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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북천 전투는 조선 중앙군과 일본군이 최초로 격돌했던 싸움이다. 이때 총지휘관 이일은 패주했고, 수많은 장졸들이 북천에서 전사했다. 사진은 임진왜란 때 불탔던 상주 상산관(객사)의 모습
 상주 북천 전투는 조선 중앙군과 일본군이 최초로 격돌했던 싸움이다. 이때 총지휘관 이일은 패주했고, 수많은 장졸들이 북천에서 전사했다. 사진은 임진왜란 때 불탔던 상주 상산관(객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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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상주박물관 전시물 중에는 특별히 눈길을 끄는 유물들이 있다. '보물 1003호'라는 쪽지가 붙어 있는 서책들이다. 책들이 국가 지정 보물이라고? 보물 책들은 조정(趙靖, 1555~1636)의 일기들로, 관람객을 위해 붙여둔 작은 해설판에는 <검간 조정 임란일기>와 <남행록>이라는 표제로 소개되어 있다. 모두 조용중 후손이 기증했다.

<검간 조정 임란일기> 전시품 아래에는 '(검간 조정 임란일기는)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진년의 기사가 포함되어 있어 임진일기로도 불린다. 상권에는 1592년 4월 1일부터 6월 6일까지 52일간의 일기가 기록되어 있고, 하권은 1592년 6월 7일에서 12월 17일까지 190일간의 일기이다. 모두 242일간의 기록으로, 6월 7일에서 6월 16일까지 10일간의 기록은 누락되었다.'라는 작은 해설판이 부착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남행록>에는 '1592년 8월 25일부터 9월 23일까지 28일간의 일기로, 검간 조정이 당시 거창에 주재한 순찰사 김성일에게 토적(討敵) 등에 관한 것을 논의하기 위해 왕래하면서 기록한 일기.'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조정의 일기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알게 해주는 소중한 기록유산임에 틀림이 없는 듯하다.

임진왜란 당시 소상히 기록한 조정의 '보물' 일기

검간(黔澗) 조정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다. 당연히 박물관 전시장 벽에는 그를 소개하는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다. 조정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으로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은척 황령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김성일은 선조의 어명을 받아 영남 지역 선비들의 창의를 독려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성일은 조정의 처삼촌이기도 했다. 그 결과 상주 지역에는 창의군(昌義軍)이라는 이름의 의병 부대가 7월 30일 처음 결성되었고, 조정은 창의군의 좌막(佐幕, 참모) 겸 장서(掌書, 서기)를 맡았다. 그는 또 정유재란 때 기원, 영원 두 아들을 (곽재우 군이 지키는) 창녕 화왕산성에 의병으로 보냈다. 즉, 조정은 지역 사회를 이끌어온 지도층다운 면모를 국가의 위기 상황 속에서 충분히 드러낸 선비였다.

밖에서 본 양진당(조정의 가옥)
 밖에서 본 양진당(조정의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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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은 이어 '(조정은) 선조 32년(1599) 천거로 참봉이 되고, 선조 36년(1603)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선조 38년(1605) 좌랑으로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겸춘추기사관,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등을 거쳐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인조 20년(1642)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검간조정선생문집>, <조정선생임란일기(보물 1003호)> 등 일곱 권의 책이 전한다.'라고 해설한다.

안내문은 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던 조정이 다시 과거에 급제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그가 남긴 임진왜란 당시의 일기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지정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게 해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속수서원이 상주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해준다.

하지만 상주시에는 현재 속수서원이 없다. 속수서원의 현주소는 의성군 단밀면 주속길 116-6(속암리)이다. 단밀면은 상주시를 기준으로 할 때 낙동강 건너 동쪽 땅이다. 상주 선비인 조정이 상주 소재 서원이 아니라 의성의 서원에 왜 모셔졌을까? 2015년판 <단밀면지>는 삼국 시대와 고려 초까지 문소군(의성군) 소속이던 단밀현이 1018년(현종 9)부터 1895년(고종 32)까지 877년 동안은 줄곧 상주목으로 이속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즉, 박물관 안내문의 '상주의 속수서원'은 조선 시대 당시 단밀현이 상주목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속수서원
 속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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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낙동면 양진당길 27-4에는 '상주 양진당'이 있다. 국가 지정 보물 1568호인 이 집은 '조선 중기 문신인 검간 조정 선생의 가옥이다. 검간은 한강 정구와 학봉 김성일의 문인이며 속수서원과 장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상량문에 의하면 1626년(인조 4)에 착공하여 1628년(인조 6)에 준공하였다.' 집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을 더 읽어본다.

'(양진당은) 1808년에 중수하고 1981년에 정침(正寢, 제사를 지내는 몸채 집)을 해체하여 중수하였으며, 2005년에는 1966년 대홍수 때 유실된 대문채와 사당 등을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정면 9칸 측면 7칸의 ㅁ자형 평면을 한 고상(高床, 마루가 높은) 누각(樓閣)식으로 지은 건물로서 1975년 12월 30일자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85호로 지정되었고, 조선 시대 주거 건축의 지역적 특성과 역사적 변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2008년 7월 10일자로 국가 지정 보물로 승격되었다.'

안내판은 문화재의 등급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앞에서 '상주 속수서원'이 '의성 속수서원'으로 바뀐 까닭을 알아보았으므로, 의성에서 발생한 그런 사례를 한 가지만 거론해보자.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된다. 국보 77호인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세워진 이 통일신라 시대 작품은 본래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파손 등의 문제로 말미암아 재평가를 거쳐 보물로 한 등급 내려졌다. 양진당이 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된 데 비하면 그 반대의 곡절을 거친 것이다.

유형문화재에서 국가 보물로 승격된 양진당

'조선 시대 주거 건축의 지역적 특성과 역사적 변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유형문화재였던 양진당이 '국가 지정 보물로 승격되었다'는 표현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문화재청 누리집을 찾아본다. '상주 양진당은 (중략) 퇴칸 전면에 세운 6개 기둥은 통재를 사용하였는데, 특이하게 하층 부분에는 방형으로 치목하고 상부는 원형으로 다듬었다.'라는 대목이 먼저 눈길을 끈다. 과연 양진당 건물을 살펴보니 마루 바깥에 서 있는 굵은 기둥들이 아래는 네모꼴(방형)이고, 위는 둥그렇다(원형).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

기둥이 특이하다. 마루보다 낮은 부분은 네모형, 높은 부분은 원형이다.
 기둥이 특이하다. 마루보다 낮은 부분은 네모형, 높은 부분은 원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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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누리집은 이어 '(양진당이) 지붕은 정침의 툇마루 상부만 겹처마로 하고 나머지는 홑처마로 하였는데, 겹처마의 경우 일반적으로 원형 서까래에 방형을 얹는 데 비해 양진당은 서까래를 네모지게 다듬어 부연과 같은 모습을 취하게 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부연은 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를 가리킨다. 부연은 처마 끝을 위로 들어 올려 멋을 내는 기능을 한다.

양진당은 '건물 바닥을 지면에서 1미터 이상 높게 마련하면서 고상식 주거(높은 마루집)에서는 보기 드문 구들을 설치한 점에서 조선 시대 주거 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평가된다. 또 양진당은 '방이 두 줄로 나열되는 겹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도 특색이며, 기둥은 굵은 부재를 사용하면서도 모서리를 접어서 투박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기술적 성숙도를 보이고 있어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마루를 높이 지은 것은 낙동강 인근인 이 일대의 침수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한 건축적 지혜의 발로이다. 그렇게 하면 땅이 뿜어내는 여름철의 높은 열기도 차단할 수 있다. 남방 주택다운 설계인 것이다. 

양진당 인근에 있는 장천서원의 강당. 양진당과 마찬가지로 높은 마루를 가진 고상식이라는 특징을 보여준다.
 양진당 인근에 있는 장천서원의 강당. 양진당과 마찬가지로 높은 마루를 가진 고상식이라는 특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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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당 근처에는, 조정 선생 유적이 두 곳 더 있다. 첫째는 양진당과 마찬가지로 고상식 건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인데, 양진당에서 왼쪽으로 450미터 정도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장천서원이다. 양진당의 주소가 양진당길 27-4, 장천서원의 주소가 양진당길 59-15이니 숫자만 보아도 둘이 서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짐작이 된다. 1759년(영조 35)에 건축된 장천서원은 조정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항상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국가의 허락을 받은 신위)를 모시는 재실 기능을 하며, 경상북도 기념물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른 곳은 오작당이다. 양진당에서 오른쪽으로 450미터 가량 떨어진 도로변에 위치하는 이 집은 조정 선생이 임진왜란 종전 직후인 1601년(선조 34)에 처음 지었는데, 1661년(현종 2)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양진당과 같은 유형의 건물이면서도 더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어 경상북도 민속자료 32호로 지정되었다. 양진당이 국가 지정 보물인 데에 비하면 조금 서운한 등급이겠지만 좌우로 거느리고 있던 익사(翼舍, 날개채)를 잃어버렸으니 어쩔 것인가.

양진당 인근의 장천서원과 오작당도 조정 선생 유적

오작당 대문 앞에는 '오작당 창건 4백주년 기념비', '조순 기념 식수' 표지석 등이 있다.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이 집을 찾아 기념 식수를 한 때는 2005년 8월 12일이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에 견주면 조정 선생이 창의를 하여 왜적과 싸우고, 종전 후 양진당과 오작당을 지은 시기는 400년도 더 지나간 까마득한 옛날이다.

하지만 결코 고통스러운 외침의 역사, 목숨과 재산을 내던지며 창의를 하고 외적과 싸우다가 죽어간 선조들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뜻에서, 선생의 일기 중 피란을 다녔던 시절의 한 대목을 읽어본다.

'장천의 종들인 사돌, 숙례, 춘옥 등 10여 명이 갈 곳이 없어서 이곳 (안동 나의) 처가로 왔다. 양식이 떨어진 지 오래되어 장차 구렁에 떨어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들의 몰골이 흙과 같아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방 안으로 들어와 울면서 대화를 청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그들을 도울 길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과 함께 울 뿐이었다. (중략)

온 나라 백성들이 모두 살 곳을 잃어버렸다. (왜적들이 남해안으로 물러간 1593년) 금년 봄에는 굶어죽은 사람이 왜적의 칼날 아래 죽은 이들보다 몇 배나 많았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사람들이 다 죽어나갈 것이다. 자애로운 하늘은 어찌 이런 끔찍한 장면을 보고만 있는가!'

오작당의 일부
 오작당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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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조정, #북천전투, #양진당, #임진왜란, #속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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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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