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시 서는 랑탕 사람들

다음 날 아침, 랑탕 마을에 주민과 현지에서 일하는 노동자 그리고 독일인 건축업자 등 50여 명을 만났다. 이들에게 전날 만든 케이크, 도넛츠와 카트만두에서 가지고 간 빵을 전했다. 그리고 150여 개를 남겨두었다.

랑탕 마을을 떠나며 다른 배낭에는 나머지 빵을 챙겼다. 돌아오는 길에 건축 현장과 지진피해 게스트하우스 측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빵이다. 우리가 계획한 이동지는 이틀을 걸어온 거리인데, 내리막 길이라 걷기 쉽다는 이유로 강행군하려고 했다.

우리는 전날 빵을 만든 후 팔상 타망씨와 현지 노동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고, 사람과 물만 남은 폐허의 땅. 이 땅을 일구는 그들에게 그 어떤 특별한 말도 전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누군가 찾아와준 것만으로 다행스럽고 기쁜 표정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새로운 터전을 일구기 시작하고 우리를 반겨줄 작은 오두막이 생긴 것에 고마워했다.   

사진 위가 랑탕 히말이다. 랑탕 히말에 눈이 쏟아져 대참사를 일으켰다. 절벽의 하얀 돌은 그때 흘러내린 눈으로 씻겨진 것이다. 이곳에 빵을 전달했다.
▲ 랑탕 마을 뒷산인 랑탕 히말 사진 위가 랑탕 히말이다. 랑탕 히말에 눈이 쏟아져 대참사를 일으켰다. 절벽의 하얀 돌은 그때 흘러내린 눈으로 씻겨진 것이다. 이곳에 빵을 전달했다.
ⓒ 김형효

관련사진보기


빵을 나눠주자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빵을 나눠먹는 모습이다. 현장의 독일 건설회사 직원들도 함께했다.
▲ 빵을 먹고 있는 랑탕 사람들 빵을 나눠주자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빵을 나눠먹는 모습이다. 현장의 독일 건설회사 직원들도 함께했다.
ⓒ 김형효

관련사진보기


랑탕 마을을 오가며 우리가 본 풍경은 무너진 수많은 절벽이다. 그리고 랑탕 마을에서부터 고다따벨라까지 랑탕 대참사의 상흔을 안고 뿌리째 뽑혀 죽은 나무를 보았다. 샤브르베시 인근에는 며칠 전 불에 타죽어 버린 나무들이 앙상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가 도착하기 2~3일 전 이틀 동안에 장대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비가 진화해준 덕분에 더 큰 불로 번지지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모습에 참담한 마음이 든다.

화재와 바람, 대지진에 건너편 산 언덕의 푸르던 나무들이 다 죽어버렸다. 마을은 무너져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잡풀조차 살지 않는 땅, 그곳이 현재의 랑탕 마을이다. 희망처럼 랑탕에서 흘러내려 온 맑은 물이 그들을 살리고 있었다. 그것이 살아갈 힘을 주는 유일한 생명이었다.

4박 5일 일정 내내 빵과 비스킷, 랑탕에서 만든 케이크와 도넛츠를 나눠주었다. 그리고 내가 쓴 네팔어 동화와 네팔어 시집, 아내의 한국 여행기, 얼마 안 되는 학용품과 아이들 머리 묶는 고무줄을 나눠주며 랑탕 마을까지 갔다.

2~3시간 간격으로 과거부터 인연이 되어준 게스트 하우스 주인들을 만나 사연을 주고받았다. 그들과 또다시 만날 기약을 나누기도 했다. 랑탕 계곡 주변에 사는 모든 게스트 하우스 주인은 한결같이 한두 사람, 많게는 수십 명의 가족을 잃었다.

하지만 '산 사람은 산다'는 바람 같은 말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말순간이 랑탕 계곡 사람들 앞에 다가왔다. 그 말은 이들에게 절대적인 문장이 되었다. 누군가는 죽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곳에서 그들은 희망을 끈으로 삼아, 오가는 사람을 생명처럼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 

새가 날고 있다. 바윗돌에는 랑탕에서 죽어간 외국인들의 추모 표식이 있었다. 사진 아래 앞산에선 나무들이 가지런히 누워 죽어 있었다.
▲ 랑탕에서 죽어간 외국인에 추모 표식 새가 날고 있다. 바윗돌에는 랑탕에서 죽어간 외국인들의 추모 표식이 있었다. 사진 아래 앞산에선 나무들이 가지런히 누워 죽어 있었다.
ⓒ 김형효

관련사진보기


무너지고 불탄 가슴 "그럼 어디로 가느냐?"

내가 케이크와 도넛츠를 만들었던 부엌은 대참사 당시 친구 일곱 명이 함께 있다가 참변을 당했다고 한다. 그곳은 팔상 타망씨 딸의 무덤이 되었고, 그의 부인은 그 자리가 무덤이 될 뻔했다. 다행히 팔상 타망씨의 부인은 기사회생했다.

나는 전날 밤 팔상 타망씨 부부와 대화를 나누며 너무 한심한 질문을 던졌다. "딸이 죽었고 부인이 죽을 뻔했던 이곳에 다시 집을 짓느냐?"고 말이다. 그들은 너무도 담담하고 당연하다는 듯 "그럼 어디로 가느냐?"고 반문했다. 그런 질문과 대답이 그들 부부에게만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아픈 현실이다. 고요한 랑탕 계곡에 사는 대부분 사람에 해당하는 사연이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새벽하늘. 하늘을 올려다보면 랑탕 마을에 더없이 싸늘한 슬픔이 찾아들며 더 큰 눈물이 되는 날이다. 이제 오는 4월 25일이면 랑탕 계곡에 모두 모여 자신의 인연들을 떠나보낸 슬픔을 함께 나눌 예정이라고 한다. 175명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그 외 외국인 사망자까지...

마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 중 누군가 '다시 오라'고 말했다. 그 인사는 '빵을 다시 가져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절박했다. 웃으며 답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집 짓는 동안 이곳에 머물며 그들이 원하는 만큼 빵을 만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내 현실 또한 녹록지 않으니 어쩌랴.

발길을 돌리며 우리가 머물렀던 집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랑탕 마을의 모습을 기억의 곳간에 담기 위해 애를 쓰며 내려왔다. 우리는 전날 라마 호텔에서부터 걸었던 터라 익숙해진 길을 걸었다.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해발 3340m 랑탕 마을을 지나가고 있다. 사라진 마을에 외롭게 롱바가 휘날리고 있다.
▲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사람들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사람들이 해발 3340m 랑탕 마을을 지나가고 있다. 사라진 마을에 외롭게 롱바가 휘날리고 있다.
ⓒ 김형효

관련사진보기


포터에게도 빵을 나눠주었다. 저 먼 산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한사코 나를 외면하고 섰다.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이 측은하기만 하다.
▲ 포터에게도 빵을 나눠주었다. 포터에게도 빵을 나눠주었다. 저 먼 산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한사코 나를 외면하고 섰다.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이 측은하기만 하다.
ⓒ 김형효

관련사진보기


전날 만난 사람들을 다시 만난 곳은 집을 짓는 고다따벨라였다. 우리는 2시간 정도를 걸어온 후 그곳에서 가져온 케이크와 도너츠를 나눠주었다. 그들과 함께 네팔 전통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걷다가 쉬다가 하면서 랑탕 계곡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주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왔다. 우리가 하루 더 머물기로 한 캄진까지 무려 9시간을 넘게 걸었다. 우리가 머물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빵을 배달하면서 걸어온 것이다.

올라갈 때 이틀 걸었던 길을 하룻밤에 내려왔다. 쉽지 않은 복구 현장을 보았고 고난 속에 사는 랑탕 계곡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들이 더 강한 힘으로 희망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사람과 사회에도 게재합니다.



태그:#랑탕 마을 사람들, #노동자, 외국인 건축업자, #무너지고 불탄 가슴, #팔상 타망, #다시 세우는 마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