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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지났다. 스산했던 겨울이 물러나고 꽃 피는 봄이 오며 학생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터져 나올 때가 왔다. 그러나 단원고의 교실은 침묵 속에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이라는 인권캠프(1월 29일부터 31일까지 진행)를 통해 방문한 기억 교실은 공사 소리와 많은 이들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했으나 정작 주인들은 없어 싸늘했다. 비어있는 수많은 책상들 위엔 한때 열풍을 일으킨 허니버터칩이 국화꽃과 나란히 놓여있었다.

'왜 같이 있지?' 많은 학생들이 죽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당혹스러웠다. 그저 뉴스로만 세월호 참사를 접한 나에게 어린 생명들과 죽음이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나는데 허니버터칩과 국화꽃, 그 조합이 너무나도 슬펐다.

단원고 기억 교실에 있는 칠판. 가운데에 파란색 분필로 '얘들아 웃을 때도 있어서 미안해 사랑해'라고 적혀 있다.
 단원고 기억 교실에 있는 칠판. 가운데에 파란색 분필로 '얘들아 웃을 때도 있어서 미안해 사랑해'라고 적혀 있다.
ⓒ 김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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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려 칠판을 바라보았다. 아마 대부분은 생존자와 유가족들이 쓴 것 같은데 빼곡히 가득 차서 다 읽을 수가 없었다. 실은 묻어나는 그 감정들은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반쯤은 외면하며 본 것이었다. 수많은 글귀 중, 희한하게도 시선을 사로잡은 글이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 눌러 쓴 다른 글들과 다르게 분필을 날려서 썼는데 그 마저도 다른 글귀 위에 있어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내가 그 글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얘들아 웃을 때도 있어서 정말 미안해 사랑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만히 볼수록 마음이 아려 비록 글일지라도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게 죄가 아니라고, 사람이니까 살아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잔인하다. 한계를 뛰어넘는 기적을 간절히 바랐던 이들에게 그런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마치 포기하라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차가운 현실로 끌어내리는 듯하다. 숨이 막힌다.

생존자들과 유가족들과 많은 국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고 싶어 한다. 주변에서 아무리 이제 잊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 언제까지 죽은 애들 잡고 살 것이냐, 혹은 이번 기회에 한몫 잡으려고 하냐며 감정 하나 없는 이기적인 말들을 쏟아내 상처 받아도 포기할 수가 없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세월호의 피해자들도 단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었기에 잊을 수가 없다.

5월의 광주가 전혀 서정적이지 않았듯이 세월호 또한 마찬가지이다. 차가운 바다 속에 잠겨있는 건 꽃잎들이 아니라 차갑게 불은 시체들이고, 괴물 같은 자들은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했으면서 이제는 우리에게 잊고 놓으라고 일갈한다. 이런 잔인함은 세월호 자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사람들에게 삼풍백화점이나 대구 지하철 참사처럼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건이 되길 바라는 것 같다.

허나 이제는 단순히 머리 속에서 '아,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무시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많은 비극은 평범한 우리에게도 세월호가 당사자들만의 개인적인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다. 2014년 4월 16일 이후로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겠다고 말한 것은 개인적이고 단순한 사건의 기억이 아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만들지 않겠다'라는 다짐에 가까운 집단적인 기억이었다.

우리는 모두 안전하게, 아무 걱정 없이 여행을 갈 수 있는 나라를 원한다. 집에서 발 한 짝 나서면 혹시 죽을까 두려워하는 나라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요즈음 세월호를 말하면 외면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 안타깝지만, 안타깝게도 이해할 수 있다. 유가족들이 주축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금까지 목이 터져라 외쳐왔다.

도대체 멀쩡하던 배가 그대로 침몰할 수밖에 없었는지, 해경은 왜 구할 수 있었으면서 살려 달라 외치는 이들을 무시했는지 진실을 알려달라고 애썼지만 돌아온 것은 같은 사람대우가 아닌 냉대와 인양조차 언급되지 않은 특별할 것이 없는 특별법이다. 재판에서 해경의 무능함이 밝혀졌지만 이미 해경은 해체되어 처벌이 가능한지 조차 의문이고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현장을 배제한 채 결론을 내겠다는 것이 우습다.

초라하고 비루한 결과에 나 또한 힘이 빠졌다. 그러나 차마 포기할 수는 없다. 간절히 돌아오길 바랐고, 기억하겠다고 스스로 외쳤으며, 무엇보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 9명이 그곳에 있다. 민주주의란 다수결의 원칙이 아니라 소수의 인권 보장에서 그 품격이 드러난다.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약자인 미수습자 9명과 유가족들의 인권부터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됐을 지라도 가족을 되찾는 것, 그것뿐이다. 미수습자들의 유가족들은 광화문에 가본 적도 없다. 팽목항에서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먼저 잊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양이다. 인양은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인양이 세월호의 끝이 아닌 모든 변화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엔 아직 태어나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만 해도 오천만이다. 기울고 있는 대한민국호를 보며 국민들이 해경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한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 스스로가 작은 부품처럼 황하의 수많은 모래알 중 하나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우린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가져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태그:#세월호, #미수습자, #사람들, #인양, #단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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