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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꼍에서 괭이를 들고 밭 한쪽을 갑니다. 겨우내 시든 풀잎으로 덮인 땅은 폭신폭신합니다. 짚을 걷어서 한쪽으로 쌓고, 씨앗을 심을 자리를 고릅니다. 잔돌은 그대로 두고 커다란 돌을 골라서 씨앗자리로 삼는 테두리에 하나씩 놓습니다.

아이들한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괭이질을 하는데, 큰아이는 집안이나 마당에 아버지가 없는 줄 어느새 알아채고는 두리번두리번 살피다가 뒤꼍에서 아버지를 찾아냅니다. 그러고는 호미를 챙겨서 뒤꼍으로 다시 와서 "나도 해 볼래!" 하고 외칩니다.

이내 두 사람은 호미질을 하며 제법 굵은 돌을 고르고 자리를 반반하게 다스립니다. 까무잡잡한 흙에서는 까무잡잡한 냄새가 나고, 이 냄새를 두 손이랑 온몸으로 느끼면서 알맞게 땅을 갑니다. 이렇게 흙을 만지니 지렁이도 기웃하고, 굼벵이도 놀란 모습을 보입니다. 개미들이 왁자하게 오가고, 새끼 딱정벌레라든지 아직 알인 벌레가 곳곳에서 나옵니다. 싱그럽고 좋은 흙이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한 떡갈나무 숲은 숲 전체가 망가져 있기도 했는데, 사과를 대량으로 생산할 큰 농장을 만든다더군요. 큰돈을 벌려고요. 떡갈나무가 쓸모없어 보였나 봐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떡갈나무 숲은 장마철 폭우가 내릴 때 빗물을 흡수했다가 조금씩 흘려보내는 역할을 해서 홍수도 막아 주고, 가뭄도 막아 줘요. (8∼9쪽)

그리고 환경이 파괴되는 것과 가난한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현상이 관계가 있다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되었지요. (11쪽)

겉그림
 겉그림
ⓒ 책속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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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책속물고기, 2016)라고 하는 작고 야무진 책을 읽습니다. 아버지가 이 책을 읽으니 큰아이는 고개를 가만히 내밀면서 "무슨 책 읽어?" 하고 묻습니다. "나도 읽고 싶어." 하고 말하는 큰아이한테 "기다리렴. 아버지가 먼저 다 읽고 나서, 너도 읽을 만한지 살펴서 줄게." 하고 얘기합니다.

반다나 시바 님하고 마리나 모르푸르고 님이 글을 쓰고, 알레그라 알리아르디 님이 그림을 넣은 책이에요. '어린이 생태환경 인문책'이라 할 텐데, 100쪽이 살짝 안 되는 가볍고 작은 책이지만, 속에 깃든 이야기는 참으로 알차고 야무지네 하고 느낍니다.

<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를 함께 쓴 반다나 시바 님은 인도사람입니다. 처음에는 히말라야 멧골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하고, 나중에는 핵물리학자라는 길을 걸었다고 하는데, 어느새 '흙을 만지며 씨앗을 사랑하는 새로운 길'로 삶을 바꾸었다고 해요.

'오늘날 쌀, 밀, 옥수수, 콩, 사탕수수 등 고작해야 몇 가지 작물만 상품으로 재배해서 세계 시장에서 팔리고 있어요. 원래 사람들이 먹었던 작물이 무려 8500가지나 됐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13쪽)

'우리가 기르는 농작물은 농사를 지을 때도 그다지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해서 대규모로 경작하는 쌀은 1년에 2500밀리미터의 빗물이 필요하지만, 농민들이 대대로 이어온 농사법으로 재배한 토종 쌀은 200∼300밀리미터 정도면 충분해요 … 농약을 사용하는 작물이 1명을 구할 때, 토종 작물로는 400명을 구할 수 있는 거예요!' (18쪽)

오늘 갈아서 오늘 심는 씨앗은 앞으로 여러 날이 지나야 비로소 싹이 틉니다. 그리고 여러 달이 지나야 열매를 맺어서 거둘 수 있습니다. 씨앗 한 톨에서 열매 한 줌을 얻기까지 한철이 흘러야 해요. 이동안 우리는 지난해에 갈무리한 열매를 먹을 수 있고, 풀잎이나 남새를 얻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지구별 어느 곳에서나 이렇게 손수 심고 가꾸고 거두고 갈무리하면서 살림을 지었어요. 그리고, 밥짓기를 하는 사이사이 풀줄기에서 실을 뽑아서 옷을 짓지요. 그리고, 밥짓기랑 옷짓기를 하는 틈틈이 숲에서 나무를 알맞게 얻어서 집을 짓고 집살림을 장만해요.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자연환경은 빈곤해지지만 일회용인 잡종 씨앗과 화학비료, 농약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고 있어요. (38쪽)

한국에는 원래 1450가지가 넘는 쌀이 있었다고 해요. 많은가요? 아니면 적게 느껴지나요? 그런데 이건 아주 오래전 이야기고요, 지금은 450가지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해요. 더 안타까운 것은 이 쌀들도 농촌진흥청 저장고에 보관만 되어 있어 지금 당장은 맛볼 수 없다는 점이에요. (49쪽)

우리 집에서 자라서 퍼지는 흰민들레 씨앗. 흰민들레 씨앗이 퍼져서 이 민들레 잎사귀를 두고두고 나물로 먹기를 바라면서 돌봐요.
 우리 집에서 자라서 퍼지는 흰민들레 씨앗. 흰민들레 씨앗이 퍼져서 이 민들레 잎사귀를 두고두고 나물로 먹기를 바라면서 돌봐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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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이랑 둘이서 뒤꼍에서 흙을 만지니, 이제 작은아이도 어슬렁어슬렁 달라붙습니다. 함께 놀 '두 사람'이 안 보이기 때문이지요. 작은아이도 호미를 챙겨서 '아직 갈지 않은 자리', 그러니까 며칠 뒤에 갈 자리를 콕콕 쫍니다.

슬슬 쉬엄쉬엄 땅을 갈아 돌을 고른 뒤에 손바닥으로 반반하게 자리를 다집니다. 이제 씨앗을 심을 때입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콕콕 구멍을 내고, 두 아이는 저마다 씨앗을 손에 쥐어 한 톨씩 넣습니다. 우리 꿈을 담아서 씨앗을 심습니다. 우리 노래를 부르면서 씨앗을 심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얹어서 씨앗을 심습니다.

씨앗을 다 심은 뒤에는 큰아이가 물을 길어서 골고루 뿌립니다. 나는 밭에서 나온 쓰레기를 거두어서 한쪽에 모읍니다. 연장에 묻은 흙을 물로 씻어서 한쪽에 놓습니다. 따스한 볕이 골고루 들면서 나무한테도 풀한테도 땅한테도, 또 마당에 넌 빨래한테도 기쁜 기운을 나누어 준다고 느낍니다.

다국적 씨앗 회사들은 씨앗을 서로 나누는 농부들을 골칫거리로 생각했어요. 씨앗을 보관하고 나누는 것이 원래 농부의 일이고 권리인데 말이에요. 씨앗 회사들은 농부들에게 씨앗을 팔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특허 제도를 도입하고 씨앗이 특허를 낸 사람의 지적 재산이 되도록 해서 농부들이 서로 씨앗을 교환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자는 것이었어요. (50쪽)

어린이 인문책 <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는 씨앗하고 얽힌 수수께끼를 차근차근 풀어 줍니다. 옛날부터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이 손수 심고 가꾸면서 아낀 씨앗 이야기를 들려주고, 오늘날에는 이 씨앗을 다국적기업에서 돈벌이를 앞세우면서 독점과 특허와 유전자조작을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씨앗을 심거나 나누는 살림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람들이 스스로 씨앗을 아끼면서 심고 갈무리하는 곳에서는 '가난'이 퍼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그렇구나 싶어요. 사람들이 시골에서 흙을 일구어서 밥이랑 옷이랑 집을 손수 얻으면 언제나 '자급자족'이에요. 자급자족을 하는 곳에서는 '경제성장'이나 '경제발전'은 딱히 없을 만해요.

상품으로 내다 팔려고 하는 땅짓기가 아니라, 한집하고 한마을이 조용히 오순도순 사이좋게 어우러지려고 하는 땅짓기요 땅살림이기 때문입니다. 반다나 시바 님하고 마리나 모르푸르고 님이 함께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는 바로 '세계경제'가 아닌 '마을살림·집살림'을 스스로 즐거우면서 재미나고 알차며 아름답게 가꾸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껴요.

작은아이가 마당에서 유채줄기를 훑어서 먹습니다. 꽃이 피는 유채는 꽃대(꽃줄기) 껍질을 벗겨서 먹으면 맛나요.
 작은아이가 마당에서 유채줄기를 훑어서 먹습니다. 꽃이 피는 유채는 꽃대(꽃줄기) 껍질을 벗겨서 먹으면 맛나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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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어른이 되면 가질 수 있는 직업 중에 '농부'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농부는 자연을 비롯해 살아 있는 모든 것과 항상 접할 수 있는 무척 멋있는 직업이랍니다. (88쪽)

우리 집 아이들은 앞으로 '씨앗을 심고 가꾸고 돌보고 갈무리해서 누리는 삶'을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아이들이 이 시골집에서 '농사꾼'이 되든 안 되든, 또는 다른 일을 찾든 안 찾든, 그러니까 앞으로 아이들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땅을 아끼고 살피면서 돌볼 줄 아는 손길하고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바라요. 그래서 어버이인 나부터 땅을 조물주물 만지면서 사랑하려 합니다. 손수 짓는 살림을 가꾸려고 합니다. 스스로 돌보는 살림을 스스로 북돋우면서 스스로 노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해요.

작은 씨앗 한 톨이 밥 한 그릇으로 거듭나요. 작은 손길 하나가 사랑스러운 살림으로 거듭나요. 작은 마음 하나가 아름다운 보금자리에서 피어나요. <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라는 책이 들려주듯이, 씨앗이 있기에 밥이 있어서 우리가 살지요. 땅에도 씨앗을, 마음에도 씨앗을, 보금자리에도 씨앗을, 골고루 심어요.

우리는 언제나 따사롭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생각도 살림도 사랑도 씨앗으로 심는 고운 이웃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누구나 '씨앗지기'가 될 수 있어요. 너른 논밭이 아니어도 손바닥만 한 짜투리 빈터에 씨앗을 심어서 돌볼 수 있어요. 집안에 작은 그릇을 놓아 씨앗을 심어서 가꿀 수 있어요. 너나 없이 다 같이 씨앗지기가 되고 씨앗동무가 되며 씨앗이웃이 된다면, 언제나 맛나고 싱그러운 밥 한 그릇을 누릴 만하리라 생각해요.

덧붙이는 글 | <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
(반다나 시바·마리나 모르푸르고 글 / 알레그라 알리아르디 그림 / 김현주 옮김 / 책속물고기 펴냄 / 2016.3.25. / 11000원)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yes24.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 - 반다나 시바의 나브다냐 운동 이야기

반다나 시바.마리나 모르푸르고 지음, 알레그라 알리아르디 그림, 김현주 옮김, 전국여성농민, 책속물고기(2016)


태그:#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 #반다나 시바, #마리나 모르푸르고, #어린이책,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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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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