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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아침, 뜻밖의 부고 문자를 받았습니다.

"(부고)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김창국 위원장님께서 금일 새벽 별세하셨습니다. 빈소는 강남 삼성병원 1호실입니다. 발인은 4월 8일(금) 오전 8시."

부고는 늘 급작스러운 일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김창국 위원장님께서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곁에 오래 계시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은 해 왔지만, 그래도 이른 아침에 들어온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에 서늘한 바람이 제 가슴을 스칩니다.

향년 75세. 1940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후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김창국 위원장은 이후 전주지검과 광주지검 등에서 부장검사를 역임합니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1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해 오며 우리 사회에서 의미 있는 큰 족적을 남긴 분입니다.

'영감님' 검사에서 민변 총무간사까지 함께한 김창국

김창국 국가인권위원회 초대 위원장
 김창국 국가인권위원회 초대 위원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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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김창국 위원장이 걸어온 일생은 남다른 여정이었습니다. 스물한 살에 검사로 임용된 1961년 당시에는 검사를 '영감님'으로 호칭하는 권위주의 시대였습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이에 이처럼 사람들에게 '영감님'이라는 극존칭을 받으며 산다면 당연히 권위적이고 오만할 인생을 살아가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김창국 위원장은 달랐습니다. 1981년 부장검사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이후 그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인권 변호사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게 됩니다. 김창국 위원장께서 변론에 참여했던 몇 가지 사건만 살펴봐도 이 분이 1980년대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인권 사건 중 하나는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 의한 1987년 김근태 의장 고문 사건'입니다. 시국 사건으로 연행된 김근태 민청련 의장을 상대로 경찰이었던 이근안이 잔혹한 고문을 가한 사건이었습니다. 김창국 위원장은 바로 이 사건의 특별검사로서 이근안의 공소 유지 담당 변호사로 활동합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사건중 하나인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에서도 변호인으로 참여한 김창국 위원장은 우리 사회의 진보적인 변호사 단체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창립 멤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1990년에는 총무간사로서 민변 활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기도 했습니다.

김창국 위원장하면 빼놓을 수 없는 시민단체 활동이 또 있습니다. 누구나 들으면 아는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공동대표직 수행입니다. 이처럼 우리사회의 시민운동 발전에 큰 기여를 해 온 김창국 위원장이 깜짝 놀랄 이변을 일으킨 때는 1999년이었습니다. 보수적인 대한변협에서 진보적 생각을 가진 김창국 위원장이 '협회장'에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한 것입니다.

기대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변호사들의 '공익 활동 의무', 바로 이것을 처음 법으로 만든 분이 김창국 위원장이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대한변협 협회장 이전에 재임했던 서울변협 협회장 당시에는 법률적 도움을 받기 힘든 사람들을 위한 '당직 변호사 제도' 역시 김창국 위원장이 도입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 8월 1일, 김창국 위원장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매우 중요한 제안을 받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일해 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이후 김창국 위원장은 권력에 굴하지 않는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갑니다. 강직한 성품답게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 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을 위해 그는 청와대와의 긴장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화 중 몇 가지는 지금 다시 돌아봐도 놀랍습니다.

인권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과도 맞짱 뜬 초대 인권위원장

2002년 11월 22일 당시 김창국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인터뷰 사진
 2002년 11월 22일 당시 김창국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인터뷰 사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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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국 위원장이 국가 인권위원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2001년 11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정확히 만 3년 1개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재임 기간동안 김창국 위원장은 인권의 원칙을 지키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인권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김창국 위원장이 가장 노력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국가 인권위원회' 만들기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찰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인권위원장으로 공식 임기를 시작하고 정확히 만 1년 되는 2002년 11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김창국 위원장은 청와대의 허가 없이 필요한 해외 출장을 다녀옵니다. 그러자 평소 권력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김창국 위원장을 향한 권력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인권위원장을 손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입니다.

김창국 위원장은 왜 권력자로부터 이런 미움을 받았을까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인사 때문이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출범시키면서 채용 공고가 이어졌습니다. 그러자 여러 경로를 통해 "내 사람을 좀 써 달라"는 청탁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런 인사 청탁이 책상 위에 가득 쌓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김창국 위원장은 이렇게 들어온 인사 청탁을 전부 거절합니다. 이러니 김창국 위원장, 얼마나 미웠을까요?

그런 마당에 공격할 호재를 만났으니 그냥 끝날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청와대에서는 '공무 국외여행 규정 위반'을 들어 김창국 위원장에게 '경고' 처분을 내립니다. 어쩌면 참 가벼운 처분이었으니, 기분 나쁘지만 순응하고 끝낼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김창국 위원장은 달랐습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의 국가 인권위원회를 위해서 그는 이 처분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규정에 의하면 장관급 공무원이 국외여행을 갈 경우 반드시 대통령의 사전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대통령의 통제와 지시를 받는 행정부 소속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규정이라는 것이 김창국 위원장의 반발이었습니다. 따라서 "독립기구인 국가 인권위원회는 대통령의 지시와 통제를 받는 기구가 아니니 대통령에게 인권위원장이 공무 국외 여행을 사전 허가받을 이유가 없다"며 주장한 것입니다. 국가 인권위원회의 올바른 위상을 위해 싸운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 파열음을 낸 것은 2003년 3월의 일이었습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첫 번째 사회적 이슈가 된 이라크 전쟁 파병 문제. 노무현 정부와 대한민국 시민사회는 이 문제를 두고 치열한 공방을 이어갑니다. '미국의 압력에 따라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정부와 '전쟁터에 우리 국군을 보내서는 안된다'는 시민사회의 반발은 연일 불꽃을 튀기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파병 문제로 사회적 갈등이 가파르게 대치하던 상황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초유의 성명서가 국가 인권위원회에서 발표됩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국군의 이라크 파병안을 반대하는 국가인권위원회 공식 성명서였습니다. 이러한 성명서 채택에 국무회의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인권위원장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며 징계해야 한다는 강경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무마한 사람은, 다름 아닌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징계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국무위원들에게 국가 인권위원회의 역할을 직접 정리하는 중요한 발언을 합니다. 바로 "인권위는 원래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든 곳"이라는 발언이었습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나요? 비록 이라크 파병은 인권위원회의 반대에도 강행되었지만 이후 국가 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됐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6년 7월 13일 청와대에서 김창국 위원장(장관급) 등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위원 9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6년 7월 13일 청와대에서 김창국 위원장(장관급) 등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위원 9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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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김창국 위원장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국정 운영을 담당하는 대통령과 인권을 지키려는 인권위원장 사이에서 때때로 대립하고 갈등했지만, 사실 이 두 분의 관계는 대통령 당선 이번부터 남달랐다고 합니다. 선거에서 연속 떨어지면서도 다시 도전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후원의 밤 축사를 하러 가 "돌쇠처럼 미련한 분, 그러나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는 말로 격려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러던 지난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시자 김창국 위원장은 누구보다 그 죽음을 애석해 하셨습니다. 추후 노 대통령의 유언처럼 봉하마을에 묘역이 조성되고 이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박석을 만들 때, 김창국 위원장 역시 그 봉하마을에 자신의 이름으로 추모 박석 하나를 새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박석 위에 김창국 위원장은 이런 글귀를 적었습니다.

'당신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역사 인식과 철학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 김창국

김창국 위원장님, 사랑합니다. 영면하소서.

2006년 8월 18일, 친일파재산을 되찾기 위한 범정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개소식을 열었다.
 2006년 8월 18일, 친일파재산을 되찾기 위한 범정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개소식을 열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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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18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개소식에서 위원장이 최용규 열린우리당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06년 8월 18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개소식에서 위원장이 최용규 열린우리당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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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원장님을 제가 가까이에서 모시고 일한 때는 지난 2006년 9월의 일이었습니다. 2004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에서 임기 만료로 물러난 김창국 위원장이 다시 국가기관의 수장을 맡게된 것이 이때였습니다. 바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위원장(장관급)이었습니다.

2006년 9월부터 2010년 7월까지 근 4년간 위원장님과 함께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조사관으로 임명장을 받던 첫날이었습니다. 그날 김창국 위원장은 일일이 조사관들에게 임명장을 건네준 후, 아주 짧고 간결한 치사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말씀은 위원회 활동이 끝난 지금까지도 제 가슴에서 어제처럼 생생하게 들려오는 진한 감동입니다.

"오늘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 조사관으로 임명되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축하를 드립니다. 그리고 반민특위가 강제 해체되고 그 뒤를 잇는 이 역사적인 일을 여러분들과 제가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도 참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이 좋은 일을, 그것도 월급까지 받아가면서 우리가 일할 수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역사에 죄짓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겠다는 약속을 합시다."

그리고 이후, 김창국 위원장께서는 스스로 다짐하신 것처럼 정말 최선을 다해 일하셨습니다. 특히 친일 반민족 재산조사위 위원장으로 재임하던 도중, 정권 교체로 여당이 된 한나라당의 노골적 핍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친일 재산 환수를 위해 일하는 우리 위원회에 대한 반감에 힘들어 할 때 직원들의 중심을 잡아준 분 역시 김창국 위원장이었습니다.

비록 제한된 여러 조건과 부족한 조사 일정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친일 재산을 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김창국 위원장의 열정과 지도력 덕분이었습니다. 이러한 김창국 위원장의 공적은 대한민국 역사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분명한 족적이 될 것입니다.

그런 분의 부고 소식에 참으로 황망한 하루였습니다. 결국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너무도 송구하지만, 위원장님이 남기신 그 아름다운 원칙을 저 역시 잊지 않겠습니다. 특히 장준하 선생님 의문사와 관련한 제 활동이 언론에 보도되거나 책이 나오면 그 기사를 봤다며 전화하셔서 늘 "고상만씨는 참 대단해. 무슨 일이든 잘 할꺼야"라면서 넘치게 격려해 주시던 따스한 그 맘,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위원장님이 못 다한 그 열정, 후배인 저희가 받아 안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다운 나라, 인권이 인권답게 보장되는 사회, 그리하여 친일 반민족행위자는 역사적 단죄를 받고, 진짜 애국자가 애국자로 예우받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김창국 위원장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영면하소서.


태그:#김창국 위원장, #친일 재산조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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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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