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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은 면역성이며, 면역성은 생명성이다.'

찰스 다윈이 불후의 명저 <종의 기원>에 남긴 유명한 문구다. 특정한 유전자를 강화하기보다 다양한 형질로의 진화를 통해 종이 그 존재를 유지하려 한다는 찰스 다윈의 혁신적 통찰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멸종위기에 처한 종을 살려내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환경보호론자들 상당수도 동정론이나 의무론에 앞서 생명다양성의 효용성을 이야기하지 않던가.

다양성이 곧 생명성이 된다는 다윈의 통찰은 비단 자연과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문화의 영역에서도 다양성은 문화계 전체의 면역력을 키우고 존재를 이어가는데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소위 문화강국으로 여겨지는 나라의 예술작품을 들여다보면 장르와 형식의 경계를 뛰어넘어 다른 형태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례가 부지기수다. 연극, 회화, 무용, 건축, 문학, 음악에 이어 제7예술로 지위를 확고히 한 영화의 경우만 봐도 이는 명확하다. 앞의 6가지 예술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은 작품이 대체 몇 편이나 있겠는가 말이다.

대비되는 일본과 한국의 장르문학

책 표지
▲ 야경 책 표지
ⓒ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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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지만 더없이 멀기도 한 두 나라, 한국과 일본은 예술적 다양성 측면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사례다. 문학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은 장르문학의 불모지다. 평론가들에 의해 순수문학이라 이름 지어진 소수의 작품들이 신춘문예와 몇몇 문학상, 동인지에 가까운 문예지 등 그들만의 리그에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지만 울타리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많은 작품들은 스스로 제 살 길을 도모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무협과 판타지, 일부 웹소설이 그러하듯 하위문화의 형태로 존립을 이어가는 것 말고는 한국에서 장르문학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다. 공상과학과 미스터리, 공포, 로맨스 등 다른 나라에선 확고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장르들도 성공한 사례가 손에 꼽는다.

주류 작가들이 장르문학을 시도하는 경우도 많지 않고 장르문학 자체에서 스타작가가 탄생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일부 포털사이트와 대형 서점에서 장르문학을 지원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이름을 알린 작가는 전무하다시피하다. 2000년대 후반 들어 유명 작가들이 연이어 발표한 성장소설 정도가 그나마 장르문학이 주류문학 안에 정착한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반면 일본은 장르문학의 천국이다. 공포, 미스터리, 로맨스 등 각 장르에서 유명 작가가 줄을 이어 탄생한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온다 리쿠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출판시장의 불황이 극심하다지만 장르문학을 지원하는 다양한 문학상을 통해 저마다의 색깔을 지닌 작가가 꾸준히 독자와 만날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됐다.

한 해 한국에 출판되는 일본 장르소설만 해도 100권에 육박하고 라이트 노벨부터 각종 장르소설이 여러 플랫폼을 통해 독자와 만난다. 수년째 한국의 서점과 도서관에서 한국문학을 압도하고 있는 일본문학의 뒤엔 이 같은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장르문학의 불모지에서 읽는 수준 높은 일본 장르소설

<야경>의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도 장르문학상인 '가도카와 학원 소설 대상'을 통해 데뷔했다. 데뷔 이후 16년 동안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그는 어느덧 일본 미스터리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그의 소설은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 한국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한국에선 지난 한 해 동안 <야경>을 비롯해 <안녕 요정>, <보틀넥> 등 여러 편의 소설집이 소개됐는데 그 모두가 나름의 성과를 거둔 듯하다.

특히 미스터리 단편집 <야경>은 요네자와 호노부 문학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이다. 442페이지 분량에 '야경', '사인숙', '석류', '만등', '문지기', '만원' 등 6편의 단편이 수록됐는데 그 하나하나가 매력이 대단하다. 각각이 그리 많지 않은 분량으로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울 만큼 흥미진진하다. 저마다 다른 구성과 배경임에도 완성도가 차이나지 않는다는 점도 대단하다. 작가의 꼼꼼한 사전조사와 치밀한 설정 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작은 동네 파출소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야경', 사람이 죽어나가는 외진 온천여관을 배경으로 한 '사인숙', 한 가정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이야기를 다룬 '석류', 방글라데시에 진출한 자원회사 직원이 겪는 사건을 다룬 '만등', 외진 고갯길 휴게소에서 만나는 흥미로운 이야기 '문지기', 자신이 변호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뒤늦게 깨달아가는 '만원' 등 다채로운 구성의 이야기가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상당한 재미를 선사한다.

흔히 만날 수 없는 새로운 형식부터 미스터리 장르에서 자주 쓰이는 구성을 쉽게 알아챌 수 없도록 변주한 시도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점 역시 큰 장점이다. 장르문학의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고 문학작품이 도달할 수 있는 높은 지점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려는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은 다양한 취향을 가진 독자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등장인물과 그들이 겪는 이야기에서 요네자와 호노부가 인간이 지닌 어두운 면에 깊이 탐닉하고 있다는 인상도 들지만 그것이 불쾌하거나 찝찝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건 더욱 높은 수준에 다다르기 위해 이야기를 갈고 닦는 치열함이 모든 작품에서 묻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내겐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런 만남이었다.

덧붙이는 글 | <야경>(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5.7. / 15000원)



야경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엘릭시르(2015)


태그:#야경, #요네자와 호노부, #김선영, #엘릭시르,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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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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