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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전, 홍익대학교 정문에 설치된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상징 조형물이 부서진 채 길가에 나뒹굴고 있다.
 1일 오전, 홍익대학교 정문에 설치된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상징 조형물이 부서진 채 길가에 나뒹굴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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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가장 고통 받는 용어 중 '표현의 자유'는 상위 5% 내에 들 것이다. 특히 유머사이트였던 '일간베스트'(일베)가 전라도와 관련된 웬만한 것을 비하하고 어둠의 노사모(?)를 자청하며 온갖 혐오 발언을 일삼으며 표현의 자유라는 말은 공방 가운데 놓였다. 자유는 무엇이며, 그걸 제하는 데서 오는 우려는 무엇일까.

비슷한 논란은 현재 홍대를 기점으로 일고 있다. 한 조소과 학생이 일베 특유의 손 모양 조각상을 정문에 배치했다. 이 모양은 일베의 인증 문화에서 빠짐없이 등장해왔다. 공분이 일었고 급기야 누군가 간밤에 조각상을 부수는 상황에 이르렀다. '갑론을박이 작품의 의도'라는 작가의 인터뷰를 타고 말 그대로 갑론을박이 계속되는 중이다. 이것 또한 (혐오스럽더라도) 표현의 자유인가, 아니면 잘못된 표현인가.

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를 읽다

이 시점에서 눈에 띄는 댓글들이 있다. "언제는 '김일성 만세'도 봐달라더니 우덜식 자유, 보기 좋다." "'김일성 만세'는 표현의 자유라면서 이게 안 될 이유는 또 뭐냐." 표현의 자유가 다시 괴로워할 이 시점에 김수영 시인이 쓴 시 <김일성 만세>가 등판했다.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이며, 그렇다면 일베 손 모양 조각상과 '김일성 만세'는 동일한 품 안에 있는 걸까. 이 시점에서 다시금 시인의 시를 읽어본다.

김일성만세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 김수영, 1960. 10. 6

김수영 시인의 이 작품은 6.25 전쟁의 열기가 남은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다. '김일성 만세'라는 말만 외쳐도 반공논리에 따라 잡혀가는, 이유 불문하고 간첩이 돼 억압받아야 하는 시대의 굳은 민낯을 보여준다. 당시에 미발표 작품이었다는 게 이 시가 의도하는 바를 맹렬히 반증한다. 무엇을 표해보기도 전에 입을 다물어야 했던 맥락과 자유에 대한 갈증이 잠에서 깬 시인의 눈꺼풀에 드리운다.

그렇다면 일베의 손 모양 또한 똑같이 '억압받는 수사'라고 볼 수 있을까. 얼핏 이 둘은 지탄받는다는 점에서 동일해 보인다. '우덜식 자유' '우덜식 정의'로 인해 드러낼 수 없다는 표면적 상황은 유사하다.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를 일컬으며 설령 자신이 싫어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표현까지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단 자유로이 표현하고 거기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감수하는 게 '책임'의 참 뜻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베의 손 모양이 억압받는 맥락은 '김일성 만세'가 억압받는 상황과 사뭇 다르다. 일베가 손 모양으로 소위 인증을 하며 해왔던 행동을 열거해 보면 광주민주화운동 고인 모독, 세월호 참사 고인 모독, 강남역 추모 공간 훼손 등이 있다. 이 외에 그들은 '재미로 인증'한다는 미명 하에 한 연예인의 유산 비보를 희화화했고 지나가는 여성들을 평가하며 놀이판을 벌였다.

일베의 손 모양이 조각상으로 만들어져 홍대 정문 앞에 놓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불쾌해하고 나아가 분노했던 건 일베의 손 모양이 지탄받아왔던 사회적 맥락에 근거한다. 반공주의로 뒤덮여 아예 표현의 자유를 상실했던 시대를 한탄한 시인 앞에 사회적 약자를, 무고한 타인을, 극한 슬픔을 희롱하는 그 손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왜 그 손 모양이 사람들에게 비판받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투덜대는 것을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은 부조리한 사태라 칭할 수 있을까. 우린 비교에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조각상을 공식적으로 철거하지 않고 훼손한 건 기물파손이며 비록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다 해도 막상 졸업 등을 고려해(!) 본인에게 물리적 피해가 생겼을 것이다. 이 자체는 절차적으로 합리화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손 모양을 두고 표현의 자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과연 진정 자유라는 개념의 정의와 부합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어떤 표현과 사상에 대한 국가적 억압이, 아무 문제제기 없이 이뤄지던 시대에 비해 굉장히 관대한 시대를 살고 있다. 망자를 골리고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면서 이항대립을 조장하는 식의 사례를 축적해온 일베가 어쨌든 여전히 건재하고 있으니.

자유에도 책임이 따르듯 다양성 또한 한정 없는 개념이 아니다. 다양성은 무엇보다도 '공존'이라는 사명을 띠고 있다. 무엇이든지 표현해도 일단 들어보는 다양성이 보장된 사회에서 다만 약자를 웃음의 도구로 삼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가 양립하는 공존의 가치가 최후의 보루로 남는다. 그렇기에 우린 끝까지 붙잡고 일베의 표현이 왜 잘못된 것인지 말해야 한다.

물론 일베의 몇몇 유저들은 이 또한 주장이 아니라 강요라 치부하고 자기연민 속에 공고해지겠지만, 설혹 반성을 할 수 있는 누구라도 있다면 그 청자를 위해 우린 대화를 건네야 한다. 다르다는 무수한 말 속에도 틀린 것이 있음을, 때론 진지하게 자기 혀를 가다듬어야 함을.

표현의 자유란 다양한 사람이 서롤 견디며 공존할 수 있을 때 그 책무를 다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베충도 억압 받고 있다고?

덧. 어쨌든 일베충이라는 말로 일베 또한 억압받고 있지 않냐는 반론을 듣는다면 그 인과의 사슬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따져보길 권한다. 또한 예컨대 '김일성 만세'라는 말 또한 전쟁을 겪은 누군가에게 폭력적인, 공존 불가능한 언사라는 반박이 온다면 그럼에도 그 둘을 '억압받는 수사'라는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김일성 만세'라고 외친 사람을 붙들고 왜 그랬는지 물었을 때 그 대답이 피해자 모독이라면 마찬가지로 욕 먹어 마땅하지만 온통 입을 틀어막는 데 혈안이었던(심지어 지금도 빨갱이가 마법의 단어로 쓰이는) 이 나라에 대한 시인의 의도는 명백해보인다('언론의 자유''정치의 자유'라는 시어에서 도드라진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조각상을 만든 작가의 의도를 반쯤 건강하게 이해해봄직하고, 반쯤 어설펐기에 논의가 아닌 논란으로만 매듭이 남았다 아쉬움이 든다. 설명이 부연된 문학작품과 설명이 생략된 조각품 사이의 간극이란 인상도 든다. 그의 의도대로 작품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극한 불편함에도 계기를 통해 되짚어볼 거리들이 생겼다는 데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태그:#홍대 일베, #일베 조각상, #김일성만세,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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