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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화에서 이어집니다

마치 1991년 영화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에서 한니발 렉터 박사(앤서니 홉킨스)가 사람들 심리를 발가벗기는 것처럼. 상관 지시에 따라 연쇄 살인자 심리를 알아보기 위해 살인과 식인(食人)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은 정신과 의사 렉터 박사를 찾은 클라리스 스털링(조디 포스터) 요원. 그녀를 상대로 그녀가 쓰는 향수, 그녀 구두와 옷차림, 그녀와 나눈 몇 마디 말로써 그녀 모든 것을 분석해 내는 렉터 박사.

그에 버금갈 만큼 K는 민감해져 있다. 선무당보다 더 눈썰미 있고, 또 들여다 볼 줄도 내다볼 줄도 안다는 얘기다. 특히 미키에 대한 그리움보다 덜 하지 않는 여성의 체취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 박사(앤서니 홉킨스)는 예리한 관찰을 통해 FBI 신출내기 스털링 요원(조디 포스터)를 만난지 몇분만에 그의 신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차린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 박사(앤서니 홉킨스)는 예리한 관찰을 통해 FBI 신출내기 스털링 요원(조디 포스터)를 만난지 몇분만에 그의 신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차린다.
ⓒ 영화 <양들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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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K인가?"
"네, 그렇습니다."
"수갑을 풀어주고 자네는 나가 있게."

간수에게 명령한다. 수갑을 차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수갑이 풀어지면 손 뿐 아니라 마음까지 풀린다는 사실 말이다.

소장은 시가를 피우고 있다. 향내만으로도 그것이 '몬테크리스토'인 것이 틀림없다. '코히바'나 '로미오와 줄리엣'과는 다른, 진하고 그윽한 향취 때문이다. 재떨이 옆에는 레미 마르땡(레미 마틴, 레미 마르텡 등 발음에 따라 이름이 여러 개다!) XO가 적당히 채워진 브랜디 잔과 치즈 몇 조가리와 함께 병째로 놓여있다. K에게 이어진 생각은 보잘 것 없는 수용소 소장이 값비싼 시가에 브랜디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라는 점이다. 무언가 구리다.

"시가 피울 줄 아나?"

시가를 권한다. 소장이라는 권위적인 사람이 보이는 뜻밖의 호의다. 마지못해 받는 체 한다. 소장이 직접 불을 붙여 준다. 한 모금뿐이었는데 K는 이내 몽롱해 진다. 워낙 오랜만이어서인지 조금 있다가 욕지기마저 난다.

"한 잔 하겠나?"

대답을 하기 전에 이미 술을 따른다. 술잔을 권하며 뜬금없이 묻는다.

"자네, 미나미 의원님 아나?"

생소한 이름이다.

"그분이 누군가요? 모르겠습니다."

소장은 눈을 살짝 찌푸린다.

"몰라? 그러면 미야자와 회장님은?"

브랜디를 음미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계속 모르는 사람에 대해 묻는다. 아니 얼른 대답하라고 다그친다는 게 맞다.

"그분도 모릅니다."

소장이 시가를 끈다. 그리고 이번에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무언가에 골몰한다. 잠시 후 비굴한 웃음은 띠었지만 조금은 곤혹스럽게 말한다.

"알았어. 알았다고. 잘 지내보세."

난데없이 악수를 청한다. 그리고 간수를 부른다. 소장은 간수에게 귀엣말을 하고, K를 돌려보낸다. K는 그새 아까운 브랜디를 한 번에 목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 시가 '몬테크리스토'를 마치 에드몽 단테스가 약혼녀 메르세데스의 입술을 빨아들이듯 깊숙이 흡입한다. 마지막 브랜디일지도, 마지막 시가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탓이다.

방장 나가노가 다른 때와는 달리 친히 K를 맞는다.

"별일 없었나?"

진심어린 궁금증이다.

"네, 딱히…."

K는 건조하고 심드렁하게 답한다.

"아니, 그러지 말고. 소장이라는 인간이 그냥 수형자들을 부를 인간이 아니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봐."

나가노 방장답지 않게 사정하는 어조다. 못해줄 것도 없어서 방장에게 시가와 브랜디를 권한 일, 누구를 아느냐는 질문 등이 있었다고 전했다. 방장은 흥미롭다는 듯 다 듣고 나서 K에게 던진다.

"미나미 의원과 미야자와 회장에 대해 잘 안다고 답하지 그랬어. 아마 틀림없이 무슨 실력자들인데 자네 뒷배가 돼 주기 위해 작업 중인 것 같은데."

"아니, 모르는 사람을 모른다고 해야지, 어떻게 안다고 해요?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K가 너무 정색한다. 그의 말이 극히 지당하다. 하지만 K 역시 뒤돌아서서는, '잘 아는 분'이라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순간적인 후회를 빼꼼히 드러내기도 했다. 그만큼 수용소에서 빠져나가야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어 난감함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날부터 K는 '모든 것'에서 열외가 됐다. 작업이나 점호는 물론 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사람으로서 모든 의무가 '면제'됐다는 얘기다. 나고야 출신 카가와가 비아냥거린다.

"좌우지간 사회에서나 갇힌 곳에서나 든든한 '빽'은 있어야 돼. 소장 독대하고 나오더니 완전히 귀한 집 도련님이 됐다니까."

K는 편치만은 않다. 여기 안에서야 어떻게 되든 빨리 이곳에서 나가야된다. 오로지 모든 신경은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데 집중돼 있다. 아무래도 수용소 '짬밥'이 가장 오래된 나가노 방장과 상의하는 수밖에 없다.

"힘든 얘기야."

나가노는 단호하다. 일말의 기대도 갖지 말라는 말투다.

"내가 이곳에 온지 4계절이 한 번 돌았고, 다시 새로운 계절을 맞고 있어. 그 사이에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있기는 했지. 죽어서 나가는 사람 몇몇. 당신, 당신이 여기 어떻게 들어오게 됐는지 아나? 당신이 아무리 부인한다 해도, 이곳에 들어 온 이상 그리 간단하게 나갈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해야 돼. 아니 그것에 순응하지 못하면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을 거야."

흐른 시간이 알려줬다. 이 수용소에는 다른 교정시설에서 요주의 인물로 구분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게 흉악범인지, 아니면 중요 양심범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회에서 격리해야만 하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는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K 또한 살인에다 국가안전보장법 위반이라는 교묘한 법적인 올무에 다리가 잡혀 있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면 올무에 다리만 뜯겨나간다든가 아니면 목이 졸려 죽기 십상이라는 게 나가노 논리다.

영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에서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에게 레드(모건 프리먼)가 건넨 얘기처럼 담담하다.

"희망? 얘기 하나 해 줄까? 희망은 위험한 거야. 희망은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어. 이 안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장기수인 레드(모건 프리먼)은 아내를 죽였다는 누며을 쓰고 감옥에 들어온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갖지 말라고 충고한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장기수인 레드(모건 프리먼)은 아내를 죽였다는 누며을 쓰고 감옥에 들어온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갖지 말라고 충고한다.
ⓒ 더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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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일단 나대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K가 수용소에서 혹시 누릴 수 있다면,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면서, 혹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기회를 기다리라는 말이다. K 역시 현재로서는 나가노에게 맞설 논리나 자신이 없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생을 스스로 마감해야 할 만큼 분노와 억울함만 밀려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노역을 하면 바깥일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작업에서 열외 되면서 K 머리는 더욱 잡생각으로 가득 찬다. 온갖 생각은 뇌척수액으로 변한다. 그 뇌척수액은 뇌압을 점점 높인다. 머리가 하얗게 아프다. 이제는 호두처럼 반으로 쪼개질 것 같다. 아니 폭발할 것 같다. 그렇게 K 몸과 마음은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는 것이다.

미키는 오하라가 적어준대로 스텔라와 미야자와 회장에게 연락해 만났다. 스텔라의 클럽 '라 스트라다'에서 다케우치가 저지른 몹쓸 짓에 대해 정보를 나눴다. 여자 둘은 서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풍파는 겪어봤을 미야자와 회장도 격분할 정도로 다케우치 행태가 끔찍했다는 것이다.

미키는 이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K 얘기를 했다. 가능하면 구해 주십사 하고 민원도 넣었다. 그래서 미야자와 회장은 미나미 의원에게 얘기했고, 자신도 직접 관계자에게 연락해서 이감(移監) 수용소 소장이 K를 찾게 된 것이다.

미야자와 회장은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이토 기자, 살인에다가 국가안전보장법 위반 혐의까지 덧씌워져서 당분간은 힘들 것 같네. 정식 재판으로 무죄를 하루라도 빨리 증명하지 못하고서는 금세 나올 수는 없다고 하는군."

미키는 역력히 실망한다. 그렇다고 간단히 물러설 그녀가 아니다.

"회장님,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문제의 열쇠는 다케우치입니다. 가능성이 적기는 하지만, 그 인간이 K 무죄를 자신 입으로 얘기하게 만드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회장님과 스텔라를 소개해 준 오하라 검사가 법정에서 이 모든 사실을 증언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기소가 됐을 경우고요. 현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무시무시한 일들을 지렛대 삼아서 다케우치를 압박한다면, 아니 협박한다면 그 인간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기소한 상태도 아닙니다. 단순히 법적 근거 없이 구금해 놓은 상황이니까 다케우치 팔을 비틀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다는 얘기죠."

미야자와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미키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한마디 더 거들고 싶었다. 그러나 삼켰다. 아직까지는 극비리에 진행돼야 할 '호랑이 사냥'이었기 때문이다.

"이토 기자, 앞으로 우리와 긴밀하게 연락하자고. 다음에 더 소개해 줄 사람들도 있고."

미키는 미야자와 회장과 스텔라에게 인사를 하고, 클럽을 나섰다. 피곤이 몰려온다. 하지만 일단 머리가 아파서 맑은 공기도 쐴 겸 무작정 걸었다. 20여분이 지났나. 허기가 덮친다. 향이 진한 조금 걸쭉하게 만든 커리를 먹고 싶다. 아니 차갑게 준비된 '자루 소바'도 먹고 싶다. 입덧과는 관계없이 먹고 싶은 게 많아졌다. 아이를 가진 다음 미키에게 새롭게 생긴 현상이다.

어느새 신주쿠다. 습관처럼 오래된 커리집 '만나 나카무라야'를 찾는다. 오래되기는 했지만 분위기는 최근에 만든 프랜차이즈 식당이다. 밥 때가 지나서인지 북적이지는 않았다. 늘 먹던 대로 시푸드 커리에 망고 주스를 곁들인다. 진한 커리 향이 입맛을 돋운다. 새우에 소스를 묻혀서 먼저 맛본다. 오늘 따라 소스가 더 맛있다. 배고프다는 느낌에 허겁지겁 몇 술 뜬다. 이젠 좀 살 것 같다.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K가 처음으로 방송 출연했던 날 이곳에서 함께 식사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하루라도 빨리 다시 함께 밥 먹는 날을 만들어야 한다. K와 조슈아, 그리고 나, 우리 셋을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죽음 밖에 없다.'

미키는 아직 크게 불러 오르지 않은 배를 쓰다듬는다. 마법 주문을 걸듯 조슈아에게 엄마 결심을 전한다.


태그:#양들의 침묵, #렉터 박사, #레미 마르땡, #쇼생크탈출, #모건 프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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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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