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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이 지난 10년간의 투쟁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이 지난 10년간의 투쟁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 신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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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길 가다가 갑자기 눈물이 뚝뚝 흘러내려요."
"그게 정상입니다."

지난해 심리상담을 한 의사는 김승하(37)씨에게 '정상'이라고 진단했다. 길을 걷다가도 무심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어떻게 정상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들다가도 그의 처지를 떠올리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12년 전,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꿈꾸고 들어갔던 생애 첫 직장에서 비정규직의 비애만 느꼈던 그. 불합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나섰다가 해고되고, 3년여 동안 '점거, 삭발, 단식' 같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을 줄 알았던 단어들을 실제 경험했던 그. 법정투쟁으로 돌아서 1,2심에서 위장도급 판결을 이끌어 복직의 희망을 봤다가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히는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던 그.

대법원에서 2심 판결 후 4년 동안 받았던 임금 9000여만 원의 반납을 함께 명령해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한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픔을 겪었던 그.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지부장이기도 한 그, 김승하씨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을 돌덩어리들의 무게를 짐작해 본다. 이제 그의 곁엔 380여 조합원 중 32명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염려와 달리 설연휴 전에 만난 김씨는 "남은 33명이 만나 투쟁하던 얘기를 하다보면 위안을 얻는다"며 말갛게 웃었다. 지난해 대법원 판결 직후부터 그가 출근하고 있는 철도노조 서울본부 사무실에서 KTX여승무원들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여행을 함께 했다.

'지상의 스튜어디스' 뽑는다 해놓고는...

2004년, 한 채용공고가 김승하씨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KTX 개통을 앞두고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뽑는다는 철도공사의 광고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승무원을 꿈꿨던 그다. 외국어 실력을 쌓기 위해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직후였다. 철도공사는 채용 당시 "1년 계약직 후 정규직이 돼 공무원 수준의 후생복지와 정년을 보장받는다"고 밝혔다. 4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원했고, 김씨는 13대1의 경쟁률을 뚫었다. 함께 지원했던 항공사 승무원시험에서 실무면접에까지 올랐지만 면접시험에 가는 대신 KTX를 택했다.

그 까닭을 물으니 김씨는 "KTX승무원을 모집한다고 했지, 홍익회 직원을 뽑은 게 아니니까요. 주변에서도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여서 일반기업보다 나을 거라고 했고, 처음 생기는 거니까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어요"라고 답했다.

그 기대감은 합격 후 연수를 받으면서부터 서서히 깨져갔다.

"연수 때 교육을 받는데 회사가 체계도 없고 많이 부족해 보였어요. 개통을 앞두고도 관리자들이 어쩔 줄 몰라 하기만 하고요. 당장 내일이 개통인데 스케줄이 안 나온 거예요. 내일 일을 해야 하는데 무슨 열차를 언제 타는지도 몰라. 승무원들이 더 다급해서 전화를 하면 전화 온 순서대로 열차를 타라고 했어요. 또, 회사 공지를 다음 카페에 올리는 거예요. 우리끼리 '우리 무슨 동호회니?'라고 얘기하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승무원들이 속한 철도공사의 자회사였던 홍익회의 관리방식도 문제가 많았다. 명찰부터 로커, 유니폼까지 각종 소모품비를 월급에서 공제했다. 유니폼비를 받으면서 신규 사원들에게 퇴사한 사람들의 유니폼을 주기도 했다. A부터 D까지 등급을 나눠 인센티브를 지급하는데 지각, 결근을 밥 먹듯이 하는 사원이 A등급을 받는 등 그 기준도 모호했다.

관리체계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는 사이, 회사는 해가 바뀔 때마다 여승무원들에게 철도공사의 또 다른 자회사인 한국철도유통, 케이티엑스관광레저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 비정규직을 2년 넘게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한 노동법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

이미 한국철도유통으로 옮기면서 열악했던 근무조건이 더 나빠지는 걸 경험했던 여승무원들은 케이티엑스관광레저로 옮기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파업에 돌입한다. 2006년 3월 1일의 일이다. 그로부터 3년여 동안 여승무원들은 단식, 삭발, 고공농성 등 해볼 수 있는 모든 투쟁을 시도했다.

투쟁하느라 꽃무늬 원피스 못 입은 게 아쉬워

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은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는 건 우리의 10년간 투쟁을 부정하는 거"라며 끝까지 투쟁할 뜻을 밝혔다.
 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은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는 건 우리의 10년간 투쟁을 부정하는 거"라며 끝까지 투쟁할 뜻을 밝혔다.
ⓒ 신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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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김씨에게 투쟁했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지 물었다.

"결과가 안타깝게 되긴 했지만 같은 상황에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저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요. 잘못된 걸 그냥 보아 넘기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시작을 안 하지 않았을 거고, 파업에 들어간 이상 대오에서 벗어나 먼저 복귀하지도 않겠죠. 후회한다면 내가 이런 나인 걸 후회한다는 말이니까 그건 맞지 않죠."

그러면서 그는 국회를 점거했던 이야기를 했다. 그 많던 투쟁 중 가장 힘들었던 투쟁이었단다. 일부는 국회로 들어가고 그는 밖에 있는 대오에 있었다. 전경들이 국회를 둘러싸서 10시간 가까이 안으로 물 하나, 먹을 거 하나 들여보내지 못했다.

"친한 친구가 들어가 있었는데 친구들이 아무것도 못 먹고 갇혀 있는 걸 보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시간이 너무 천천히, 고통스럽게 흘러갔죠. 꼭 연애 실패했을 때의 아픔이랄까. 다음부터는 '내가 들어간다고 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걸 못 견디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어요."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없을까. 그러자 그가 "꽃무늬 원피스 못 입은 거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주름 잡혀서 레이스 많은 여성스러운 스타일의 옷을 좋아한다는 그가 한창 멋 부릴 20대에 투쟁한다고 잠바나 투쟁조끼만 입고 있었던 거다.

"파업을 봄에 시작했잖아요. 꾸미는 거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쁜 옷 입고 있으면 서로 '나도 저런 옷 입고 싶다'며 부러워했죠."

만날 잠바때기만 걸치고 다니던 여승무원들이 한번은 다같이 승무원 유니폼을 꺼내 입고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쪽머리에 화장까지 곱게 하자 잠바 뒤에 감춰졌던 그들의 젊음이 드러났다. 그 푸름은 언젠가 다시 꺼내질 날을 기다리며 김씨의 옷장 한구석 상자 속에 곱게 놓여 있는 승무원 유니폼과 함께 봉인됐다.

법정투쟁으로 돌아선 후 그는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컨벤션이나 컨퍼런스를 기획하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홀연히 중국으로 날아갔단다. 중국어 공부를 하다가 댄스 스쿨 사업을 하려고도 했다고. 승무원과 댄스라? 어색한 조합에 어리둥절해하자 그가 대학 때부터 스윙댄스 동호회 활동을 해온 경력을 들려준다. 춤추는 걸 좋아해서 건전한 느낌의 춤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스윙댄스였단다. 이런 끼를 그 긴 시간동안 어떻게 억누르고 살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 못하고 돌아온 까닭을 그가 말했다.

"혼자 떨어져 있어서 처음에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채우지 못하는 공허함 같은 게 느껴졌어요. 우리는 KTX라는,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경험을 했잖아요. 이 경험을 같이 나누고 하소연하면서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건 오로지 지금 남은 33명만이 해줄 수 있는 거더라고요. 어딜 가도 나한테는 이 사람들이 꼭 필요하겠구나 생각했어요."

10년 동안의 투쟁을 부정할 수 없어

김승하씨가 직접 만든 외주위탁이 계속 될수록 철도의 안전성은 작아진다는 것을 뜻하는 마트료시카.
 김승하씨가 직접 만든 외주위탁이 계속 될수록 철도의 안전성은 작아진다는 것을 뜻하는 마트료시카.
ⓒ 신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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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친구와 함께 자기계발·인재양성 강사를 육성하는 회사를 꾸릴 계획이었다. 연수도 받고 스터디도 하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해갔다.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던 그가 "이런 것도 만들었다"면서 명함 한 장을 보여줬다. 명함에는 '전임연구원 김승하'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철도노조 사무실로 출근을 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로 그의 계획은 모두 멈춘 상태다.

"여기서 투쟁을 그만두면 10년 동안 우리가 외쳤던 것들이 잘못이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그런데 사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대법원 판결이 잘못됐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거든요.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싸우는 사람이 필요하고, 누군가 대신 싸워줄 수 없으니 제가 나서야죠."

그의 말대로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KTX 여승무원들의 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간접고용의 문제를 더욱 확산시키고 불법적 파견에 면죄부를 부여한 판결"이라면서 '2015년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 뽑았다.

현재 KTX는 이들이 싸웠던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달리고 있다. 여전히 철도공사 소속인 열차 팀장과 외주위탁 업체 소속인 여승무원들이 타고 있다. 규정 상 열차 내 안전업무는 열차 팀장 1인만이 하도록 돼 있다. 안전사고가 나도 여승무원들은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판이다. 김씨는 "승무원들이 항상 무전기를 들고 다니는데 그건 열차 안에서 서로 소통하기 위해서이거든요. 그런데 불법 파견에 걸리지 않으려고 서로 말도 섞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가능한가요?"라고 되물었다.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는 오는 2월 25일, 'KTX 해고 승무원과 함께하는 연대의 밤' 행사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날로부터 꼬박 364일이 되는 날이다. 행사 안내문은 KTX 승무원들의 마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저앉지 않겠습니다. 어느덧 훌쩍 커버린 아이의 손을 잡고 다시 힘을 내겠습니다. 이제 서른세 명이 됐지만 떠나간 동지를 가슴 한켠에 묻고 다시 싸우겠습니다."

김씨가 설명을 덧붙였다.

"철도공사 측에서 당장 임금 반환 청구 소송을 한다는 소리가 들려와요. 지금은 매주 서울역과 부산역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지만 이제 투쟁 강도도 강해져야겠죠. 이번 연대의 밤은 투쟁기금을 모금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연대의 틀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해요."

그는 지난 10년 동안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해준 사람들에게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또, 앞으로 다가올 투쟁에도 함께 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행사를 준비했단다.

얼마 전 타계한 신영복 선생님은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하셨다. 10년째 해고 상태인 KTX 여승무원들이 함께 비를 맞을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할머니가 될 때까지 승무원으로서 열차를 타고 싶다"는 김승하씨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덧붙이는 글 | ‘KTX 해고 승무원과 함께하는 연대의 밤’ 행사는 2월 25일(목)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
합정역 7번 출구 근처에 있는 카우카우에서 열린다. 연대의 밤에 함께 하지 못하는 이들은 후원으로도 마음을 전할 수 있다.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2-036-891465(예금주 정미정)



태그:#KTX여승무원, #철도공사, #외주위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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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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