '유사(遺事)'에 그렇게 썼다. 물론 <난중일기> 1592년 5월 1일자 기록은 <선조실록> 및 <국조인물고>의 표현과 다르다. 말 그대로 '아 다르고 어 다르다'이다. 이순신은 '수군이 일제히 앞바다에 모였다. 이날은 흐리되 비는 오지 않고 마파람만 세게 불었다. 진해루에 앉아서 방답첨사, 흥양현감, 녹도만호 등을 불러들이니, 모두 분격하여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모습이 실로 의사들이라 할 만하다.'라고 썼다.

정운공순의비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사하구청 누리집 사진)
 정운공순의비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사하구청 누리집 사진)
ⓒ 사하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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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은 1592년 9월 1일 조선 수군이 부산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둘 때 맨 앞에 서서 분전하던 중 적탄에 순절했다. 이날 부산포전투는 적선 400여 척 중 100여 척을 격파하고, 수를 셀 수 없는 적군들을 깊은 바닷물 속에 가라앉힌 대첩이었다. 아군 피해는 녹도만호 정운과 병사 5명의 전사, 그리고 26명의 부상이 전부였다.

하지만 정운의 전사는 <선조실록>이 말한 바와 같이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순신도 정운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나라가 오른팔을 잃었도다(國家失右臂矣)!" 하고 탄식했다. 그 후 세월이 한참 흐른 1798년(정조22), 다대포첨사로 부임한 정운의 8대손 정혁(鄭爀)이 몰운대에 공을 추모하는 높이 172㎝, 넓이 69㎝, 두께 22㎝ 규모의 순의비를 세웠다.

정운 전사 소식 들은 이순신 "나라가 오른팔을 잃었구나!"

순의비의 본문은 이조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지었고, 글씨는 훈련대장 서유대(徐有大)가 썼다. 비면에는'忠臣 鄭運公 殉義碑(충신 정운공 순의비)' 여덟 자가 새겨져 있고, 비음(碑陰: 비신의 뒷면)에는 정운 공의 순절사적(殉節事蹟)이 18행에 걸쳐 소상하게 밝혀져 있다. 그 이후 비석은 저 홀로 오랜 세월 동안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는데, 1972년에 이르러 부산시 기념물 20호로 지정되었고, 다시 1974년 부산시가 비각을 세웠다.

다대포 몰운대에서 보는 다대포 객사(부산 유형문화재 3호) 건물로, 본래 다대포첨사가 머물던 다대포첨사영(營) 터인 구 다대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1970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다대포 몰운대에서 보는 다대포 객사(부산 유형문화재 3호) 건물로, 본래 다대포첨사가 머물던 다대포첨사영(營) 터인 구 다대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1970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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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정운공 순의비'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기록은 <선조실록>과 <국조인물고>, 그리고 <난중일기>의 내용을 적절히 절충한 듯한 문맥을 보여준다. 부산직할시 발간 <부산의 문화재>에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비문을 읽기 좋게 가다듬어가며 발췌독으로 살펴본다.

'왜적이 온 나라의 병력을 동원하여 침략해와 먼저 영남 일대를 함몰시키니 임금이 위급한 소식을 듣고는 서쪽으로 용만(龍灣, 의주)으로 피란하시었다. 이때 충무공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수하 장수들을 소집, (왜적이 쳐들어와서 부산을 이미 함락했으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논의하였다.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다만 녹도만호 정운만이 홀로 의연하게 말했다.'

비문은 이어 '정운이 이순신에게 "지금 적병이 영남을 함몰했는데(今敵陷嶺南)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으면(坐視不救) 이는 적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적병이 호남에 이르기 이전에(敵未至吾境) 나아가 치면 군사들의 사기를 왕성하게 할 수 있고, 우리의 수비를 튼튼히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더욱이 지금은 임금께서 난리를 맞아 피란을 하고 계시는 지경이니(君父蒙塵) 군주가 치욕을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신하가 목숨을 바쳐야 할 때입니다(臣死之秋). 내가 마땅히 한번 죽음으로써(我當以一死) 여러 장수들의 선봉이 되겠습니다(爲諸將先)."하고 말하였다. 충무공이 그의 말을 장하게 여겨 공의 (적을 공격하러 영남으로 진격하자는) 계책을 따랐다(而從其策). 충무공은 여러 군대에 명령을 내려 배를 타고 (5월 4일) 영남으로 출발하였다(乘船向嶺南).'라고 말하고 있다.

부산쪽 바다로 진격하여 왜적 치자고 주장한 정운

정운이 칼을 뽑아 들고서 영남 진격을 망설이는 이순신을 재촉했다는 표현은 없다. 그러나 앉아서 왜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영남으로 진격하여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는 정운의 주장을 이순신이 따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수군이 공격적 전략을 채택하게 된 데에는 정운의 판단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말이다.

실제로 이순신은 4월 20일에 이미 경상감사 김수로부터 왜적이 부산을 함락했으니 지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벌써 15일 저녁에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적이 절영도에 침입했다는 통첩도 받았다. 하지만 출전을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윽고 5월 3일, 정운 등 모든 장수들이 모인 연석 회의에서 전라도 수군의 영남 바다 진격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다대포 객사. 다대포첨사가 주둔하는 영(營)의 객사로, 사신들이 머물기도 한 집이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 때는 수령이 임금 계시는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망배(望拜) 행사를 이곳에서 올렸다.
 다대포 객사. 다대포첨사가 주둔하는 영(營)의 객사로, 사신들이 머물기도 한 집이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 때는 수령이 임금 계시는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망배(望拜) 행사를 이곳에서 올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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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포 바닷가의 몰운대(沒雲臺)로 들어간다. 몰운대는 바다에 붙은 얕은 야산 형상을 하고 있다. 안개와 구름(雲)이 짙은 날이면 보이지 않는(沒) 섬이라고 해서 몰운도라는 이름을 얻은 곳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뭍과 이어지는 바람에 지금은 흔히 몰운대라 부른다. 물론 몰운대라는 이름의 정자도 남아 있다.

몰운대 끝자락에 정운공순의비가 있다. 지금 이 비를 찾아가는 길이다. 본래 섬이었던 곳답게 몰운대 산책길은 바다 냄새가 물씬하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길이지만 오르막 내내 오른쪽으로 바다의 풍광이 눈부시게 이어진다. 놀이 질 무렵이면 특히 아름다운 일몰 경치를 보여준다고 한다. 하지만 일몰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몰운대 입구와 정운공순의비 중간쯤에서 만난 입간판 탓이다. 본래 다대포첨사의 진영인 다대포첨사영(營) 내에 있다가 1970년 이곳으로 이건된 다대포객사 건물 바로앞 삼거리에서 만난 입간판. '경고문'이라는 제목을 단 입간판은 '1. 이 지역은 군사 작전 지역입니다. 2. 군 경계 작전을 위해 등산객, 낚시꾼은 다음 통제 시간을 준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절기 : 20:00-05:00 (4월 1일-9월 30일) 동절기 : 18:00-06:00 (10월 1일-3월 31일) 3. 정운공 순의비 참배시 군사 시설 일체 사진 촬영 및 화상 통화를 하실 수 없습니다.'하고 안내하고 있었다.

일몰 이전까지는 정운공순의비를 참배할 수 있는 듯한데...

밤 8시부터 새벽 5시 사이에는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과, 정운공순의비 주변에서는 함부로 사진을 촬영하면 안 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는, 몰운대 입구에서 다대포객사 주변까지는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며, 밤 8시 이전까지는 군사적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이 오후 5시이니 정운공순의비를 참배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황혼이 깃드는 사진을 얻으려는 욕심은 버려야겠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선다. 정운공순의비 쪽으로 가는 길이다. 곧 '환영합니다'라는 제목을 한 채 철조망 대문에 걸려 있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아래에는 '연락처 : 상황실 051)261-6702 주민신고 1661-1133'라는 전화번호가 친절하게 밝혀져 있다. 굳게 잠겨 있는 철조망 대문 오른쪽에는 인터폰도 설치되어 있다.

"사하구청에 신고하여 사전 출입 허가를 받지 않으신 분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안내판의 내용과는 달리, 통제 시간과는 무관하게, 정운공순의비를 참배하려면 사전에 사하구청의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병사의 답변이다. 아무 때나 불쑥 찾아와서는 정운공순의비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하구청 누리집에서도 그런 안내문을 본 적이 없는데, 어쨌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몰운대 입구에서 다대포객사 중간쯤에 세워져 있는 <몰운대> 시비. 동래부사 이춘원의 한시와 정경주의 국역시가 김준기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이 기사의 본문에 나오는 국역시는 이 시비에 새겨진 문장과 다름)
 몰운대 입구에서 다대포객사 중간쯤에 세워져 있는 <몰운대> 시비. 동래부사 이춘원의 한시와 정경주의 국역시가 김준기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이 기사의 본문에 나오는 국역시는 이 시비에 새겨진 문장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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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에 '몰운대' 시비를 본다. 정운공순의비를 찾아 허위허위 섬(!) 안으로 들어서던 때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받침돌에는 사하지역발전협의회가 이 시비를 1999년 6월 12일에 세웠다고 밝혀두었다. 원문인 한시는 몸돌의 오른쪽, 번역문은 한시의 왼쪽을 차지하고 있다.

浩蕩風濤千萬里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리 만리로 이어지고
白雲天半沒孤臺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扶桑曉日車輪赤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같아라 
常見仙人賀鶴來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오시네

태종대, 해운대와 더불어 '부산의 3대'로 일컬어지는 몰운대의 아름다움을 문학적으로 아주 잘 형상화한 이 한시는 동래부사 이춘원(李春元, 1571∼1634)의 작품이다. 이춘원은 1613년(광해 5)과 1617년(광해 9) 두 차례에 걸쳐 인목대비 폐비 등에 반대하다가 좌승지와 충청도관찰사에서 파직된 인물이다. 꼬장꼬장한 선비 이춘원이 몰운대만은 너무나 부드럽게 지었다. 지은이의 문학적 재능에 새삼 감탄이 일어난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곳에 안방준의 날카로운 한 마디를 새로이 빗돌에 새겨 답사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면 더욱 좋으리라' 하고 생각해 본다. 안방준은 <부산기사(釜山記事)>에서 '국가를 다시 찾게 된 것은 호남을 잘 보전했기 때문이고(國家之恢復由於湖南之保全), 호남을 잘 보전한 것은 이순신의 수전에서 힙입은 것이며(湖南之保全由於舜臣之水戰), 이공의 수전은 모두가 녹도만호 정운의 용력에서 말미암은 것이다(舜臣之水戰皆出於鹿島萬戶鄭運首事嘗試之力也)."라고 썼다.


태그:#몰운대, #정운, #정운공순의비, #이순신, #안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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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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