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화청궁 구룡호와 여산
 화청궁 구룡호와 여산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화청궁은 서안 동쪽으로 25㎞ 떨어진 여산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당나라 시대 별궁이다. 그러나 화청궁은 온천과 정원이 있는 휴양지로, 이미 주나라 때부터 황실의 행궁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와 이곳을 자주 찾아 화청궁이라 칭하고, 대규모로 전각을 짓고 정원을 만들어 유명하게 되었다. 면적이 13만 평이고 전각만 해도 100채가 넘는다.

가운데 궁궐의 전각이 있고, 남쪽에 정원과 연못이 있으며, 서쪽에 행정관서가 있다. 북쪽으로는 벽과 문이 있어 이곳을 통해 출입하게 되어 있다. 북서쪽에 망경문(望京門)이 있고, 가운데 화청문이 있고, 북동쪽에 진양문(津陽門)이 있다. 일반적으로 망경문으로 들어가 화청궁의 중심전각인 장생전(長生殿)과 부용호(芙蓉湖)를 본다. 그리고 동쪽으로 이동, 실경 역사무극(歷史舞劇) <장한가(長恨歌)>의 주무대인 구룡호(九龍湖)와 비상전(飛霜殿)을 살펴본다.

실경 역사무극 <장한가>의 양귀비와 현종
 실경 역사무극 <장한가>의 양귀비와 현종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실경 역사무극이란 실제 경치가 이름다운 장소에서 역사적인 사건을 춤과 노래로 재구성한 연극을 말한다. <장한가>는 여산을 배경으로 구룡호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뮤직 드라마다. 중국의 유명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謀)의 연출로 만들어졌으며, 봄(4월)에서 가을(10월)까지 야간에 이곳 화청궁에서 공연된다. 구룡호와 비상전을 지나면 현종과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온천탕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는 현재 연화탕(蓮花湯), 해당탕(海棠湯), 성신당(星辰湯), 상식탕(尙食湯)의 당나라 어탕(御湯) 유지가 남아 있다.

온천탕을 지나면 다시 동쪽으로 오간청(五間廳)에 이르게 된다. 오간청은 말 그대로 다섯 칸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인 서안사변(西安事變)이 일어난 곳이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남쪽의 여산으로 오를 수도 있고, 북쪽의 망호루(望湖樓)와 향응지(香凝池)를 거쳐 진양문으로 나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산으로 오르지 않고, 진양문으로 나간다. 여산에 오르는 사람은 대부분 화청궁 서쪽에서 케이블카를 탄다.

양귀비는 어느 때 가장 아름다울까?

현종과 양귀비 동상
 현종과 양귀비 동상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화청궁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걸어서 화청궁 바깥의 북쪽 광장으로 간다. 그곳에는 현종과 양귀비가 춤추고 노는 장면이 청동조각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화청궁이 여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화청궁의 전각은 북향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저 멀리 여산에는 케이블카가 오르내리고, 산꼭대기에 명성궁(明聖宮)과 노모전(老母殿)이 있다고 한다.

이곡 광장 동쪽에는 또 하나의 양귀비 동상이 있는데, 목욕을 하고 나와 막 옷을 입는 장면이다. 목욕하고 나올 때의 양귀비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그 순간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럼 양귀비의 모습이 아름다울 때는 또 언제일까? 목욕하러 들어가는 순간도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 하나 양귀비가 아름다울 때는 술 취했을 때라고 한다. 술에 취해 가무를 하며 노래 부르는 모습, 상상이 간다.

부용호와 장생전 야경
 부용호와 장생전 야경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이제 우리는 망경문을 통해 부용호로 간다. 부용호는 장생전 앞의 연못으로 2005년 9월 현재의 모습으로 건설되었다. 장생전은 칠월칠석날 현종과 양귀비가 비익조(比翼鳥) 되고 연리지(連理枝) 되자고 맹세했던 곳이다. 장생전은 2층 누각 형태의 궁전으로 만들어졌다. 부용호에는 연꽃이 심어져 있고,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다. 물 속에서는 금붕어가 노닐고 있다.

부용호를 지나 동쪽으로 가면 비상전과 구룡호가 나온다. 비상전은 화청궁의 제2궁전으로 현종과 양귀비가 겨울에 주로 침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비상전이라는 이름은, 겨울에 눈이 내릴 때 지하에서 올라오는 온천의 열기로 인해 눈이 서리처럼 변해 내렸다고 해서 생겨났다.

목욕 후 옷을 입는 양귀비
 목욕 후 옷을 입는 양귀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구룡호는 비상전 앞에 있는 연못으로 상하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단에 <장한가> 공연을 위한 수상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상단에 보조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상단과 하단 사이에는 둑 형태의 다리 구룡교가 놓여있다. 구룡교의 양쪽에는 만하정(晩霞亭)과 신욱정(晨旭亭)이 있다. 2층 연못 뒤로는 용음사(龍吟榭)가 있다. 용음사는 사당이라고 볼 수 있다. 용음사 뒤로 만수전(萬壽殿)이 있다.

용음사를 보고 우리는 온천탕 지구로 옮겨간다. 가는 길에서 목욕을 마치고 옷을 걸치는 모습의 양귀비를 발견할 수 있다. 흰 대리석으로 조각했는데, 상체와 하체의 일부가 드러나 있다. 얼굴이고 가슴이고 풍만한 편이다. 머리는 틀어 올렸고, 목걸이와 팔찌를 했다. 눈은 살짝 감은 듯 처리해 수줍음을 표현했다. 양귀비 발이 굉장히 작다고 들었는데, 이곳에는 정상적으로 표현되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목욕하고 나온 양귀비의 모습을 또 한 번 본다. 

네 온천탕 이야기

양귀비가 목욕한 해당탕
 양귀비가 목욕한 해당탕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그럼 이제 양귀비와 현종이 목욕한 현장을 찾아간다. 현종은 연화탕에서 목욕을 했고, 양귀비는 해당탕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먼저 해당탕으로 들어간다. 해당탕은 탕지(湯池)의 모양이 해당화를 닮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양귀비가 목욕한 곳이라 해서 귀비지(貴妃池)라고도 불린다. 그래선지 전각 편액에는 귀비지라 쓰여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여산의 경치도 일품이다.

연화탕은 전각의 편액에도 연화탕이라 쓰여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탕지가 직사각형이면서도 네 모서리가 약간 둥근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임금이 목욕하는 곳이라 해서 어탕(御湯)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에는 온천물이 고여 있다. 이 탕은 해당탕과 함께 현종 때인 747년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현종이 목욕한 연화탕
 현종이 목욕한 연화탕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성신탕이다. 이것은 당 태종 때인 647년 황제인 이세민의 전용 목욕탕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앞의 두 탕에 비해 탕지가 크다, 그리고 탕지의 모양이 북두칠성 형태를 닮았다고 해서 성신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또한 화청궁 탕전(湯殿) 유지 발굴시 나온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나는 이제 상식탕을 나중에 보기로 하고 온천 원탕을 찾아간다.

온천 고원(古源)으로 불리는 이곳에서는 지금도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자료를 보니 수온이 43℃다. 그렇다면 체온을 조금 넘는 정도의 온도다. pH는 7.2이니 약알칼리성 온천이다. 무색무취지만 음용은 불가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것은 온천수 속에 들어 있는 광물질 때문이다. 온천 고원 위로는 석가루(夕佳樓)를 만들어 수질을 보호하고 있다.

온천 고원
 온천 고원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나오는 길에 나는 마지막 남은 상식탕을 보러 간다. 상식탕은 당나라 때 상식국(尙食局) 관리들이 목욕할 수 있도록 만든 온천탕이라고 한다. 상식국은 임금의 수라와 궁궐의 음식을 책임지던 부서로, 그곳의 관리가 오랫동안 화청궁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목욕탕이 제공되었던 것 같다. 그래선지 이 탕은 대중탕 형식으로 네모나고 크게 만들어졌다.

장제스의 실책은 무엇일까?

오간청
 오간청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온천탕을 보고 난 우리는 이제 서안사변 구지인 오간청으로 간다. 이곳에 가려면 환원(環園)의 입구인 망호루(望湖樓)를 지나야 한다. 환원은 청나라 말기인 1872년 화청지 온천역(溫泉驛) 건물을 중수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00년에는 서태후로 알려진 자희태후(慈禧太后)가 서안으로 피난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1936년에는 10월에는 중화민국 주석이자 총사령관인 장제스가 홍군을 토벌하기 위해 서안에 와 이곳 오간청에 머물렀다.

그는 12월 7일 다시 서안에 와 군사회의를 주재하고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張學良)과 17로군 사령관 양후청(楊虎成)에게 홍군을 공격하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두 장군은 항일구국이 먼저라고 주장하며, 장 주석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장 주석은 이들 사령관의 교체를 검토한다. 그러자 12월 12일 오전 3시 장쉐량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이곳 오간청을 급습, 장제스를 체포한다.

왼쪽부터 장쉐량, 양후청, 장제스
 왼쪽부터 장쉐량, 양후청, 장제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장쉐량과 동북군은 국공내전을 종식하고 항일 무력투쟁에 나설 것을 요구한다. 이에 장제스는 요구조항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부인 쑹메이링의 막후 협상을 통해 25일 석방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홍군을 국민당군에 편입시킨다는 조건으로 그들을 탄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과 협력한다는 약속을 하기에 이른다. 이것을 제1차 국공합작이라 부른다. 더욱이 일본이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국민당 정부는 제2차 국공합작을 하게 된다.

이것이 공산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되었고, 결국 노동자와 농민의 지지를 받은 공산당이 민심을 얻기 시작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자 중화민국은 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 양 진영은 민심을 얻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였고, 1945년 10월 내전 종식과 정치민주화에 합의했다. 그러나 합의안이 인준되지 못하고 1946년 8월 국공내전이 다시 시작된다.

중화민국 국기가 걸려 있는 오간청 응접실
 중화민국 국기가 걸려 있는 오간청 응접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1947년까지 전세는 국민당군에 유리했으나 1948년부터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1949년 4월 공산당군은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했고,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처럼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기적으로는 장쉐량과 같은 부하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지 못한 게 문제였고, 장기적으로 민심을 얻지 못한 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또 국공합작을 전략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 실책이었다.


태그:#화청궁, #양귀비, #온천탕, #<장한가>, #오간청과 서안사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