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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만주 봉천에서 모진 고통을 겪으시고 해방 후에도 온갖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
▲ 살아생전 김우명달 할머니의 모습 할머니께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만주 봉천에서 모진 고통을 겪으시고 해방 후에도 온갖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
ⓒ 정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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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는 1943년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돼 만주 봉천에서 모진 고통을 겪으시고 해방 후에도 온갖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 2007년 3월 12일 여든아홉 인생을 마감하셨다.

김우명달 할머니 묘지 앞에 10년 만에 다시 섰다. '먹고 사는 일의 엄중함'에 파묻혀 할머니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픔을 다룬 영화 <귀향> 개봉 소식을 들었지만, 그 절절한 할머니들의 깊은 상처를 다시 목격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주저하고 바라보기만 했던 터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서부경남지역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돌보던 언니가 우리 부부가 진주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운을 띄웠다.

"이번 주말(3월 12일)이 김우명달 할머니의 기일이니, 산소에 같이 가자."

기억 넘어 잊고 있던 사람들이 흑백영화 필름처럼 지나간다. 게다가 요즘 영화 <귀향> 상영관이 늘어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얼굴이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진주 지역의 젊은 청년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삶에 대해 알리고 싶어 준비했다. 정서운 할머니의 마지막 증언이 이날 이뤄졌다.
▲ 정서운 할머니 공개강연 포스터 진주 지역의 젊은 청년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삶에 대해 알리고 싶어 준비했다. 정서운 할머니의 마지막 증언이 이날 이뤄졌다.
ⓒ 밥과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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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 할머니들에게 애정이 있는 선배·친구들과 함께 '밥과 민들레'라는 이름으로 서부경남 지역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다. 우리의 활동은 2003년 3·8 세계여성의 날 즈음해 하동 악양의 정서운 할머니를 경상대에 모시면서 시작됐다.

"조국이 힘이 없어 끌려간 것인데, 부끄럽다면 조국이 부끄러워야지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던 정서운 할머니의 강단 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외로워 보이는 무덤 그리고 노란 복수초

그 흔한 조화 한송이 없어 얼핏 보면 무덤인지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할머니의 이름 석자 세길 묘비도 찾을 수 없으며, 찾아온 사람의 흔적도 없었다. 처연한 시간이 묻어난다.
▲ 김우명달 할머니가 잠들어 계신 작은 무덤 그 흔한 조화 한송이 없어 얼핏 보면 무덤인지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할머니의 이름 석자 세길 묘비도 찾을 수 없으며, 찾아온 사람의 흔적도 없었다. 처연한 시간이 묻어난다.
ⓒ 박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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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묘비석도 없고, 그 흔한 조화 하나 없이 덩그러니 잠들어 계신 김우명달 할머니 묘지 앞에 섰다. 죽어서도 서럽고 외로움에 시간을 쓸쓸히 견뎌냈던 시간이 얼마나 길었을까 생각하니 할머니의 삶이 더욱 가엾다.

함께 간 언니는 김우명달 할머니께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시라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며 평소 좋아하시던 식혜와 곶감을 올려 조촐한 상을 차렸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곳에서 편히 쉬고 계시지요'라고 두 번의 절을 올리고는 뒤를 돌아보니 노오란 복수초들이 환하게 할머니의 삶을 비추는 촛불처럼 묘지 주변으로 피어있다.

이날 나와 함께 김우명달 할머니 묘소를 찾았던 남편은 할머니 장례를 치를 때 마을 뒷산에 피어 있었던 복수초가 생생히 기억난다고 회상했다. 복수초 꽃잎 하나 하나에 할머니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할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 너거도 산다고 바빴제, 그래 정신없었을 끼다. 잘왔다. 고맙다..'

쓸쓸한 할머니곁에서 피고 지는 복수초를 보며 할머니가 우리에게 보내 준 선물이 아닐까 생각하며,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그들에게 복수의 마음을 품었다.
▲ 할머니 곁에 활짝 핀 복수초 쓸쓸한 할머니곁에서 피고 지는 복수초를 보며 할머니가 우리에게 보내 준 선물이 아닐까 생각하며,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그들에게 복수의 마음을 품었다.
ⓒ 박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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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협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38명 중 2016년 2월 20일 기준으로 마흔네 분이 살아계시다고 한다. 현재 진주를 포함한 서부경남 지역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모두 소천하셨다.

할머니들의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는 한 번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더욱 기가 찰 노릇은 실험본 교과서에 '전쟁터의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진 제목과 함께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가 됐다"라는 사진 설명이 서술됐으나, 최종본 교과서에는 사진이 삭제되고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 여성들은 일본군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라고 서술했다.

'위안부'와 '성노예'라는 표현이 삭제되고, 구체성이 결여된 서술로 바뀐 것이다. 할머니들의 아픈 삶이 아이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진실을 외면하는 정부, 우리에게 요구되는 건 지금 저 산 속에서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는 복수초처럼, 할머니들 곁을 지켜 한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타이완·필리핀·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곳곳의 여성들이 강제로 끌려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됐다. 지금도 여전히 이유 있는 싸움을 하고 있는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금낭화를 예쁘게 가꾸시던 할머니 꽃밭이 그리워 찾아갔다. 소박하지만 너무도 정갈하고 깔끔하던 할머니의 손떼가 묻어 나던 집이었으나, 주인을 잃고 집은 창고로 변해 있었다.
▲ 김우명달 할머니가 사셨던 집 대문의 모습 금낭화를 예쁘게 가꾸시던 할머니 꽃밭이 그리워 찾아갔다. 소박하지만 너무도 정갈하고 깔끔하던 할머니의 손떼가 묻어 나던 집이었으나, 주인을 잃고 집은 창고로 변해 있었다.
ⓒ 박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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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김우명달 할머니, 너무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곳에서는 고통없이 편히 쉬세요. 밥과 민들레에서 함께 활동하던 친구들과 찍은 사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김우명달 할머니, 너무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곳에서는 고통없이 편히 쉬세요. 밥과 민들레에서 함께 활동하던 친구들과 찍은 사진.
ⓒ 박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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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우명달 할머니, #가난, 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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