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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 선사께서 써 주신 서문을 들고 계신 저자 석지현 스님
 경봉 선사께서 써 주신 서문을 들고 계신 저자 석지현 스님
ⓒ 도서출판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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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습니다. 참 아쉽습니다. 수백 편의 시, 한 수 한 수 다 읊어 전하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 아쉽고, 수백 편에 담긴 뜻 다 새기질 못하니 아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웅얼웅얼 읽어 삭히고, 힐끔힐끔 넘겨 새기는 시구 하나하나마다 서정이 있고, 서사가 있고, 풍경이 펼쳐지는 장관입니다.

읽어 들려주고 싶은 해학, 비꼬아 전해 주고 싶은 은유, 꼬집어 깨우쳐주고 싶은 촌철살인과 풍자가 넘실대니 깨우친 자들의 남긴 희롱은 '선'이 되고 깨달은 자들이 중얼 거린 언어는 '시'가 됩니다.



모기(蚊子)
제 힘이 원래 약한 줄 모르고
남의 피를 많이 빨아 날지 못하네
남의 물건 너무 탐하지 말라
이 다음에 반드시 되돌려 줄 날 있으리라.
不如氣力元來少 喫血多多不自飛
勸汝莫貪他重物 他年必有却還時

감상: 남의 피만을 빨아먹는 저 모기에 비유해 인과의 도리를 설파하고 있다. - (한국편), 285쪽-

모았습니다. 골랐습니다. 새겼습니다. 그리고 엮었습니다. 마디마디 시구마다 삼라만상의 깨달음이 다 들어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로 흐르는 순리와 인과가 다 들어 있고, 인생팔고와 생로병사의 비밀이 한두 글자 속 은유에 똬리를 틀고 다 들어 있습니다.

꾹꾹 눌러 담은 몇 글자 속에 봄바람에 피어난 꽃들이 산들거리고, 여름 햇살을 닮은 뜨거움이 확탕지옥의 열기로 이글거립니다. 꾸깃꾸깃 뭉쳐 표현한 은유에 가을철 단풍 소식이 담겨있고, 한겨울 북풍한설 추위가 고드름처럼 주렁주렁 열려 있습니다.

다시 다듬어 펼치는 <선시감상사전>

<선시감상사전/한국편)>, <선시감상사전/중국·일본편)> 표지 사진
 <선시감상사전/한국편)>, <선시감상사전/중국·일본편)> 표지 사진
ⓒ 도서출판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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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감상사전>(한국편)·(중국·일본편)(편저자 석지현 / 펴낸곳 도서출판 민족사)은 이십이 년 전에 펴냈던 <선시>(禪詩)를 다듬고 보듬어 다시 펼치는 재판입니다.

책 속에는 중국, 한국, 일본의 선자(禪者)들과 시인(詩人) 306명의 작품 1,431편이 실려 있습니다. 중국 169명 206편, 한국 107명 997편, 일본 30명 174편입니다.

외양으로 봐서는 비승비속의 삶은 살고 있는 저자, 석지현 스님이 모았습니다. 초야에 묻혀있고, 고서에 묻혀 있고, 행장 속에 묻혀있는 선시들, 고인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시들을 하나하나 모았습니다. 그리고 옥석을 가리듯 고르고, 보석을 다듬듯 감상을 더해 풀었습니다.

인고의 세월이었을 겁니다. 천지와 내통할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가 아니었다면 감히 엄두도 낼 수없는 지극함이 있었을 겁니다. 한시(漢詩)가 원석이라면 저자가 풀어낸 글들은 잘 가공된 보석입니다.

맞습니다. 같은 원석도 누가 가공하느냐에 따라 눈으로 담을 수 있는 미, 마음으로 매길 수 있는 무형의 가치는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한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풀어내느냐에 따라 한시에 담긴 의미를 담아내는 표현력은 천양지차로 달라집니다.  

저자가 풀어낸 글들은 동글동글합니다. 반짝거립니다. 재미있습니다. 알몸을 드러낸 누드 신 만큼이나 찐합니다. 공감이 어울 대고 감탄이 너울댑니다. 애정소설을 읽던 사춘기 마음으로 읽어도 좋고,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하는 늙수구레한 마음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선시란 언어를 거부하는 '선' 언어를 전제로 하는 '시'의 가장 이상적인 만남

선(禪)이면 선이고 시(詩)이면 시지 선시(禪詩)라고 하니 그 정체가 무엇인지가 점점 궁금합니다. 선(禪)은 뭐며 시(詩)는 또 뭔가? 책에서는, '선이면서 선이 없는 것이 시요(禪而無禪便是詩), 시이면서 시가 없는 것이 선이다(詩而無詩禪儼然)'라는 말로 선과 시를 구분합니다. "그러므로 선시란 언어를 거부하는 '선'과 언어를 전제로 하는 '시'의 가장 이상적인 만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봉 스님 서문
 경봉 스님 서문
ⓒ 도서출판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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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수 한 수 읽어 새기다 보면 불립문자 선이 윤곽을 드러내고, 시구에 함축 돼 있는 천둥소리 같은 의미가 느껴집니다.

인적 없는 옛집에(春晩遊燕谷寺贈當頭老)
인적 없는 옛집에 봄은 깊어 가는데
바람 없는 꽃잎이 뜰에 가득 쌓이네
해질 무렵 구름은 고운 빛 물들어 가고
산에는 어지러이 두견이 우네. -(한국편), 145쪽-

어지러운 세상(悼世)
어떤 이 날 찾아와 이르기를
세상은 지금 어지럽기 그지없다네
마음마다 전염병이 퍼지고
굶어 죽은 송장은 길을 메웠네
전쟁은 나날이 격심해지고
인척들은 서로를 돌보지 않네
세금과 부역은 갈수록 가혹해지고
처자와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네
희비가 없는 이 산중인데도
가슴이 메어짐을 견딜 수 없네.-(한국편), 660쪽-

읊조리다보면 말초신경 쫄깃해지는 시도 수두룩

섣부른 선입견을 갖고 있는 혹자는 선방의 고요함만큼이나 지루한 서정을 연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읊조리다 보면 부지불식간 말초신경이 쫄깃해지는 원초적 성욕, 성감대 촉감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연정들도 한둘 아닙니다.

봄날을 연상하면 봄날 풍경이 펼쳐지고, 인생사를 떠올려 보면 해탈의 경지가 어른댑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풍덩 좋습니다. 봄 나비 같은 마음, 여름 매미 같은 한량, 가을 단풍 같은 미추, 겨울바람 같은 혹독…. 아~ 이 시는 이래 선이고 저 선은 저래서 시가 됐으니 선시를 읊조리는 자아는 어느새 선자가 되고 시인이 됩니다.    

1300여 페이지가 훌쩍 넘는 두툼한 볼륨, 그 볼륨감을 핑계 삼아 아주 잠시 불경스럽게도 목침삼아 잠깐 베어도 봤습니다. 삼라만상의 진리, 오욕칠정의 섭리가 얼룩덜룩한 베갯잇이 돼 하나둘 거기에 펼쳐집니다.

하나하나 빼먹는 곶감처럼 한 수 두 수 읊조리는 내내 무릉도원의 한량이 부럽지 않고, 저잣거리의 왈패가 부럽지 않으니 <선시감상사전>을 읊조리는 이 순간순간들이야말로 불립문자의 행복이며 선시에 취한 감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좋은 봄날, 어두컴컴했던 마음 환하게 밝혀 줄 선시, 눈물 찔끔 나도록 짜릿한 선시 한두 수와 함께 한다면 어느새 가고 있는 봄날이 결코 무상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선시감상사전/한국편) (편저자 석지현 / 펴낸곳 도서출판 민족사 / 2016년 4월 10일 / 값 58,000원>
<선시감상사전/중국·일본편) (편저자 석지현 / 펴낸곳 도서출판 민족사 / 2016년 4월 10일 / 값 38,000원>



선시감상사전 : 한국편

석지현 엮음, 민족사(2016)


태그:#선시감상사전, #석지현,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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