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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눈에 봐도 소심하고 유약해 보이는 한 노동자가 사무실로 찾아 왔다. 그는 D회사에서 20년 가까이 연구직 노동자로 성실히 일해 왔다. 회사는 그에게 명예퇴직 압력을 넣고 있다고 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동조합이 있습니까?"
"생산직은 있지만 사무직은 없습니다."
"같이 버티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대부분 버티지 못하고 도장 찍었습니다."

"저성과자 해고 지침은 법적 구속력 없습니다"

"회사는 제가 입사 이후 지금까지 줄곧 성과가 좋지 않았다고 했어요. 도장 안 찍으면 바로 저성과자로 해고할 뿐 아니라 동종 업계 어디에 가도 재취업 못 하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회사는 제가 입사 이후 지금까지 줄곧 성과가 좋지 않았다고 했어요. 도장 안 찍으면 바로 저성과자로 해고할 뿐 아니라 동종 업계 어디에 가도 재취업 못 하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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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찍고 나면 후회 안 할 자신 있으세요?"
"평생 후회할 것 같습니다."
"그럼 도장 찍지 말고 버티세요."
"회사에서는 내일까지 도장 안 찍으면 저성과자로 해고하겠다고 합니다. 저성과자 해고 지침이 만들어져서 해고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과가 많이 안 좋으세요?"
"평균보다 조금 안 좋았던 것 같습니다. 작년에는 직속 팀장님이 괜찮은 점수를 줬습니다. 그런데 임원이 어차피 저는 명퇴 대상이라면서 성적을 낮게 바꾸었습니다."
"평가 자체가 왜곡되었는데 정당 해고가 되겠습니까? 설사 성과가 좀 떨어지더라도 그냥 해고하는 것은 부당해고입니다. 지침은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습니다. 버티다가 해고당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그의 얼굴에 차츰 환한 미소가 번졌다. 상담이 끝날 무렵 그는 나에게 버티겠다고 약속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오전 그가 다소 들뜬 목소리로 전화했다.

"변호사님 믿고 도장 안 찍었습니다. 저 정말 이길 수 있는 거죠?"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지났다. 오전에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변호사님, 회사가 며칠 동안 너무 심하게 협박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도장 찍었습니다. 저는 이제 다 끝난 건가요?"

"동종 업계 재취업 못하게 한다고..."

가슴이 먹먹해져서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에게 어렵게 물어봤다.

"선생님, 어떤 협박이 그렇게 무서웠어요?"
"회사는 제가 입사 이후 지금까지 줄곧 성과가 좋지 않았다고 했어요. 도장 안 찍으면 바로 저성과자로 해고할 뿐 아니라 동종 업계 어디에 가도 재취업 못 하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싸울 생각이 있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너무 한심합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렇게 그와의 마지막 통화가 끝났다.

"저성과자 해고 지침은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다. 따라서 사용자가 지침을 활용해서 노동자를 해고하더라도 법원에서는 예전처럼 다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침은 사용자에게 해고의 무기가 되고 있다."
 "저성과자 해고 지침은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다. 따라서 사용자가 지침을 활용해서 노동자를 해고하더라도 법원에서는 예전처럼 다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침은 사용자에게 해고의 무기가 되고 있다."
ⓒ 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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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과자 해고 지침은 아무런 법적 구속력이 없다. 따라서 사용자가 지침을 활용해서 노동자를 해고하더라도 법원에서는 예전처럼 다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침은 사용자에게 해고의 무기가 되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른바 '찍퇴(찍어서 퇴직)', '강퇴(강제 퇴직)', '명퇴(명예퇴직)'의 무기가 된다는 데 있다. 사용자가 지침을 활용해서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면서 찍퇴, 강퇴, 명퇴를 시킬 경우 이는 사실상 해고와 같다. 그러나 명퇴의 경우 당사자의 사인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구제받기 매우 힘들어진다. 

우리는 모두 시시한 존재들이고 홀로 고립되면 매우 나약해지는 존재들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지침은 우리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가공할 힘을 갖는다. 지침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단히 불순하고 고약한 적이다. 지침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윤성봉 시민기자는 법률사무소 휴먼 변호사입니다.



태그:#저성과자, #쉬운 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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